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레터 | CD를 정리하고 정리하고 정리하는 밤

※ 멤버십 전용 콘텐츠입니다.

구독자님, 갑자기 여름이 된 듯한 하루였습니다. 그런데 해가 지니 또 갑자기 선선해지네요.

계획에 없던 레터를 보냅니다. 그냥 뭔가를 얘기하고 싶었나봐요. 두서없더라도 이해해주세요. 가끔 이렇게 구독자님에게만 보내는 얘기를 쓰게 될 겁니다.

여름은 이상한 계절입니다. 한낮의 열기가 식어가는 저녁이 되면 쓸쓸해지거든요. 이 쓸쓸함은 공허함과도 비슷합니다. 가득찼던 것이 한꺼번에 빠져나가는 기분이요. 저는 어제 저녁부터 오늘 아침까지 CD를 정리했습니다. 전부 다 정리한 건 아니에요. 그냥 어디에 뭐가 꽂혀있는지 알 정도로만 정리했습니다. 

BEFORE

AFTER

네, 많이 달라졌.... 뭐가 달라졌는지 전혀 모르겠죠? ㅎㅎ 맞아요. 새벽 6시쯤, 동이 트는 걸 보면서 '이제 됐다...'라고 생각했는데 저 역시 뭐가 달라졌는지 모르겠더라고요. 하지만 정말 많이 달라졌어요. 저만 아는 변화입니다.

그 새벽에 거의 듣지 않던 음반을 꺼내서 틀어놓고 의자에 앉아 음악을 들었습니다. 창 밖에서 새가 우는 소리가 들렸는데 그 분위기가 너무 좋아서 한참을 가만히 있었습니다.

존 쿠삭이 주연한 영화 <하이 피델리티>, 한국어 제목은 <사랑도 리콜이 되나요?>에는 주인공이 LP 정리에 대해 얘기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인생의 큰 일(이를테면 실연...)을 겪을 때마다 음반을 정리하는데 처음엔 단순하게 A, B, C 순서로 정리했던 음반들을 나중엔 연도별로 정리했다가, 장르별로 정리했다가 연관 키워드로 정리했다가 음반에 담긴 추억별로 정리했다가... 뭐 이렇게 기준을 바꿀 때마다 몇 시간, 혹은 종일이나 며칠을 음반 정리를 한다는 얘기였어요. 낭만적이죠.

저는 한국 음반은 가나다 순서로, 해외 음반은 여성 보컬 > 혼성 보컬 > 매가리 없는 남성 보컬 / 나머지... 순으로 정리했습니다. 음반을 손에 들고선 이 목소리가 어땠더라 가늠해보는 것도 즐거웠어요. 그래서 시간도 더 걸렸나봅니다. 그래서 음반장 앞에 서면 이젠 가상의 그리드처럼 카테고리가 나눠져요. 물론 저만 아는 거지요.

뭔가 바뀌는 것, 달라진다는 것은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해요. 그런데 그 변화는 당장 눈에 보이지 않을 겁니다. 남들은 '에? 뭐야? 똑같은데?' 라고 할 수 있죠. 하지만 당사자는 분명히 알고 있을 거에요. 나는 과거의 나로는 돌아갈 수 없어... 라고요. CD장을 정리하고 나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새벽 6시가 아니라 저녁 6시에요. 그 정도의 시간은 지나야 '아 뭔가 정말로 달라졌구나' 싶은 거겠죠.

구독자님, 여름이 옵니다. 해가 지니 조금 쓸쓸해집니다. 어째서인지 서글퍼집니다. 뭔가 중요한 걸 잊어버린 기분이 됩니다. 그리고 저는 이만큼의 가벼운 우울감을 사랑합니다. 오늘 새벽에는 트레스패서스 윌리엄(Trespassers William)의 노래를 들었습니다. 여름이 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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