💬강남규의 말줄임표 | 망한 영화 ‘염력’

매주 수요일은 덕질 경험기부터 음악/영화/웹툰 리뷰에 이르기까지, 저의 동료들이 쓰는 아티클이 실립니다. 오늘은 '강남규의 말줄임표'입니다. 성공작과 실패작, 흥행작과 망작의 중간 어디쯤에 있는 작품들을 4주에 한 번 소개합니다.

어떤 이야기는 마침표나 느낌표가 아니라 말줄임표로 말한다. 완결성 있게 작품을 맺거나(마침표), 놀라운 경험을 제공(느낌표)하는 게 아니라, 그저 “이랬다면…”이라는 회한 또는 아쉬움을 중얼거리거나 원망 섞인 상상력을 어떻게든 표현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전하는 이야기. 그런 이야기라면, 읽는 사람도 마침표나 느낌표가 아니라 말줄임표로 읽어야 한다.

망한 영화 얘기로 이 지면을 연다. 손익분기점 약 400만명, 실제 관객수 99만명. 망한 영화의 대명사, <염력>이 그런 영화다. 99만명밖에 보지 못했다니 설명이 약간 필요할 테다. 어느날 우연히 강력한 염력을 갖게 된 소시민 ‘석헌’이 가난 때문에 오래전 절연한 딸 ‘루미’를 아내의 장례식장에서 다시 만난다.

루미는 엄마와 제법 잘 나가던 치킨집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가게가 있는 곳이 재개발구역으로 지정되면서 쫓겨날 위기에 처해 있다. 루미와 동료 상인들은 맨손으로 쫓겨나지 않으려고 철거반대투쟁에 돌입하지만 용역깡패들의 폭력과 경찰의 진압에 떠밀려 망루에 올라 농성한다. 농성 중에 건물에 불이 번져 목숨을 위협받는데, 이들을 석헌이 초능력으로 구해내는 이야기다.

맞다. 이 영화는 2009년 일어난 용산 참사를 모티브로 한다. 용산 참사를 이루는 몇몇 장면들을 영화는 충실하게 표현하는데, 건물 농성과 화재, 옥상으로의 대피는 물론이고 컨테이너 투입이라든지 인터넷방송(실제 사건에서는 칼라티비)의 생중계라든지 남일당 벽돌 모양이니 하는 것들이 빠짐없이 등장한다. 이 시점에서 용산참사는 모티브 수준이 아니라 말 그대로 ‘재현’이고, 대부분의 관객은 저 사건의 실제 결말을 아는 채로 이 영화를 감상하게 된다.

이 영화를 마침표로 읽으면 확실히 부실하고 별로 건질 게 없다. 신파적이고, 사회비판적인 주제의식도 옅다. 느낌표로 읽어도 아쉽긴 마찬가지다. 초능력을 다룬 작품이지만, 스펙타클한 묘사도, 극적인 활용도 잘 보이지 않는다. 여지없이 ‘망작’이다. 하지만 말줄임표로 읽으면 감상이 달라진다. 저 용역깡패들을 쓰러뜨릴 초능력이 있었다면…. 저 경찰 방패벽을 무너뜨릴 초능력이 있었다면…. 저 불타는 망루 위의 사람들을 구해낼 초능력이 있었다면….

용역깡패들에게 속수무책으로 밀려본 사람, 경찰 방패벽에 막혀본 사람, 용산참사에 제 일처럼 아파본 사람이라면 한번씩은 속으로 곱씹었을, 그런 상상의 말줄임표. 이미 벌어진 일이기에 다시 어찌할 수 없음을 아는 사람의 말줄임표. 마침표도 느낌표도 아닌, 누군가의 이해를 바라는 것도 아닌, 그저 속으로 중얼거리는 말줄임표.

<염력>은 그런 영화다. 경찰이나 용역깡패에게 한 번이라도 가로막혀본 사람은 이 영화를 관통하는 정서를 정확히 안다. ‘저들은 폭력을 마음껏 휘두를 수 있는데 왜 우리는 그럴 수 없는가.’ 그런 막막함. 맞대응을 하면 여론에서 밀리고, 대응하지 않으면 현장에서 밀려버리는 딜레마.

물론 저들이 가진 폭력의 역량에 비해 우리가 휘두를 수 있는 역량은 너무나 작아서, 기껏해야 계란으로 바위치기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의 허망함. ‘저들을 휩쓸어버릴 초능력을 갖고 싶다.’ 그들 앞에 서본 사람들이면 누구나 해봤을 상상이다. 이 영화가 정말로 표현하고 싶은 건 초능력도 부성애도 사회비판도 아닌, 바로 그 ‘상상의 현실화’다.

위기감이 최고조로 치솟는 장면이 있다. 건물이 화염으로 뒤덮이고 망루 위 사람들의 탈출구는 없어 보인다. 석헌이 염력으로 먼 거리를 빠르게 날아오지만, 앞으로 최소한 몇몇은 죽을 것 같다. 누군가 죽지만 다수는, 그리고 루미는 살려내면서 끝날까? 아니면 초능력도 이들을 구할 수 없다는 절망적인 엔딩? 그런 착잡함이 밀려들 즈음, 놀랍게도 신석현은 모두를 구해낸다.

‘모두’에는 경찰도 포함된다(용산참사 때 경찰도 한 사람이 사망했던 걸 상기해보라). 과도할 정도로 완벽한 해피엔딩? 아니. 그 다음 이어지는 결말부에서 루미와 상인들은 결국 쫓겨난다. 초능력으로 사람을 구했으나 그뿐이었다. 석헌은 용역업체 사장에게 “니들이 이겼다. 좋냐?” 한 마디 남기고 자수한다. 철거는 막지 못했다. 경찰폭력은 초능력으로 막을 수 있지만, 자본폭력은 그럴 수가 없어서일까.

어쩌면 이 영화는 애초에 철거된 현실 자체를 바꿀 생각이 없었던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단지 영화에서라도 사람을 살리고 싶었을 뿐이고, 그걸 해낸다면 그 이후는 어찌 되어도 괜찮다는 것처럼. 오직 그것이 이 영화를 만든 목적이라는 듯이. 그러고 보면 용역업체 사장에게 조롱 섞인 말을 던진 석헌의 표정은 어쩐지 꽤 담담하게 보였다. 그 담담함. 마침표도 느낌표도 가질 수 없던 서러운 사람들의 삶은 오직 담담한 말줄임표로만 위로받음을 알기에, <염력>은 ‘왕도’를 걸을 수 있었음에도 이런 대중적 실패의 길로 차박차박 걸어간 것은 아닌가. 

물론 <염력>은 이리 보나 저리 보나 실패한 영화다. 많이 지적된 것처럼, 남성-소시민과 부성애라는 코드가 신파적이고 시대착오적이라는 비판도 타당하다. 액션은 미흡하고, 서사는 헐랑하다. 말줄임표의 영화로서도 아쉬운 부분은 당연히 많다. 그럼에도 콘텐츠라는 것에 현실에서 이룰 수 없는 일에 대한 상상적 실현 혹은 치유의 측면이 있다고 한다면, 나는 이 영화가 바로 그런 의도로 창작된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면 우리는 이 영화, 아니, 이런 영화들을 단지 앞서의 비판으로만 기각하고 치워둬도 되는 걸까. 애초에 거기에 목표가 있는 영화가 아닌데... 비판은 하되, 말줄임표의 관점에서 읽고 비판하는 게 감독에게, 우리에게, 또 우리 사회에 유익한 일이다. 말줄임표로 그려낸 영화를 느낌표와 마침표로 읽으면서 비판 혹은 비난하는 일은, 수용자가 문화의 가능성을 마침표와 느낌표의 세계에 가두는 것처럼 느껴져 조금 쓸쓸하다. 

말이 길었다. <염력> 얘기는 여기서 이만 줄인다. 지면 얘기를 하자. 여기서는 (언제까지 쓸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작품들을 소개하려고 한다. 망한 작품 얘기를 하겠다는 건 아니다. 느낌표, 마침표가 아닌 말줄임표로 전하고 싶은 이야기들, 또한 그 이야기를 말줄임표로 읽을 때에야 이해하게 되는 콘텐츠를 얘기할 거다. 세상에 그런 작품들이 제법 많더라. | 강남규 (문화사회연구소 연구위원)

※ 수요일 코너 안내

매주 수요일 저녁에는 4명의 필자들이 돌아가며 글을 씁니다. 월 1회 연재라고 보시면 됩니다. (물론 사정에 따라 주기나 내용이 달라질 수도 있답니다~;;;)

1) 핑크블러드의 덕후의 마음: 덕후 마음은 미지의 신세계...? 요즘 덕질은 '포카'가 핵심인데, 그걸 분석하고 해석하는 것보다 이 판에 막 빠져든 사람의 기쁨과 슬픔이 궁금하지 않나요? '핑크블러드'가 그런 얘기를 씁니다.

2) 랜디 서의 음악 리뷰: 입체적인 음악 감상을 위한 가이드. '시사인'과 '위버스 매거진', '아이돌로지'에 글을 쓰고, 저와는 '360리뷰'를 진행한 랜디 서 평론가가 주목하는 싱글/앨범 리뷰입니다.

3) 임희윤의 북유럽 이야기: 어디가서 아는 체 하기 좋은 이야기. 동아일보 임희윤 기자가 쓰는 북유럽 음악 가이드입니다. 북유럽의 여러 장르부터 앨범 아트웍에 이르는 광범위한 이야기를 들어보세요. 

4) 강남규의 콘텐츠 리뷰: 언제나 '공동체'는 중요합니다. 콘텐츠든 비즈니스든 결국 함께 사는 문제니까요. <지금은 없는 시민>의 저자 강남규님이 쓰는 영화/드라마/웹툰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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