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에 관한 짧은 필름

88개의 건반을 가진 사람

나는 나라고, 나는 네가 아니라고

2023.11.05 | 조회 17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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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에 관한 짧은 이야기

아주 사적이고 디테일한 에세이

인간의 뇌라는 건 찰흙처럼 한 번 누르면 형태가 그대로 굳어진다는 말을 어느 책에서 읽은 적 있습니다. 두 번 다시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다구요. 과학적인 근거가 있는 이야기인지는 모르겠어요. 다만 제 경우를 보면 꽤 신뢰할 만한 증거 같긴 합니다만.

어쨌든 미래가 무한하게 펼쳐져 있다는 아름다운 말은 이제 좀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심오한 착각이자 거짓말이니까요. 누적된 정보량으로 보자면 과거는 압도적이죠. 그래서 우리는 과거에서 진정한 의미로 벗어날 수 없는 거예요. 인생에 익숙해진다는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 과거를 얼마나 쓰레기통에 잘 구겨넣고 모른 척 할 수 있느냐와 같은 겁니다.

<메모리아>는 예상대로의 영화였습니다. 한 번에 안 외워지는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이라는 감독 이름처럼 쉽지 않았다는 뜻이죠. 이 풍진 세상 잠시 잊고자 영화를 보는 사람이라면, 이런 영화를 바득바득 찾아보는 사람이 변태와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몰라요. 아무튼 이 기묘하고 난해한 영화가 저는 평생 잊히지 않을 것 같습니다. 단 한 장면 때문에요.


주인공 제시카는 숲속에서 모든 걸 남김없이 기억하고 있다는 남자 에르난을 만납니다. 그는 잊지 못하기에 스스로의 경험을 제한한다고 말하죠. “그러면 좋은 거 다 놓치잖아요”라고 제시카가 묻자, 그는 “이야기는 이미 충분해요. 저 돌에도 이야기가 있죠”라고 대답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여요.


“경험은 해로워요
. 내 기억을 난폭하게 헤집으니까요.”

그 순간 저는, 아아, 하는 탄식인지 신음인지를 내뱉었습니다. 육성으로요. 나잖아. 저건 냐야.

A B라는 두 지인을 소개해준 적이 있습니다. 서로 관심을 보였거든요. 그런데 정작 만나보니 둘의 대화가 계속 ‘삐딱선’을 타더라구요. 중간에서 어떻게든 접점을 찾아주려 애쓰던 저는, 이 인간들 그냥 서로에게 재난구역이나 하고 결론을 내리고 말았어요. 다음날 A가 그러더군요. B 있잖아, 나 걔 별로 마음에 안 들어.

그 뒤로 7년이 지났습니다. 어떤 행사장에 갔다가 벤치에 앉아 있는데, 먼발치에서 다가오는 B와 반대쪽 입구 쪽에서 서성이는 A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두 사람이 제 시야의 한 프레임에 포착된 순간, 7년 전의 기억에 기습을 당했습니다. 팽팽한 실 같았던 그날의 공기, 억지로 티 안 내려는 거북한 음색과 억양, 우리가 마신 와인의 라벨 모양, 테이블 위 촛불의 일렁임까지.

저는 막을 틈도 없이 밀려오는 불쾌함에 그 자리에 더 있지 못했어요. 그리고 그날 밤 악몽을 연달아 여섯 개쯤 꿨죠. 그 음습하고 소름 끼치는 기분에서 벗어나기까지 일주일 넘게 걸렸습니다. 둘에게 따질 수도 없는 것이, A B는 서로 만났다는 사실을 기억조차 하지 못했어요. 한마디로 ‘별 것도 아닌 옛날 일’로 저만 혼자 지랄을 한 꼴이 된 거죠.

나는 나를 벗어날 수 없다는, 내가 나로 살아가야 한다는 끔찍함을 그렇게 처절하게 실감한 순간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누군가 저를 보고 말하더군요
. 마음의 건반을 25개 가진 사람이 있고, 88개의 그랜드피아노 건반을 가진 사람이 있는데, 88개 가진 사람들은 건반의 처음부터 끝까지 매일 쳐야 한대. 사람 귀에 들리지도 않을 음역까지 굳이 치는 거야. 의미도 없이. 그 사람은 그냥 그렇게 안 하면 못 견디도록 생겨 먹은 거지. 딱히 위로가 되는 말은 아니었지만, 괜찮은 비유라고 생각해요.

잊지 못하는 것, 그리고 부가적으로 따르는 예민함이 꼭 나쁘지는 않죠. 오히려 꽤 쓸모 많은 재능이라는 거 알아요. 성능 좋은 메모리를 달고 다니는 셈이니까요. 다만 사소한 외부 자극조차 무의식의 키워드가 되어, 징조도 낌새도 없이 기억을 휙 불러내는 건 진짜 곤란합니다. 비효율적 민폐라고 할까. 인간에게 완전히 사적인 기억이라는 건 없다고 보면, 일종의 공적인 데이터베이스에 강제 접속해버리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저는 세상에는 아무 일도 없는 ‘무표정한 행복’이라는 게 있다는 아이유의 말에, 격하게 고개를 끄덕입니다. 저 같은 사람에게는 폭발적인 행복보다는 마음의 평화가 우선순위니까요. 그걸 알면서도 어느 순간 스스로를 난폭하게 헤집고 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보고, 듣고, 읽고, 느끼고, 만나고, 손가락 사이가 찢어져 피가 나도록 88개의 건반을 두드려대는 나를 봅니다.

왜일까요. 그것은 한 인간이 개체로서 존재하기 위한 조건은 기억이기 때문입니다. 생물학적으로 진화의 끝에 다다른 인간이라는 종의 한 가운데서, 나를 나이게 하는 건 오로지 기억이니까요. 그러니 겪고, 기억하는 수밖에 없는 겁니다. 살아 있는 한. 삶이라는 이 끔찍한 연대기 속에서 소리 높여 노래하기 위해서. 나는 나라고. 나는 네가 아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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