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약]
1. 전기차가 니치 마켓에 머무르던 2010년대, 파우치는 자유로운 형태 변형을 기반으로 한 높은 에너지 밀도를 강점으로, 한국 배터리 업체들의 주력 폼팩터로 자리잡습니다.
2. 하지만 이후 2020년을 전후로 전기차 전용 플랫폼의 개발, 셀 투 팩 등 패키징 기술의 개발로 인해 점차 그 경쟁력이 희석되기 시작합니다.
3. 특히, 최근 세계 각국에서 전기차 화재 시 안전과 관련된 열 전파 방지 규제를 강화하려는 움직임이 포착되면서, 이에 취약한 파우치는 시장 점유율을 빠르게 잃고 있습니다.
4. 그러나 경로 의존성으로 인해, 이제껏 파우치를 주력으로 싸워온 한국 배터리 업체들이 쉽게 중국 업체들과 같은 각형으로 전환하기는 어려운 상황입니다.
5. 이렇게 불리한 환경에서, 파우치 업체들은 원통형과 같은 기존 보조 폼팩터로의 전환, 혹은 미드니켈 / LFP 등 소재 변경 등의 선택지를 가지고 중국 업체들과 경쟁해야 할 것입니다.
2년 전, ‘배터리 폼팩터 전쟁: 왜 테슬라는 원통형 배터리를 쓰나?’라는 주제로 원통형 배터리의 장단점에 대한 글을 썼습니다. 운 좋게도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가져주셨는데요.
이번에는 또다른 배터리 폼팩터인 '파우치형 배터리'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보려고 합니다.
파우치형을 비롯해 원통형 / 각형 배터리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많은 분들이 이미 알고 계시리라 생각됩니다. 혹 익숙치 않은 분이 있으시다면 아래 링크를 통해 이전 글을 먼저 참고 부탁드리겠습니다.
파우치도 잘 나가던 시절이 있었다
글로벌 시장에서 파우치 배터리를 주력 제품으로 밀고 있는 업체는 한국의 LG에너지솔루션과 SK온 두 개 업체입니다. 삼성SDI, CATL 등 각형을 주력으로 하는 타 경쟁사와 달리, 두 기업은 일찍이 2010년대부터 파우치에 집중하고 있는데요.
이들이 파우치를 전기차용 주력 제품으로 밀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과거 2010년대 전기차 시장이 요구했던 핵심 스펙을 파우치가 꽤나 훌륭하게 충족시킬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2010년대 초중반으로 돌아가보겠습니다.
전기차가 극소수 소비자를 타겟하는 니치마켓에 머무르던 당시에는 전기차를 위해 설계된 전용 플랫폼이 없었습니다. 자동차 제조사들은 기존 내연기관 자동차 플랫폼을 재활용해, 엔진과 트랜스미션을 들어내고 그 자리에 배터리와 모터를 설치하는 방식으로 전기차를 설계했습니다.
때문에 배터리 탑재 공간이 한정적일 수밖에 없었겠죠. 이 못생기고 좁은 공간에 최대한 많은 배터리를 밀어 넣어서 에너지 밀도를 높이는 것이 관건이었습니다.
이런 환경은 파우치 배터리가 활용되기 더없이 적합했습니다.
많이 들어보셨겠지만, 파우치 배터리의 장점은 형태 변경이 용이하다는 것입니다. 단단한 금속 캔을 활용하는 원통형 / 각형과 달리, 상대적으로 유연한 플라스틱 합성 소재를 케이스로 활용하기 때문인데요.
이러한 이유로 OEM들이 제시하는 좁고 못생긴 공간에 최대한 많은 배터리를 채워 넣어 에너지 밀도를 높이는 데에는 파우치가 유리했던 것입니다.
파우치가 외면받기 시작한 이유
하지만, 전기차와 배터리 기술 개발 진전에 따라 이러한 파우치의 경쟁력은 점차 희석되고 퇴보하는데요.
먼저, 2010년대 후반부터 전기차 전용 플랫폼이 개발되기 시작합니다.
기존 내연기관 공용 플랫폼과 달리, 오직 전기차를 위해 설계된 플랫폼을 말하는데요. 아래 사진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스케이트보드 형태로 넓고 평평하게 배터리를 깔아 충분한 공간을 확보합니다. 배터리를 탑재할 공간이 충분해지면서 각형이나 원통형 배터리로도 충분히 높은 주행거리를 확보할 수 있게 됐고요
실제로 테슬라의 경우 시장 선도주자답게 일찍부터 전기차 전용 플랫폼을 내놓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전용 플랫폼에 기반해, 원통형 배터리를 가지고도 2019년 당시 업계 내에서 가장 긴 주행거리를 구현해냅니다. 원통형은 원 / 파 / 각 세 가지 폼팩터 중 에너지 밀도 관점에서 가장 열위한 것으로 알려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죠.
또 2020년을 전후로는, 셀 투 팩, 셀 투 샤시와 같이 모듈 / 팩을 생략함으로써 에너지 밀도를 높일 수 있는 패키징 기술들이 새로이 개발됩니다.
이런 셀 투 팩, 셀 투 샤시와 같은 기술들은 원통형 / 각형을 중심으로 적용되고 있습니다. 내구성과 화재 방지에 취약한 파우치의 특성상, 모듈과 팩을 생략하기가 어렵기 때문으로 보이는데요.
실제로 이 분야 선두주자인 CATL은 각형 배터리를 기반으로 일찍이 2019년 셀 투 팩 기술을 최초로 선보이고, 양산에 적용합니다. 이후 이를 지속 업그레이드하며 2세대, 3세대 셀 투 팩 기술까지 내놓았는데요.
반면 파우치 배터리를 주력으로 하는 LG에너지솔루션의 경우 이제 막 셀 투 팩 기술 개발을 완료하고 양산을 논의하고 있는 상황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각형에 비해 한참 뒤쳐져있는 상황인 거죠.
이렇게 상황이 변화하면서 파우치의 지위는 배터리 폼팩터 전쟁의 선도자에서 추격자로 점차 내려앉게 되는데요.
더 걱정되는 건 앞으로의 미래입니다.
파우치를 위한 나라는 없다?
그 이유는 바로 안전과 관련된 규제 때문인데요.
전기차의 보급과 함께 소비자들의 화재 위험에 대한 경각심도 함께 높아지고 있습니다. 전기차 화재 사고로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는 뉴스가 매일 같이 보도되면서, “전기차는 불 나면 바로 죽는거 아니야?”하는 소비자들의 우려가 늘고 있는데요.
이러한 화재로 인한 인명 피해를 예방하기 위해, UN에서는 2018년 일찍부터 전기차 배터리 화재와 관련한 안전 규제 권고안을 내놓았습니다. 그 내용인 즉슨, 화재, 폭발 등 열 폭주 전파(Thermal Propagation)에 의해 운전자의 안전을 위협하는 상황이 발생하기 ‘5분 전’에 탈출할 수 있도록 승객에게 안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인데요.
여기서 ‘열 폭주 전파’라는 단어에 대한 설명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배터리 셀의 온도가 겉잡을 수 없이 올라가 화재로 연결되는 현상을 열 폭주(Thermal Runaway)라고 부릅니다. 열 폭주 전파(Thermal Propagation)란, 이렇게 하나의 배터리 셀에서 발생한 열 폭주가 다른 셀로 전파되면서 더 큰 화재로 이어지는 현상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UN에서 발표한 규제 권고안에 근거해, 세계 각국에서는 자국 시장을 대상으로 열 폭주 전파 방지 검사 및 인증 획득을 의무화 추진하고 있습니다. 전기차 선진국이라 할 수 있는 중국은 이미 법제화가 완료됐고, 유럽과 미국이 이에 뒤이어 규제 도입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열 폭주 전파 방지 규제는 앞으로 점점 더 강화될 것으로 전망되고 있습니다.
이제까지는 열 폭주 전파를 ‘5분’ 동안 지연시켜야 했으나, 머잖아 UN에서 이를 ‘15분’, ‘30분’ 수준으로 강화한 권고안을 다시 내놓을 것으로 예상되고 있는데요. 또 장기적으로는 열 폭주 전파 자체를 금지하는 수준까지 이를 것으로 예상하는 의견도 있습니다.
이렇게 UN에서 강화된 규제 권고안을 내놓으면, 그 시점에 차이가 있을 뿐 세계 각국에서 이를 반영한 강화된 규제를 내놓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때문에 전기차 제조사들 역시, 이러한 규제에 대비해 배터리 제조사들에게 열 전파 방지와 관련된 강화된 스펙 기준을 요구하고 있는데요.
실제로 아래 CATL의 조사 자료에 따르면, 2019년까지만 해도 절반 이상의 OEM들은 열 전파 방지와 관련된 별도의 요구 조건을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2020년이 되자 80% 이상의 OEM들이 5분 이상의 열 전파 방지 지연 조건을 요구하기 시작합니다. 2021년이 되자 모든 OEM들이 열 전파 방지 지연을 요구하는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 86% 이상이 열 전파 방지 ‘제로(Zero)’를 요구했다고 합니다.
문제는, 파우치 배터리가 구조적으로 이러한 열 폭주 전파 방지에 매우 취약하다는 겁니다. 원통형 / 각형과 달리, 파우치형은 격벽 역할을 해주는 금속 캔이 없고, 가스 발생 시 이를 방출해 화재를 예방하는 벤트(Vent) 기능도 없습니다.
여기에 추가로 시장 대세를 따르기 위해 셀 투 팩 기술까지 적용한다면, 파우치의 구조적 안정성은 더욱 더 불안해질 겁니다. 화재를 예방하고 지연시키는 역할을 해주는 모듈이나 팩이 없다면 열이 확산하는 것을 막기가 더욱 어려워질 테니까요.
더욱이 LFP를 주력으로 하는 중국 업체들과 달리, 한국 업체들은 화학적으로 불안정한 NCM 하이니켈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껍데기 뿐만 아니라 그 내용물까지 상대적으로 화재에 불리한 상황인 겁니다.
결국, 이렇게 열 전파 방지 규제의 강화로 인해 중국 / 유럽 / 미국을 비롯한 전세계 시장이 파우치 배터리에 점점 더 불리한 환경으로 변화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반영해서인지, 실제로 파우치의 시장 점유율은 빠르게 하락하고 있습니다. 아래 SNE리서치 자료에 따르면, 2020년 28%에 육박했던 파우치 점유율은 3년 뒤인 2023년에는 절반 가까운 수준인 17%까지 하락합니다.
뿐만 아니라 기존에 파우치 배터리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던 주요 OEM들마저 새로운 폼팩터로 눈을 돌리고 있는데요.
미국의 GM은 원통형과 각형, 유럽의 폭스바겐은 각형 중심으로 배터리 포트폴리오를 전환 검토하고 있습니다. 반대로 파우치형에 새로 관심을 두는 OEM이 생겼다는 소식은 듣기 힘든 상황이고요. 이쯤 되면, 파우치 주력 업체인 LG에너지솔루션과 SK온의 향후 신규 수주에도 빨간 불이 켜졌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왜 그들은 파우치를 고집해야 했나?
그렇다면 다음으로는, “왜 이런 상황을 미리 예측하지 못하고 파우치를 계속해서 고집했는가?”하는 의문이 드실 겁니다. 한국 업체들이 이러한 의사결정을 내린 정확한 사정은 알기가 힘들지만, 추측은 해볼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결국, ‘경로의존성’ 때문이지 않을까 하는 게 제 생각입니다.
2010년대까지는 분명 파우치는 시장 수요에 굉장히 잘 부합하던 폼팩터였습니다. 때문에 SK온과 같은 한국 업체들은 파우치를 고도화하기 위한 방향으로 특허와 기술을 축적했을 것입니다. 고객들에게도 파우치를 적극 세일즈해서 파우치용 생산 라인을 구축해 두었을 것이고요.
그러던 중 2020년대 초가 되자, 앞서 말한 이유들로 인해 ‘파우치를 계속 주력으로 밀어도 될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내부적으로도 조금씩 제기됐을 것입니다.
하지만, 2022년 중국 배터리 업체를 배제하는 미국의 IRA 정책이 발표되면서, 이러한 의문은 싸그리 덮어두게 됩니다. 한국 파우치 업체들은 이른바 ‘수주 대박’을 맞았는데요. 폼팩터가 무엇이든 간에 일단 ‘한국 업체’ 딱지만 달면 모든 OEM들이 환영해주었으니까요. 어떤 폼팩터가 유리하고 불리하고를 잴 것 없이, 현재 주력 제품인 파우치를 기반으로 다시 수 백 GWh에 달하는 미국 합작 공장 설립 계획을 짜게 됩니다.
이쯤 되면, 돌아가기에는 너무 먼 길을 와버리게 됩니다. 이렇게 파우치를 중심으로 내부 역량과 미래 수주 계획을 모두 짜놓은 상황에서, 다른 폼팩터로 급선회한다는 게 쉬운 일일까요?
물론 각형 배터리 제조 자체가 기술적으로 전고체 배터리처럼 난이도 높은 과제는 아닙니다. 실제로 LG에너지솔루션과 같은 업체는 과거에 각형 배터리를 IT 제품용으로 양산했던 전력도 있고요.
하지만, 그 사이 중국 경쟁사들은 각형 배터리에 대해 많은 고도화를 진전시켜 놓은 상황입니다. 이제 와서 이를 추격하기 위해서는 다시 출발선 원점에 서서 수많은 특허를 회피하기 위한 방안을 고심해야 할 겁니다.
뿐만 아니라, 각형을 주력으로 선회하겠다고 발표하는 것은 이제껏 거래해온 고객들에게 ‘파우치는 열등한 폼팩터다’라고 공식 선언하는 셈이 될 것입니다. 기존 고객인 OEM들 입장에서는 과연 파우치를 믿고 사도 되는 것인지 의심하게 될 수밖에 없겠죠. 구매 물량을 축소하거나 합작 계획을 없던 일로 만들어버릴 지도 모릅니다.
결국, 불리하든 유리하든 간에 파우치를 붙잡고 꿋꿋이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 한국 배터리 업체들의 현재 상황일 것이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그럼 한국 업체들은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이렇게 현재 시장은 파우치 업체들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돌아가고 있고, 그렇다고 파우치를 버리기도 어려운 상황입니다. 그렇다면, 한국 업체들은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주어진 옵션은 크게 2가지인 것 같습니다.
첫째로는, '폼팩터'를 변경하는 겁니다.
‘앞에서 폼팩터 못 바꾼다고 하더니 무슨 말이냐?’하실 수 있을 겁니다. 여기서 폼팩터 변경이라 함은, ‘각형’이 아닌 ‘원통형’으로의 변경을 말합니다.
LG에너지솔루션의 경우, 파우치형과 함께 원통형을 보조 제품군으로 보유하고 있습니다. 이를 기존 고객들에게 적극 세일즈해서 파우치 -> 원통형으로의 자연스러운 전환을 유도한다면, 망신당하는 일 없이 고객을 지켜낼 수 있을 것입니다.
특히나 최근 기존 원통형 배터리의 단점을 보완한 4680 배터리의 양산이 가까워지면서 많은 OEM들이 원통형 도입을 진지하게 저울질하고 있는 모양새입니다. LG에너지솔루션은 오래 전부터 원통형을 양산하면서, 중국 업체를 비롯한 경쟁사들에 비해 기술적으로나 양산 경험으로나 앞서 있는 상황이기도 하고요.
둘째로는, '내용물'을 변경하는 겁니다.
파우치라는 껍데기를 바꿀 수 없다면, 내용물을 조금 더 안전하게 바꿔서 안전 이슈를 조금이나마 극복하는 것인데요.
실제로 LG에너지솔루션의 경우, 기존 하이 니켈에서 니켈 함량을 줄인 ‘미드 니켈’을 적극 세일즈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니켈 비중이 높을수록 배터리의 안정성이 불안해질 수밖에 없는데요. 니켈을 줄여 화학적 안정성을 높인다면, 화재와 관련된 우려를 조금이라도 낮출 수 있겠죠. 한걸음 더 나아가, 더욱 안정적인 조성인 LFP까지 양산을 개시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고요.
물론 껍데기만 놔둔 채 내용물만 바꿔서는 한계가 있겠지만, 시도해 볼만한 선택지인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쉽지 않은 싸움이 될 겁니다
위와 같은 대안이 있다고는 하나, 각형 LFP를 주력으로 하는 중국 업체들과의 경쟁이 결코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 막 전기차 배터리 시장이 개화하기 시작한 상황에서, 쉽게 포기하기에는 너무 이르고 너무 아깝습니다.
반도체, 자동차, 조선 등 한국 경제를 뒷받침 해온 주요 산업들을 살펴보면 어느 하나 쉬운 길을 걸어온 사례가 없습니다. 어느 산업이든 중국, 일본 등 경쟁 국가들과의 치열한 수싸움과 피터지는 경쟁을 거쳐 세계 선두로 자리잡았죠.
배터리 역시 그러한 성장통을 겪고 있는 것이리라고 생각됩니다. 다른 핵심 산업들이 그러했듯, 배터리 산업 또한 지금의 힘든 길을 거쳐 글로벌 시장을 선도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소원해 봅니다.
※ 이 글은 전기차 전문 매체 EV POST 에 동시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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