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잔 소리 울리는 노을 안에서, 화가 soyeon

김근주읽기뉴스레터 18호(전편)_최소연

2025.06.18 | 조회 5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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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주읽기

'김근주읽기'는 신학자 김근주 목사의 저서를 함께 읽는 독서클럽으로, 책 이야기, 모임 안내, 참여자들의 인터뷰를 뉴스레터로 전합니다.

오랜만에 참여자 레터를 띄웁니다. 화가이자 선교사인 최소연 님의 이야기입니다. 2001년 9.11 테러가 발생했고 세계의 언론들이 연일 아프가니스탄을 지탄하는 뉴스를 쏟아냈습니다. 다들 폭격의 현장을 지켜보면서 이슬람 사람들을 죽도록 미워했습니다. 그런데 그 땅의 가난한 사람들과 약한 아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한 여성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누가 나를 위하여 갈까”(이사야 6장)의 성경 말씀을 읽으며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나라도 괜찮다면 내가 그곳에 가겠습니다’ 2003년 3월, 최소연 님은 하나님의 부름에 이끌려 낯선 땅 아프카니스탄의 미술 교사가 되었습니다. 뉴스레터 18호는 '부르는 곳에서 예배하는 화가' 최소연 선교사 님의 신앙 일기입니다. _발행자 주

 

"그렇게 좋았던 그림이 더는 즐겁지 않았습니다."

2005년 아프가니스탄 버미얀에서 만난 아이들_최소연 그림(캔바스에 오일파스텔)
2005년 아프가니스탄 버미얀에서 만난 아이들_최소연 그림(캔바스에 오일파스텔)

'하나님, 저를 구원해 주세요'

어린 시절 친구를 따라 교회에 나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주 꼬마였을 때부터 저는 그림을 보는 것도, 그리는 것도 좋아했습니다. 부모님은 그런 저를 위해 미술학원을 등록해 주셨습니다. 유치원 때부터 동네의 작은 화실에 다녔고, 그림을 그릴 때마다 칭찬을 받았습니다. 나의 열정과 주변의 권유로 예술중학교에 진학을 결정했고 본격적인 입시 미술을 공부했습니다. 하지만 입시에서 떨어졌지요. 아쉬움인지 실패의 슬픔을 극복하려던 것인지 '예술고등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다시 입시 미술을 공부했습니다. 하지만 낙방. 예고까지 떨어지자 저는 더는 그림이 즐겁지 않았고, 번아웃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부모의 기대와 나의 열망이 깨어지면서 가정에 불화가 깊어졌고, 급기야 심한 우울감에 시달렸어요. 자괴감과 열패감, 죽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했습니다. 하지만 죽음을 생각하면, 늘 발목을 잡는 말이 귀에 들리는 듯 했습니다. '죽으면 지옥에 가게 될 것이다' 지옥이 무서웠습니다.

슬픔을 견디기 위해 매일 새벽 교회로 달려갔습니다. "하나님, 제발 저를 구원해 주세요" "저는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나요?" "어떻게 견뎌야 하나요"  눈물로 기도를 쏟아내던 고3 어느 날, 수학 선생님을 통해 복음을 들었습니다. 저는 그날 예수님을 영접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굳은 믿음을 가졌습니다.

 

'아프칸니스탄의 미술교사'

예수님을 영접하면서 진로를 위한 선택이 뚜렷하게 느껴졌습니다. 신학대에 가겠다고 부모님께 선언했습니다. 제 선전포고에 놀란 부모님은 제 길을 극렬하게 반대했고 담임 선생님도 만류했습니다. '아! 나는 다시 포기할 수 밖에 없나.' 결국 부모님을 설득하지 못한 저는 어떻게든 미대에 진학해 졸업 이후에는 내 마음대로 살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대학 3학년 때 친구의 권유로 기독학생회 IVF에서 QT와 성경 공부, 공동체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마음에 평안이 찾아오고 매일 예수님을 만나는 기쁨의 시간이었습니다.

미대를 졸업하고 진로로 기도하던 2001년, 9.11 테러가 발생했습니다. TV와 라디오에서 테러 현장 소식과 이슬람 근본주의자, 알카에다, 오사마 빈라덴과 같은 무시무시한 소식들이 쏟아졌습니다. 사람들에게 아프가니스탄은 범죄자 소굴 같은 끔찍한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서로를 공격하는 재난의 현장에 마음이 무너졌고, 아무 잘못도 없는 누군가가 폭력에 희생되는 것도 안타까웠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기도였습니다.

"하나님 나라도 괜찮다면 내가 가겠습니다."

아프카니스탄에서 미술을 가르친 학생들, 오른쪽 끝이 최소연
아프카니스탄에서 미술을 가르친 학생들, 오른쪽 끝이 최소연


어느날, 이사야 6장을 읽던 중에 누가 나를 위하여 갈까하는 말씀이 내게 하시는 말씀 같았고 하나님 나라도 괜찮다면 내가 가겠습니다’ 그렇게 응답했습니다. 그로부터 1년 반 후인 2003년 3월, 거짓말처럼 교회 NGO를 통해 아프가니스탄의 미술교사로 떠나게 되었습니다. 미술을 가르치며 여성들과 아이들을 만나며 자연스레 선교사가 되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신장병을 앓는 아이, 쇠사슬에 묶인 아이'

아프가니스탄은 2년밖에 있지 않았지만 잊을 수 없는 것들이 많습니다. 미술을 가르치던 센타 앞 골목에서 늘 놀던 아니르라는 아이가 있었는데 어느 날은 얼굴과 몸이 전과 다르게 퉁퉁해진 상태였습니다. 무슨 일인지 물어보니 신장병이라고 했습니다. 다른 선생님들과 그 집에 방문했는데 집이라고 할 수 없는 폐가에 살고 있었습니다. 추운 날씨였는데 창문은 비닐로 대충 막아 놓았고, 일곱 여덟 명 되는 아이들과 출산한 지 얼마 안된 엄마는 시멘트 바닥에서 얇은 이불 한 장을 깔고 있었습니다아니르의 아빠는 요리사인데 월급 대신 남은 음식을 받아온다고 했습니다.

또 다른 집의 이야기도 잊을 수 없습니다. 종종 베이스에 물을 얻으러 오는 여자아이가 있었는데 어느 날 물통을 들어주려 집에 가보니, 남동생이 목에 쇠줄이 걸려 구석에 묶여있었습니다. 아이 아버지는 한쪽 눈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집에 미사일이 떨어져서 아들이 정신이 나갔는데 포크로 아버지의 눈을 찔러서 실명하게 되었다는 사연을 들려주었습니다.

아프카니스탄의 아니르 가족_최소연 제공
아프카니스탄의 아니르 가족_최소연 제공

집에 돌아오니 베이스에서 함께 일하는 현지인 아저씨가 그 집 사람들과 어울리지 말라며, 남편이 아내를 팔아서 돈을 버는 집이라고 했습니다. 지금껏 한국에서 듣지도 보지도 못한 참혹하고 혹독한 사연이었습니다. 듣는 것만으로도 간접 트라우마가 되는 비참한 사연, 그럼에도 아이들은 해맑게 웃었습니다. 그리고 나를 한없이 밝게 맞아주었습니다. 저는 그곳과, 그들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입니다.

 

'선교사 남편, 김지훈과 만나'

2005년 아프가니스탄에서 2년 6개월의 선교사 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에 돌아왔습니다. 한국에서 다시 GBT 성경번역선교회에서 훈련을 받던 중에 지금의 남편 김지훈 선교사를 만났습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며 2008년 믿음의 가정을 이뤘습니다. 이후 선교사로 허입(선교사가 선교지로 가는 것을 허락 받는 일)을 받고 여러 교육과 훈련을 함께 했습니다. 그렇게 저와 남편은 같은 둥지 안에서 든든한 동지가 됐습니다.

2014년 4월 16일, 나와 남편은 파키스탄으로 향했습니다. 당시 18개월이던 첫째 아들을 번갈아 돌보며, 남편과 똑같은 분량으로 언어를 공부했고, 종종 아이를 데리고 이웃집에 놀러 가서 교제를 나누며 그들의 언어와 문화를 익혔습니다.

파키스탄에서 만난 사람들은 아프카니스탄에 비하면 그나마 좋은 환경이었습니다. 그곳에 한류가 한창이라 한국말을 건네오는 젊은이들도 있습니다. 둘째 딸의 첫돌 잔치를 핑계로 이웃들을 초대했던 날, "저기요" 하는 한국말에 놀라 돌아보니, 파키스탄 십대 소녀가 저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라이바라는 이름의 친구는 이후로도 우리 집에 수시로 드나들며 아이들과 놀고 함께 김밥도 싸서 먹고 학교 발표회 준비로 한복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셋째 출산을 위해 제가 한국에 있을 때 홀로 한국에 방문해 이곳 저곳을 함께 여행하기도 했습니다. 즐겁고 아름다운 기억입니다.

"김밥 싸고 한복을 만들던 친구 라이바"

파키스탄의 내 친구 '라비와'(오른쪽)_최소연 제공 
파키스탄의 내 친구 '라비와'(오른쪽)_최소연 제공 

'아잔 (أذان / azān) 소리 깊어지는 노을의 기도'

이슬람은 다섯 번의 기도 시간을 지킵니다. 그 중 4번째 기도는 마그립(Azan maghrib: 일몰 기도) 이라고 해 질 녘에 드리는데 우리 동네에서는 마그립 전에 엄마들이 밀크티 한 잔을 들고 아이들을 골목으로 데리고 나오는 것이 일상이었습니다. 첫째 서훈이가 동네 아이들과 어울려 노는 동안, 저는 동네 아줌마들과 차 한잔을 나누며 수다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남편 걱정, 시댁 걱정, 아이들 걱정이 한국의 아줌마들과 별로 다르지 않았습니다 우리들의 대화는 참 좋았습니다. 한국 사람들이 생각하는 무슬림에 대한 생각과 실제가 얼마나 다른지 새삼 느끼는 경험이었습니다.

노을이 짙어지고 기도 시간을 알리는 아잔 소리가 울리면 저마다 아이들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지금도 그 시간이 가장 생각납니다. 아이를 데리고 이웃집을 방문하면 현지인들은 경계심 없이, 오히려 자녀 양육에 대해 조언해주고 도와주려 했습니다.

<아프가니스탄의 봄>_ 창밖의 자유로운 새를 보면_최소연 작(캔바스에 오일파스텔)
<아프가니스탄의 봄>_ 창밖의 자유로운 새를 보면_최소연 작(캔바스에 오일파스텔)

그런가 하면, 여성이기 때문에 혼자 돌아다니지 못해 어려운 부분도 있었습니다. 첫째가 유치원에 가고 남편은 비자를 대주던 대학의 일을 도우러 나가면, 말 못하는 딸아이와 베란다에 나가 남편이 오기 만을 애타게 기다리곤 했습니다. 하루는 집 앞에 앉은 새들의 자유가 부럽게 느껴졌습니다. 무슬림 여성들이 마치 새장에서 보호 받는 새 같다고 생각했지요.

 

'선교에 대한 고민, 답을 찾아가는 여정'

파키스탄은 알려진대로 종교의 이유로 인도와 분리 독립하여 세워진 이슬람 국가입니다. 때문에 다른 이슬람 국가들 보다 특별히 종교에 관한 자부심이 큽니다. 여성들도 집집마다 자발적으로 모여 꾸란을 배우고 기도회를 갖는 것이 당연한 일상입니다. 파키스탄의 경우 기독교인들이 무슬림에게 포교 활동을 하는 것을 금지합니다.

반면 무슬림들은 소수 종교에 속한 사람들에게 무례하게 전도를 하거나, 개종을 강요하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저와 잘 알고 지내던 아줌마 친구들도 저에게 이슬람교를 믿으라고 전도했습니다. 그때마다 저는 '당신에게 제가 예수님 이야기를 정말 하고 싶거든요.'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끓어오르는 마음을 꾹 참아야 했습니다.  답답한 마음이 넘쳐서였을까요. 저는 파키스탄 사람들에게 전도하는 꿈을 자주 꿨습니다.

언어와 문화를 어느 정도 익히고 신뢰 관계가 생긴 후에는 기회가 닿을 때마다 복음을 전하려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종교적 대화들을 나누면 나눌수록, 그들과 내가 큰 차이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들은 꾸란을 읽고 알라에게 기도하고, 무함마드의 가르침을 따라 살며 천국에 가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성경을 읽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예수님을 본받아 살며 천국의 소망을 가지고 사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그들보다 월등하고 선하고 의로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포교란 과연 무엇일까요?"

파키스탄에 아이들_최소연 그림(종이에 오일파스텔)
파키스탄에 아이들_최소연 그림(종이에 오일파스텔)

'우리는 누구나 선교사'

이렇게 별반 다르지 않은 종교 생활을 하는데, 친구들과 이웃들이 기독교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지옥에 간다는 사실이 모순처럼 느껴졌습니다. 수억 명의 인구가 예수를 믿지 않는다는 조건 하나로 지옥에 간다는 사실이 불편했습니다. 알 수 없는 이유로 현실의 한계와 무력감을 느꼈습니다. 전도하고 성경을 번역하고 선교하는 목적이 개종을 도와 지옥이 아닌 천국에 가도록 하는 것이라면, 파키스탄 같은 나라는 너무 적은 수의 사람만이 구원 받을 뿐이라는 생각에 혼란스러웠습니다.

그 무렵 신학 공부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지금은 선교에 대한 생각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기독교와 이슬람의 가장 큰 차이는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며 그분을 아버지라 부르는 그분의 자녀이며 백성이라는 사실입니다. 선교는 사랑의 아버지와 그분이 다스리시는 나라의 아름다움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보여주는 것이라고 이제는 생각합니다.

넓은 의미에서 하나님의 자녀는 누구나 선교사이며 삶으로 성경을 번역하는 성경번역 선교사입니다. 천국에 가기 위한 구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나라를 이 땅에 이루어가는 구원을 받았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믿음은 삶으로 성경을 번역하는 일"

최소연, 김지훈 선교사 님의 자녀_최소연 작(종이에 색연필)
최소연, 김지훈 선교사 님의 자녀_최소연 작(종이에 색연필)

 

;) 김근주읽기와 함께한 최소연 님의 이야기는 후편에~ 

~ to be continued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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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분과 함께 하도록 기쁨의 좋은 소식을 전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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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4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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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미경의 프로필 이미지

    강미경

    1
    6 months 전

    최소연선교사님! 감사합니다!! 어찌 그렇게 큰 용기를 가지고 계신가요. 놀랍습니다. 아름다운 그림을 보여주셔서 고맙습니다. 인물이 살아서 움직이네요^^ 삶 또한 놀랍습니다👏👏 능력의 하나님께서 김지훈선교사님과 최소연 선교사님을 일산은혜교회로 보내주신 큰 은혜에 깊이 감사한 마음입니다. 정말 감사하네요. 뉴스레터 후편도 기다립니다.~ 아~ 다른 그림도 또 계속 보고 싶어요.🥰🥰 함께해서 행복해요💕💕

    ㄴ 답글 (1)
  • 겨자씨의 프로필 이미지

    겨자씨

    1
    6 months 전

    살아잇는 아름다운 그림에 한참 넋을 놓고 보았습니다. "기독교와 이슬람의 가장 큰 차이는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며 그분을 아버지라 부르는 그분의 자녀이며 백성이라는 사실입니다. 선교는 사랑의 아버지와 그분이 다스리시는 나라의 아름다움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보여주는 것이라고 이제는 생각합니다. 넓은 의미에서 하나님의 자녀는 누구나 선교사이며 삶으로 성경을 번역하는 성경번역 선교사입니다. 천국에 가기 위한 구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나라를 이 땅에 이루어가는 구원을 받았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말이 오래 남습니다. 잘 기억하겠습니다. 뉴스레터 후편을 기대합니다. 귀한 삶을 나눠주셔서 감사합니다

    ㄴ 답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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