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약]
1. 디스플레이 시장에서 중국 기업들의 시장 침투는 아래의 3단계로 진행됩니다.
- 1단계: 매스 시장(LCD) 핵심 기술 확보 후 커머디티화
- 2단계: 높은 원가 경쟁력 기반 매스 시장 장악
- 3단계: 하이엔드(OLED) 시장 침투
2. 최근 전기차 배터리 시장 상황이 악화되면서, 한국 업체들도 디스플레이와 유사한 위기감을 느끼고 있는데요.
3. 전기차 배터리 시장은 LCD 디스플레이와 달리 품질 / 성능 차별성이 없이 가격에 의해 모든 것이 좌우되는 ‘커머디티(Commodity)’화 되기 어렵다고 생각됩니다.
4. 때문에 LCD 디스플레이처럼 중국 업체들에 의해 100% 완전 잠식되는 일은 벌어질 가능성은 낮지만, 동일한 위기 의식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데요.
5. LFP로 대표되는 '중저가 매스 시장'의 경우, 한국 배터리 기업들은 LCD 디스플레이와 정반대로 중국 기업을 따라 잡아야 하는 추격자 포지션에 놓여 있습니다.
6. 또 NCM 하이니켈로 대표되는 '하이엔드 시장’의 경우, 한국 기업들은 OLED 디스플레이와 유사하게 더 저렴한 가격으로 시장 파이를 키우지 못하면 미래를 담보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7. 이러한 위기 상황은 LCD 디스플레이에서 그랬듯 "다 중국 정부 보조금 때문이다"라고 덮어만 두고 있을 수는 없는 상황입니다.
8. 아직까지도 정부 보조금이 없으면 생존이 어려운 디스플레이와 달리, CATL과 같은 중국 배터리 기업은 어느 정도의 이미 자생적인 경쟁력을 확보한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9. 때문에 현재의 한국 배터리 기업들이 처한 위기는 더 엄중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배터리 시장은 이미 중국에 빼앗긴 것일까?
한국 배터리 업체들의 상황이 안 좋습니다.
24년 1분기 실적이 발표되자, LG에너지솔루션, SK온, 삼성SDI 3사 모두 전년 동기 대비 역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뿐만 아니라 3사 중 대장격이라 할 수 있는 LG에너지솔루션은 IRA 보조금 혜택 제외 시 적자로 전환하기까지 했는데요.
물론 전방 시장인 전기차 시장 성장세가 전반적으로 주춤했던 영향이 컸던 것은 맞습니다. 전기차가 안 팔리니 당연히 배터리도 잘 팔리지 않았고, 배터리 업체 혼자 힘으로 이런 업황 다운턴을 막아내기는 어렵죠.
하지만 더 큰 문제는, 한국 배터리 업체들의 시장 점유율까지 또한 지속 하락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4년 전 도합 35%를 유지했던 3사의 전기차 배터리 시장 점유율은 이제 24%까지 떨어졌습니다. 반면 31%에 머물렀던 중국 CATL과 BYD의 점유율은 52%까지 상승했고요.
아직 전기차 시장은 성장 초입기에 있습니다.
글로벌 자동차 시장에서 전기차의 판매 비중은 23년 기준 약 15.8% 수준에 불과하기 때문인데요. 비록 시점에 대한 의견 차는 있을지라도, 이 침투율이 30%, 50%, 혹은 그 이상까지 점차 성장하며 전기차 배터리 시장 역시 현재보다 몇 배는 더 커질 것이라 예측해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앞서 언급한 시장 점유율 수치를 보면, 벌써부터 한국 업체들이 전기차 배터리 시장의 주도권을 중국 업체들에 빼앗겨버린 것이 아니냐는 우려를 금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경쟁 구도를 보면 자연스레 떠오르는 산업이 있습니다.
바로 LCD 디스플레이인데요.
불과 2010년대 중후반까지만 해도, LG디스플레이와 삼성디스플레이를 필두로 국내 업체들이 전세계 시장의 40% 가량을 점유하며 강자로 군림했습니다. 그러나 중국 업체들의 시장 진입이 본격화되면서 불과 5년 만에 국내 업체의 점유율은 단 10% 수준으로 떨어졌습니다. 삼성디스플레이는 이러한 상황을 예견해 일찍이 LCD 사업 자체를 접어버렸습니다.
또 아직 남아있는 LG디스플레이는 22, 23년 연속 2조원 이상의 대규모 적자를 기록하며 고난의 행군을 이어 나가고 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LG디스플레이는 21년 코로나 특수로 창사 이래 역대 최대 실적을 냈었다는 겁니다. 환호성이 채 사라지기도 전인 불과 2년 만에, 희망퇴직까지 받아야 하는 힘겨운 상황에 내몰립니다. 남아 있는 LCD 공장은 중국 업체에 매각하는 방안을 타진하고 있고요.
이제 한국 기업들은 상대적 고가 / 고성능의 OLED 시장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삼성디스플레이는 중소형, LG디스플레이는 대형 OLED 디스플레이 시장에 집중하는 방향으로 일찌감치 전략 방향을 선회했는데요.
그렇다면, 이렇게 막다른 길까지 와버린 디스플레이 시장은 정말로 한국 배터리 업체들이 앞으로 겪게 될 미래가 될까요?
한국 배터리 업체들은 중국의 제조업 굴기 공세를 버텨내지 못하고 점점 더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될까요?
중국은 어떻게 LCD 디스플레이 산업을 집어삼켰나?
배터리 시장의 미래를 가늠해보기 위해서는, 먼저 중국이 LCD 디스플레이 산업을 어떻게 지배하게 되었는지 그 경로를 따라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디스플레이 시장의 경우, 중국 기업들의 공습은 크게 3 단계로 진행됐습니다.
1번째 단계: 매스 시장(LCD) 핵심 기술 확보 후 커머디티화
첫번째 단계는, 상대적 공략 난이도가 낮은 매스(Mass) 제품 시장에 발을 들이고, 경쟁사와의 기술 격차를 좁히는 겁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20여 년 전인 2002년, 한국의 디스플레이 업체였던 하이디스를 중국의 BOE가 매입합니다. 당시 브라운관 TV 부품을 생산하는 업체에 불과했던 BOE는, 하이디스 인수를 통해 다수의 LCD 핵심 기술을 확보하게 됩니다. 인수 이후 4년 만에 하이디스는 부도 처리해버리면서, 먹튀 논란이 불기도 했었는데요.
이런 원천 기술 확보만으로는 부족했던지, 한국 LCD 엔지니어를 대상으로 공격적인 채용 공세를 벌입니다. 한국 엔지니어 한 명에 십 수 명의 중국 엔지니어가 붙어 기술을 배우는 방식으로 부족한 기술 격차를 메워나간 겁니다. 당시 중국 디스플레이 업체 회의실에서는 회의가 한국어로 진행된다는 우스갯소리가 들릴 정도였는데요.
이렇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노력으로, 중국 기업들의 디스플레이 기술은 무서운 속도로 발전합니다. 그리고 LCD 기술 또한 더 이상의 뚜렷한 기술적 진보가 이뤄지지 않으면서, 선두 주자인 한국과 후발주자인 중국 업체 간의 기술적 격차가 빠른 속도로 좁혀집니다.
이 과정에서 LCD는 '커머디티(Commodity)’ 속성이 강해지게 됩니다.
더 이상 업체 간의 품질 / 성능 차별성이 뚜렷하지 않고, ‘저렴한 가격’이라는 단일 기준에 의해 구매 여부가 크게 결정되는 재화에 가까워져 버린 겁니다.
2번째 단계: 높은 원가 경쟁력 기반 매스 시장 장악
두번째 단계로는, 저가의 대규모 물량 공세를 통해 점유율을 공격적으로 확대하며, 시장을 장악하는 겁니다.
앞서 말한 것과 같이, 커머디티 성격 제품의 구매에 있어 가장 결정적인 요소는 ‘저렴한 단가’입니다. 어차피 업체 간 품질과 성능 차이가 적다면, 굳이 돈을 더 지불하고 비싼 업체 제품을 쓸 이유가 없을 테니까요.
해서 중국 LCD 기업들은 공격적인 생산 능력 증설과 함께 대규모 저가 공세를 펼치기 시작합니다. 물론 이 과정에서 낮은 생산 수율로 인한 손실과 투자 자금 부족이란 이슈가 있었지만, 이는 중국 정부의 막대한 보조금을 활용해 손쉽게 해결되어 버립니다.
하지만 중국 LCD의 원가 경쟁력이 단순히 보조금에서만 나왔다고만 치부해버릴 수는 없습니다.
한국 업체들은 중국을 원가로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해 LCD 차세대 공정 투자를 중단하고, OLED 기술 투자에 전념하기 시작합니다. 반면 중국 업체들은 LCD 차세대 양산 공정에 투자를 집중하며, 원가 경쟁력을 더욱 더 높일 수 있게 되었고요.
뿐만 아니라, 중국 디스플레이 업체들은 후방 생태계까지도 중국 현지 기업들을 중심으로 완벽하게 구축해나가기 시작합니다. LCD 패널 제조 뿐 아니라 그 소재와 장비까지 더 저렴한 가격으로 조달하면서, 자체적인 원가 경쟁력을 높여나간 겁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양국 업체들의 LCD 원가 차이는 점점 더 커지게 됩니다.
3번째 단계: 하이엔드(OLED) 시장 침투
마지막 세번째 단계는, 이렇게 매스 제품 시장을 장악했다면, 기술 수준이 한 차원 높은 하이엔드(High-end) 제품 시장으로 침투하는 겁니다.
LCD 시장은 이미 중국의 장악이 완료됐습니다. 그리고 중국 디스플레이 업체들은 이제 한국 업체들이 마지막 보루로 수성하고 있는 OLED 시장으로의 침투를 본격화하고 있는데요.
충격적인 것은, OLED 시장에서조차 중국의 공습이 본격화됐다는 위기감이 느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미 24년 1분기 기준, 글로벌 스마트폰 OLED 시장에서는 중국 기업들의 점유율이 과반을 넘어서버렸습니다.
“전부 화웨이, 비보, 오포 같은 중국 스마트폰에 들어가는 물량 아니냐?”고 반문하실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애플조차도 아이폰 15부터 중국 BOE의 OLED 패널 공급을 승인해버립니다.
물론 그 공급 비중이야 삼성이나 LG보다 적을 것이고, 정확한 경쟁력을 파악하기 위해선 품질이나 원가 경쟁력까지 면밀하게 비교해 봐야겠지요. 하지만 이렇게 절대 나지 않을 것 같던 납품 인증은, 중국 디스플레이 기업들의 경쟁력이 OLED에서도 결코 무시할만한 수준이 아니라는 것을 뜻합니다.
따라올 수 없을 것 같던 OLED 시장조차도 중국 기업들의 공세에 한국 기업들은 위기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게 된 겁니다.
전기차 배터리는 디스플레이와 다르다?
그렇다면, 한국 경제의 차세대 먹거리라고 마르고 닳도록 외치고 있는 전기차 배터리 산업도, 디스플레이와 같은 경로를 걷게 될까요?
다행인지 불행인지 몰라도, 일단 디스플레이 시장에서 작동했던 중국 기업의 침투 공식은 첫 단계부터 배터리 시장에서 먹히지 않을 공산이 높습니다.
전기차 배터리는 커머디티 제품이 되기 어렵기 때문인데요.
커머디티의 핵심적인 특성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성능 / 품질 차별성이 낮아 ‘가격’이라는 단일 기준에 의해 구매 여부가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구매자는 가격이 낮은 제품이 있다면 언제든 기존 제품을 버리고 전환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전기차 배터리는 '수주 산업'의 특성을 갖습니다.
자동차 제조사들은 저마다 서로 다른 규격과 스펙을 요구하고, 비딩 과정을 거쳐 이를 충족시킬 수 있는 배터리 업체를 선정하게 됩니다. 선정된 배터리 업체는 길게는 3년 동안 해당 자동차 제조사만을 위한 ‘전용 제품’ 개발을 진행합니다. 개발이 완료되고 나면 약 5, 6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양산을 진행하며 배터리를 납품하게 되고요.
때문에, 일단 배터리 납품사를 선정하고 나면, 더 저렴한 업체가 있다거나 하는 이유만으로 공급사를 변경하는 것이 매우 어렵습니다. 기존 공급사와의 계약 위반 리스크가 있을 뿐 아니라, 요구 스펙을 충족하는 전용 제품을 개발 / 검증하고 인증을 획득하는 데 너무나도 긴 시간이 걸리기 때문입니다.
한국 배터리 업체들은 이미 꽤나 많은 프로젝트를 수주해 놓은 상황입니다. 특히 미국은 IRA 정책으로 인해 중국 업체들의 진입이 어려워졌죠. 이에 따라 한국 배터리사와 현지 OEM들은 합작 공장 설립의 방식으로 피를 섞는 혈연까지 맺어놓은 상황입니다.
이런 이유로, 전기차 배터리 시장은 적어도 LCD 디스플레이처럼 커머디티화되어 중국 기업에 통째로 집어 삼켜지는 일은 벌어지기 어려울 것으로 전망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전기차 배터리 시장이 중국 기업의 공세로부터 안전하다는 말은 아닙니다.
보다 본격적인 이야기는 매스 시장과 하이엔드 시장으로 나누어 해보려고 하는데요.
[Mass 시장] 중국이 한국을 추격 중이라는 착각
먼저, 전기차 배터리 매스 시장의 경쟁 구도는 디스플레이 시장과 정반대 모양새로 펼쳐지고 있습니다.
디스플레이의 경우, 원래 상대적 저가 / 저성능의 매스 제품으로 볼 수 있는 LCD 시장을 한국 기업들이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이후 중국의 공세가 시작되면서, 한국 기업들은 고가 / 고성능 제품이라 할 수 있는 OLED 시장으로 무게 중심을 옮겨가는 방향으로 시장 구도가 변화했고요.
하지만 전기차 배터리의 경우, 과연 한국 기업들이 지금 매스 시장을 장악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까요?
전기차 배터리 시장에서 중저가 매스 제품은 상대적 저가 / 저성능의 LFP 배터리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2020년을 전후로 중국 기업들이 LFP 배터리를 본격적으로 내놓자 한국 기업들은 LFP의 성능 한계를 지적하면서, 일찌감치 NCM에 집중하는 쪽으로 전략 방향을 확정 지었는데요.
유감스럽게도 이후 LFP의 시장 점유율이 급속도로 확대됩니다. 위 사진과 같이 IEA의 분석에 따르면, 2023년 LFP의 비중은 무려 40% 수준에 이릅니다.
이렇게 저가 니치 마켓에 한정될 것으로 보였던 LFP가 급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아시다시피 결국 가격에 있습니다.
배터리의 전방 시장인 전기차가 더 잘 팔리기 위해서는 더 저렴한 배터리가 필요하지만, 아직까지 NCM은 이러한 니즈를 제대로 충족시켜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비록 ‘성능’이야 NCM보다 부족하다 할지라도, ‘원가 절감’이라는 OEM들의 가장 가려운 부분을 정확하게 긁어주었기에 시장에서 환영 받고 있다고 봅니다.
이러한 LFP 시장의 성장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으로 전망되고 있는데요. IEA에서는 2030년 경이 되면 LFP의 점유율이 전체 시장의 50% 내외를 넘나들 것으로 예측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LFP 배터리를 양산 중인 한국 기업은 한 곳도 없습니다. 배터리 시장 기술 선도주자를 자처하는 LG에너지솔루션이나 삼성SDI 모두 2026년이나 돼야 LFP 배터리의 양산을 개시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데요.
반면 중국 CATL의 경우 일찍이 2010년대 후반부터 LFP 배터리 양산을 본격화한 것은 물론이고, 그 에너지 밀도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셀-투-팩 기술까지 자체 개발한 것으로 이미 잘 알려져 있죠. 뿐만 아니라 LMFP, M3P와 같은 LFP의 한계를 보완한 다음 세대 신소재 개발도 활발히 진행하고 있습니다.
결국, 전기차 배터리 시장의 경쟁 구도는, 중국 기업이 한국 기업을 추격했던 디스플레이와 정반대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한국 기업들의 매스 시장 프레젠스는 중국 기업보다 뒤떨어지며, 오히려 한국이 중국을 따라잡기 위해 추격하는 형태로 전개되고 있습니다. 애초에 기술 주도권을 한국이 아닌 중국 업체들이 쥐고 있는 겁니다.
중국 정부가 중국 디스플레이들을 지원하기 위해 각종 규제와 보조금 정책을 폈듯, 미국 정부가 한국 배터리 업체들을 정책적으로 보호해주고 있는 형국이고요.
결국, 전기차 배터리 산업은 매스 시장에서는 디스플레이와 안 좋은 의미에서 반대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디스플레이, 조선, 태양광 등 기존 다른 산업과 달리, 한국 배터리 업체들은 매스 시장에서 기술 주도권을 잃지 않았습니다. 애초에 주도권을 쥔 적이 없었다고 보는 게 맞을지도 모르겠습니다.
[High-end 시장] 하이니켈 NCM 시장, 여기서 더 키울 수 있을까?
매스 시장과 반대로, 하이엔드 배터리 시장은 오히려 디스플레이와 유사한 구도로 흘러가고 있다는 게 문제입니다.
앞서 잠시 언급한 LG디스플레이가 사업난에 빠진 가장 큰 이유는, 단순히 매스 제품인 LCD 시장을 중국에 빼앗겼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LCD 대신 집중했던 하이엔드 제품, OLED로의 전환 또한 그리 순탄치 못했습니다.
중소형 OLED에 집중했던 삼성과 달리 LG는 TV에 사용되는 대형 OLED에 집중합니다. 문제는 이 대형 OLED 사업이 기존 LCD 사업을 대체할 정도로 제대로 성장하지 못했다는 겁니다.
실제로 한국디스플레이산업 협회 자료에 따르면, 대형 OLED 시장은 2019년부터 2023년까지 줄곧 대형 LCD 시장의 1/10에 불과한 작은 규모에 머무릅니다. LCD 대비 너무 비싼 가격과 이에 반해 쉽게 체감하기 힘든 성능 차별성으로 인해, 소비자들에게 외면 받고 있는 것인데요.
실제로 OLED의 양산이 시작된지 10년 넘는 시간이 지났음에도, OLED TV 패널의 가격은 아직까지도 LCD 대비 2배 이상 비싼 상황입니다. 많은 소비자들이 이렇게 높은 비용을 지불하면서까지 OLED를 구매할 성능 메리트를 느끼지 못하고 있고요. 이런 이유로, OLED는 LCD가 PDP를 대체했던 것과 같이 LCD를 완전히 대체하지 못한 채, 상대적 소규모의 하이엔드 시장으로 남아 있습니다.
결국, LG디스플레이가 지금의 어려움에 빠진 것은 오로지 중국 업체들 때문이라고만 보기는 어렵습니다.
LG디스플레이 스스로 OLED 시장에서 더 나은 원가 경쟁력과 기술력을 확보하지 못했고, LCD를 대체할 의미 있는 시장 규모를 만들어내지 못한 패착도 있지 않을까요?
다시 배터리로 돌아와보겠습니다. 한국 전기차 배터리 기업들이 집중하고 있는 하이엔드 제품인, 하이니켈 NCM은 OLED의 길을 걷지 않고 제대로 성장하고 있을까요?
지난 2021, 2022년까지만 해도 그 답은 Yes 였습니다.
당시 코로나 호황이 찾아오며 전기차 시장은 폭발적으로 성장했는데요. 당시 니켈, 리튬과 같은 배터리 원자재들의 수급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서 배터리 가격이 함께 폭등했습니다. 자연히 한국 배터리 업체들은 연일 최고 실적을 경신하면서, 행복한 비명을 질렀습니다.
하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면 배터리 가격이 오르는 게 꼭 배터리 업체에 좋은 일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물론 단기 실적 개선에는 도움이 될 겁니다. 하지만 이는 결국 전기차의 내연기관 대비 상품성 하락으로 연결되고, 이는 다시 소비자들의 외면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이러한 배터리 가격 상승에 자동차 제조사들 역시 불편함을 느끼게 됩니다. 배터리가 안 그래도 비싼데, 메탈 가격 상승이란 대외적인 명분으로 웃돈까지 얹어줘야 하니까요. 자연히 LFP의 상대적 높은 가격 경쟁력이 부각되면서, 자동차 제조사들은 LFP에 관심을 갖기 시작합니다.
하나 집고 가자면, 여기서 LFP가 NCM보다 성능적으로 우월하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LFP는 저렴한 가격이라는 명확한 장점이 있는 데 반해, 성능적으로는 명백히 NCM 대비 열위에 있는 중저가용 제품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이제 비싼 가격을 이유로 전기차 시장 성장세가 둔화되면서, 배터리 역시 LFP와 같은 중저가 중심으로 시장 수요가 전환됐다는 데 있습니다. 2, 3년 전까지만 해도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해도 없어서 못 팔던 상황이었죠. 그러나 이제 NCM 스스로 가격 경쟁력을 확보하지 못하면 결코 미래를 장담하기 힘든 상황이 되어버렸습니다.
실제로 하나증권 리서치 센터 자료에 따르면, 2024년 4월 누적 기준 중국 전기차 시장은 전년 대비 33% 성장한 반면, 미국은 13%, 유럽은 단 9% 성장하는 데 그칩니다. LFP를 주력으로 하는 중국 시장은 올해도 엄청난 고성장을 이어가고 있는 반면, NCM을 주력으로 하는 미국과 유럽 시장은 흔히들 캐즘(Chasm)이라 칭하는 성장 둔화 구간에 빠져버린 겁니다.
또 실제로 앞서 언급했던 IEA의 통계 자료에 따르면, 2023년 기준 NCM 712 / 811로 대표되는 NCM 하이니켈 시장은 30% 대 시장 점유율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반면 한 때 중저가용 니치마켓이라고 홀대 받던 LFP 시장의 점유율은 40%대까지 성장한 상황이고요.
최근 한국 업체들이 건식 공정, 4680, 미드니켈 등의 ‘원가 절감’에 초점을 맞춘 기술 개발에 사활을 거는 이유도 이와 일맥상통합니다. 성능이 LFP보다 얼마나 더 좋든 간에, 가격 경쟁력이 없다면 이를 구매해줄 업체를 구하기 쉽지 않은 상황이 되어버렸습니다. 지금보다 더 저렴한 배터리를 만들지 못한다면, 하이니켈 NCM이 설 자리는 점점 더 좁아져 버릴 지도 모릅니다.
뿐만 아니라, 중국 업체들이 LCD를 넘어 OLED 시장으로 침투하기 시작했듯, NCM 하이니켈에서도 중국의 공세가 본격화되고 있는데요.
올해 초, 고성능 자동차의 대명사로 알려져 있는 포르쉐가 마칸 EV에 CATL의 NCM811 배터리를 탑재한다는 뉴스가 보도됐습니다. 중국 내수용으로만 생각되던 중국산 NCM 하이니켈 배터리가 이제 유럽 하이엔드 브랜드로까지 침투를 본격화한 겁니다.
실제로 아래 자료에서와 같이, 유럽 NCM 삼원계 시장에서 중국 대표 주자인 CATL의 점유율은 지난 2023년 1-7월 기준 이미 30%대까지 올라온 상황입니다.
결국, 현재 한국 배터리 업체들은 OLED 디스플레이와 같이 중국 업체와의 성능 격차를 유지하면서, 원가까지 낮추어야 하는 이중고의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비록 그 시장 입지가 OLED보다는 나은 상황이라고는 하나, 배터리 업체들이 느끼는 위기 의식은 결코 그보다 적지 않으리라 예상해봅니다.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생존법을 고민할 때
이렇게 한국 배터리 산업이 위기에 빠진 이유로, 디스플레이 산업에서와 같은 중국 정부의 밀어주기를 꼽는 분들도 많습니다. 중국 정부에서 보조금을 퍼부어주면서 밀어주기를 하는데, 애초에 한국 기업들이 이기기 힘든 싸움이지 않느냐는 말입니다.
하지만, 이 부분은 디스플레이와 상황이 조금 다른데요. 중국 디스플레이 대표주자라 할 수 있는 BOE의 경우, 2023년 보조금 제외 시 적자를 기록합니다. 물론 배터리와 마찬가지로 전방 시장 업황이 좋지 못한 영향이 있겠지만, 한국 업체들을 몰아내고 LCD 시장을 점령했음에도 아직까지 기업으로서 제대로 된 이익을 내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반면, 중국 배터리 기업들은 이미 어느 정도 자생적인 경쟁력을 확보한 상황입니다.
아래는 24년 1분기 CATL과 한국 배터리 3사의 실적인데요. 전기차 수요 정체, 메탈 가격 하락 등 각종 악재로 인해 한국 배터리 업체들은 간신히 흑자를 달성하거나 적자를 면하지 못하고 있는 형국입니다.
그런데 CATL은 놀랍게도 16%라는 놀라운 영업이익률을 기록하는데요. 이 모든 것이 보조금 덕분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CATL은 2023년에도 약 11%의 영업이익률을 기록했는데요. 당해년도에 약 1조원의 정부 보조금을 수령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어마어마한 금액이기는 하나, 당시 약 74조원의 매출액을 기록한 것을 감안하면, 보조금은 전체 매출의 1, 2% 수준에 불과한 금액입니다. 보조금만으로는 이 높은 영업이익을 설명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중국 업체들은 보조금 때문에 잘하는 거야”, "애초에 불공평한 게임이라 비교가 무의미해"라고 무작정 덮어두고 외면하기 어려운 이유입니다.
결국, 중국 기업들의 경쟁력을 다시 평가 분석하고, 우리는 어떻게 차별화할 수 있을지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전략을 짜야 하는 시점이라고 생각됩니다.
“중국 업체는 중저가 중심의 매스 시장에서만 통할 것이고, 우리는 높은 기술력의 하이엔드 시장을 집중 공략해 살아남는다”는 교과서적인 전략 방향성만으로는 생존이 쉽지 않을 수 있습니다.
중저가 시장에서는 입지 자체가 전무하고, 하이엔드에서는 시장 파이를 키우면서 경쟁자의 추격을 따돌려야 하는 이중고에 놓여 있는 것이 현재의 한국 배터리 업체들의 상황이라 할 수 있을 겁니다.
더 이상 절벽으로 내몰리기 전에, 디스플레이 / 태양광 / 조선 등 각종 사례를 반면교사로 삼아, 한국 배터리 업체들의 생존 방안을 다시 고민해봐야 할 때가 아닐까요?
※ 이 글은 전기차 전문 매체 EV POST 에 동시 게재됩니다.
참고자료
- 중국 LCD는 어떻게 한국을 넘어섰나 (18/08/03, 조선일보)
- 中, LCD 왕좌 등극 3년 만에…이번엔 중소형 OLED 1위 (24/04/28, 한국경제)
- Batteries and Secure Energy Transitions (IEA)
- 글로벌 친환경차/2차전지 Monthly (하나금융투자)
- 중저가 미드니켈 배터리…LG엔솔, 양산 1년 앞당겨 (23/11/20, 한국경제)
댓글 2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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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빠
좋은 글 너무 잘 봤습니다. 캐즘의 시대가 오고 자동차원가의 30~40%를 차지하는 배터리 가격원가를 절감해야 하는 입장에서 더더욱 어려운 환경에 처했지만 슬기롭게 극복하기를 기원해야겠네요. LG대주주는 이 사실을 미리 알고 LG에너지솔루션을 물적분할 한것 같네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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