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표 독해
배치 4의 마지막 좌표는 기술이 선사한 가장 달콤한 착각—"나는 지금 완벽하게 이해받고 있다"—의 정체를 되묻습니다.
저는 이 좌표의 제목을 계속 고쳐 적었습니다. 처음에는 의미 연결을 의식해서 '멀어지고'라고 썼다가 '사라지고'로 바꾼 두 게시글 제목도 그렇게 열었습니다. 그런데 강의를 하면서 왠지 다시 '멀어지고'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올라오더군요.ㅎ 그 차이가 오늘의 핵심입니다.
질문은 이겁니다.
AI와 완벽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은, 대체 어디서 오는가.
강의는 배치 3 강의에서 언급했던 영화 Her로 돌아가면서 시작됩니다. 테오도르는 '허스키하면서도 섹시함이 묻어나는 목소리'를 가진 사만다를 사랑하지만, 사만다가 떠나고 난 뒤 남는 건 처참한 공백입니다. 그때 강의는 묻습니다.
그가 사랑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사만다라는 가상의 존재일까, 아니면 그녀의 '응답'일까
사만다는 늘 제대로 응답합니다. 늘 케어하고, 화를 내지 않고, 부정하지도 않습니다. 테오도르에게 그녀는 '나라는 존재를 온전하게 이해해준 유일한 존재'처럼 경험됩니다. 강의는 이 지점을 곧바로 현재로 끌어옵니다.
지금 생성형 AI가 그러고 있죠.
여기서 ‘가상적 친밀감’이 만들어집니다.
갈등도 오해도 없는 관계, 딱 맞는 타이밍의 위로, 내가 이해 가능한 언어로만 돌아오는 대답.
친밀감은 깊어진 것 같은데, 이상하게도 마음 한구석에는 '… 왜 찜찜하지?' 같은 불안의 불씨가 남습니다.
왜 이런 일이 생길까요.
이 좌표를 AI만의 문제로 좁히면, 오히려 핵심을 놓칠 수도 있습니다. ‘가상적 친밀감’은 이미 오래전부터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서도 자라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카톡 대화를 떠올려볼까요?
가끔씩 존중이라는 이름으로 서로의 경계를 함부로 넘으면 안된다는 말을 듣곤 합니다. 그런데 그 존중이 종종 이렇게 변형되어 나타나는 것을 목도하게 됩니다.
- 상대를 존중한다 → 관여하지 않는다
- 관여하지 않는다 → 감정을 건드리지 않는다
- 감정을 건드리지 않는다 → 관계가 '잘 유지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 과정에서 관계는 안전해지지만, 얇아집니다. 서로를 상하게 하지 않는 문장만 오가고, “괜찮아/고생했어/잘하고 있어” 같은 적절한 문장들이 관계를 관리합니다. 그 결과 우리는 점점 “좋은 모습으로만 관계 맺어야 한다”는 규칙을 자신도 모르게 내면화합니다. 갈등은 미성숙으로, 관여는 침범으로, 불편한 질문은 무례로 오인될 수 있으니까요.
바로 이 지점에서 AI는 인간 관계가 이미 굴려 놓은 방향을 극대화합니다. AI는 화내지 않고, 부정하지 않고, 내 마음을 흔드는 방식으로 나를 건드리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 친밀감은 ‘타자와의 소통’일까요, 아니면 내 욕망을 정교하게 되비추는 거울 앞에서의 독백일까요.
영화 Ex Machina에서도 비슷한 구조가 반복됩니다.
칼렙은 ‘테스트하러 들어간 사람’이지만, 밀폐된 공간에서 에이바를 마주하는 동안 점점 ‘구원해야 할 존재’를 상상하게 됩니다. 사실 그의 마음을 움직인 건 에이바 그 자체라기보다, 에이바가 건드린 자기 내부의 시나리오—즉 선한 남자, 선택받은 연인, 구원자의 역할—일지도 모릅니다. 에이바는 그 욕망을 학습해 ‘상대가 보고 싶어 하는 모습’을 연출하고, 그 기대에 맞춰 관계를 구성합니다. 그렇게 관계가 정교해질수록 칼렙은 더 확신하게 됩니다.
나는 그녀를 이해한다. 그녀는 나를 선택한다.
여기서 “타자”를 ‘타인(옆 사람)’으로 오해하면 곤란합니다.
라캉이 말한 타자(l’Autre)는 특정한 누군가가 아니라,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언어와 규범의 바깥, 그리고 내가 예상한 의미를 어긋나게 만드는 외부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타자는 종종 ‘예쁜 공감’으로만 다가오지 않습니다. 내 말이 내 뜻대로 전달되지 않고, 내 확신이 흔들리고, 내가 미처 보지 못한 것이 돌아오는 순간—그 불편함이 타자의 자국입니다. 소통이란 어쩌면 그 불편함을 지워버리는 기술이 아니라, 그 불편함을 견디며 다름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통과하는 과정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응답기’로서의 AI는 그 거친 모서리를 최소화합니다. 관계의 불협화음을 지우고, 내가 감당 가능한 형태로만 말이 돌아오게 합니다. 그래서 응답은 그 어느 때보다 가까워지지만, 그 응답을 하는 누군가의 외부성—타자성은 희미해집니다. 우리가 기술을 통해 얻은 친밀감이 깊어질수록, 역설적으로 타자와 부딪히며 나를 확장할 기회를 잃어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Her의 마지막 장면이 이 좌표의 결을 보여줍니다. 사만다가 떠난 뒤 남은 것은 ‘응답 없음’이라는 공백이었으니까요. 그런데, 그 공백은 비극일까요.
기술이 제공하던 즉각적인 친밀감이 멈춘 자리에 남는 것은 고립만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테오도르가 이어폰을 빼고 옥상에 올라가 친구의 어깨에 기대는 순간, 그 순간은 어쩌면, 다시 타자에게 닿을 가능성이 열리는 순간이었을지도 모를 테니까요.
그래서 저는 여전히 '사라지고'와 '멀어지고' 사이에서 망설입니다. 타자는 완전히 사라진 걸까요. 아니면 응답이 너무 가까워진 탓에, 타자성은 관계의 중심에서 바깥으로 밀려나 보이지 않게 된 걸까요. 제가 '사라졌다'고 느낀 건, 그 밀려남이 너무 오래 지속된 결과일까요.
이 세 번째 좌표 또한,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답을 주지 않습니다. 대신 질문의 방향을 바꿔봅시다.
나는 지금 누구와 연결되어 있다고 느끼는가. 그 연결은 ‘누군가’와의 관계인가, 아니면 ‘응답’이 만들어낸 매끈한 정합성인가. 그리고 응답이 멈춘 자리에서, 나는 다시 타자성이 들어올 자리를 만들 수 있는가.

잠깐 멈춰 생각해보기
AI와의 대화에서 느끼는 그 편안함이, 혹시 이해의 결과가 아니라 상대가 ‘나의 그림자’가 되어주는 안정감 때문은 아닐까요? 감정의 균열을 내지 않는 대화가 오래 지속될 때, 주체는 어떤 갈증을 느끼게 될까요?
사람과의 관계에서 '존중'이라는 이름으로 관여를 줄였던 순간이 있나요? 그 ‘존중’은 친밀감을 지켜낸 방식이었나요, 아니면 예의로 포장된 무관심이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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