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외된 여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

김근주읽기 뉴스레터 17호(후편)_도현지Hyunji Doh

2024.10.25 | 조회 29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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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주읽기

'김근주읽기'는 신학자 김근주 목사의 저서를 함께 읽는 독서클럽으로, 책 이야기, 모임 안내, 참여자들의 인터뷰를 뉴스레터로 전합니다.

깊어가는 가을입니다. 도현지Hyunji Doh 님의 뉴스레터 후편입니다. 누구나 '마음이 아픈 한 때'를 지납니다. 도현지 님은 그때마다 기도로 사랑의 길을 물었다고 합니다. 물음의 길 위에서 페미니즘을 배웠고, 성소수자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우리는 무엇을 구해야 할까요. "시선을 낮추고가 아니라 시선을 맞추고, 위에서가 아니라 함께 들어주는" 계절이 지나갑니다. _발행인 주)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요일 4:16) 

아이와 걷는 눈길_도현지 제공 
아이와 걷는 눈길_도현지 제공 

∥ 사랑의 길이 보이는 시간 ∥ 

저는 기독단체 IVF에서 청년기의 신앙생활을 보냈습니다. 그곳에서 일하던 중 대표로 부르심을 받았고 <요한일서> 4장의 사랑장으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말씀으로 하나님을 만나면서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제 삶에 어떻게 연결시키며 살아야 할지 많이 고민했습니다. 말씀에 거한다는 것은 무엇보다 제 삶으로 발현되어야 하는 일이라 생각했으니까요.  

하지만 제 선택과 행동으로 엎어지고, 막막했고, 쉽지 않은 길을 걷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그 고민의 길목마다 기도했습니다. 제 기도의 제목은 '사랑'이었습니다. '나의 어떤 선택과 행동이 '사랑의 길'일까?' 사랑의 길은 탄탄하고 선명한 대로처럼 보이질 않았고, 고민의 아픈 시간을 걸을 때에야 다가오는 것 같았습니다. 돌이켜 보면 '마음이 아픈 한 때'를 지나는 시간이었습니다.

'하나님, 왜 제게 아픔을 주시나요?' '시련이 제게 가르쳐주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요?' 두려움을 떠나야 진정한 사랑이 있을 거 같은데,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을거란 말씀도 제 내면을 괴롭혔습니다. 제 사랑은 이런 작지만 아픈 시련을 겪으며 단련되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가장 낮은 자리에서 두려움을 지나 사랑을 이루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가끔씩 새벽기도를 통해 들리는 회복의 말씀, 그리고 리더공동체에서 누리던 은혜들이 마음에 위로를 주었습니다. 지금도 한발자국씩 믿음의 길을 걷는다는 생각을 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저는 하나님께 다시 혼나는 것 같다가 마음에 위로를 얻는 과정을 되풀이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_도현지, <이사야서 l 어둠을 딛고 빛을 읽다> 4일차 소감

 

"마음이 아프면 책을 읽습니다."

∥ 하나님의 시선을 쫓아 ∥ 

전 개인적으로 여성들이 소외되었다고 생각해서 페미니즘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에 다소 거부감을 느끼시는 분들도 있겠죠. 저는 소외된 여성들이 있기 때문에 페미니즘을 합니다. 남녀를 떠나 소외된 이들 있기에 페미니즘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픔에 대한 '공감'도 페미니즘을 하는 이유와 같습니다.

제 인생은 제가 뜻한대로 걸어온 길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제게 아픔에 공감하는 사람이 되라고 알게 해주셨고, 그 길로 저를 인도하셨습니다. 권리를 찾지 못한 사람들, 비천한 자리에서 기댈 곳도 마음 둘 곳도 없는 사람들에게 시선을 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높으신 곳에서 낮은 자의 곁으로 다가오시는 하나님의 시선을 쫓는 하나님의 마음을 따라 저도 움직이고 싶습니다.

저는 마음이 아프면 책을 읽습니다. 그리고 글을 씁니다. 세상의 큰 움직임들의 뒷면을 살펴보면, 사실을 피하고 진실을 소외시키려는 못된 세력들이 있었습니다. 강고하게 위계질서를 유지하고 그것을 지켜야겠다고 판단하는 권세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역사에서 어떤 사회적 움직임이 세상을 격변시킬 때 그 시작은 모두 소외된 이들을 향한 관심과 배려의 부재에서 기인합니다. 

세 사람의 계단 미소_도현지 제공
세 사람의 계단 미소_도현지 제공

"먹고 살기도 힘든데 페미니즘?"

∥ 성급한 일반화를 버려야 ∥ 

여성에 대한 배려는 여성(woman)이 여성(women)들이 아니라는 인식에서 시작됩니다. 예를 들어서 "이렇게 다들 잘 살고 있는데, 도대체 '여성들'이 뭔 권리찾기가 필요하다는 거냐?" "내 주변의 여성들은 아무 불만도 없는데 도대체 뭐가 문제라는 거냐?" 여성들에게 어떤 권리가 더 필요하다고 먹고 살기도 힘든데 세상을 시끄럽게 하냐?

우리는 아주 쉽게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에 빠지곤 합니다. 어떤 일이든 자세히 들여다 보기가 필요합니다. 여성들은 여성 개개인에게 주어진 상황 속에서 힘들어 합니다. 특별히 여성들이 계층적 차이, 나이의 문제, 장애의 난관에 부딪칠 때 더욱 그러합니다. 절박한 문제적 상황에 노출된 여성들을 뭉뜨거려 성급하게 일반화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소외된 여성들은 소외된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남성은 그렇지 않다는 거냐?" 물론 그렇지 않습니다. 남성도 마찬가지입니다. 단지, 기억해 줄 것을 당부합니다. 아직도 우리 사회는 남녀차별의 심각한 구조적 문제들이 넘쳐납니다. 그로인해 언제나 여성들은 남성들과 동일하게 취급받는 것처럼 포장되었을 뿐 여전히 더 소외되고 더 힘든 위치에 서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여성들은 이 조금의 차이처럼 보이는 문제로 인해 생명을 위협받을 정도의 심각한 억압과 고통을 받습니다. 그래서 여성의 인권과 평등의 문제는 여전히 따로 떼어서 볼 문제가 아닙니다. "그럼 그런 여성들이 불쌍해서 페미니즘이 필요하냐?" 아닙니다. 당연한 권리를 가져야 하는데, 아직 그렇지 못하기에 때문에 우리가 더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페미니즘은 특별한 사람들만이 하는 일이 아니라 '누구나 알아야 할 당연한 일'입니다.

∥ 돌봄과 공감 ∥ 

차별과 소외는 여성에게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의 문제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어쩌면 잘 알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다만 세상이 바뀌는 것을 부정하고 싶은 거겠지요. 그런데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 차별받는 여성의 문제를 주어진 '소명'으로 여기기도 합니다. 제게 주어진 숙제는 소외된 여성의 권리적 동등함과 내적 아픔을 알고자 하는 길입니다. 그래서 제게 여성적 돌봄과 공감은 소명입니다.

공부한 바에 의하면, 여성에 대한 배려는 결이 같은 경험을 가진 사람이 더 잘 공감할 수 있다고 배웠습니다. 같은 여성이 여성을 더 잘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여성을 부정화하는 사람들 중에는 여성이 또 많기도 합니다. 난감한 지점입니다. 엇비슷한 경험과 결이 같다는 이유가 공감과 이해를 넓히기도 하지만, 오히려 방해의 요소가 되기도 하니까요. 

그래서 여성주의적 돌봄이나 공감이 필요합니다. 무엇보다 소외되어 본 위치에 처했던 사람들의 목소리나 경험은 그 자체로 지식으로 인정될 만큼 파워가 있다는 것이 제가 이해하는 여성주의의 핵심논의입니다. 돌봄이나 공감은 이러한 소외된 부분의 목소리와 경험을 이끌어낼 힘이 있다고 보는 것이지요. 따라서 적어도 제 생각에는 돌봄이나 공감은 소외되어본, 하지만 현재 그것을 극복해낸 여성들의 책임이자 의무이기도 합니다.

"여성적 돌봄과 공감이 필요해"

pixabay픽사베이 이미지 퍼옴
pixabay픽사베이 이미지 퍼옴

∥ 더 예민한 다가감 ∥ 

그렇다면 성소수자는 어디에 위치해 있을까요? 놀랍게도 이런 주장을 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일부 성소수자는 나름 괜찮아 보이는 사회적 위치나 직업을 갖고 있기에 차별받는 존재가 아니다." 어떤 이들은 성소수자들의 사회적 권리와 정당한 직업생활을 마치 사회적 특혜나 수혜처럼 보려합니다. 그리고 '왜 자신들을 피해자인 것처럼 외치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묻는 사람도 있습니다. 충격적인 몰상식이죠. 

구조적으로 수혜를 입은 자들이기에 피해를 입은 자들과 같은 논리로 이들을 보기 힘들다고 생각하는 분들의 생각을 짚어 보았습니다. 문제는 너무 물리적인 부분에서 찾는 구조적 모순입니다. 우선 여성의 소외 문제는 좀더 물리적이고 가시적 차원에서 확인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성소수자들이 겪는 어려움은 더 민감하고 예민하게 바라봐야 합니다. 보이는 부분은 물론이고, 보이지 않는 심리적 정서적 차별과 냉소와 박해가 그들을 세상 밖으로 몰아내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얼마전 인스타그램에서 한 그리스도인이자 성소수자의 어려움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글 밑에는 그리스도인들의 말씀과 기도, 그리고 위로의 댓글이 달렸습니다. "괜찮아. 하나님은 죄인을 용서하시니까 걱정하지 마." "네가 처한 그 부분에서 벗어나도록 기도해줄게." 뭐가 문제였을까요? 다 문제입니다.

심리적으로 이분을 이해할 수 있는 내부자의 시선이 아니고, 심지어 이런 외부자의 시선을 너무도 자랑스럽게 말하고 있었지요. 이것은 차별입니다. 위로의 말들이라는 것이 실은 너와 나를 금 그어놓는 것이었거든요. '넌 죄인이지만 죄인이 아닌 내가 보기엔 괜찮아'하는 듯한 조용히 정죄하는 목소리. 그런 외부자들의 목소리에 우리는 얼마나 익숙하게 길들여져 있을까요.

 

어떤 것이든, 하나님을 향한 첫사랑보다 이웃들을 사랑하라고 허락하신 것들이 도구가 아닌 하나님을 앞선 목적으로 둔갑할 때, 하나님 마음을 안타깝게 하지 않나 생각이 듭니다. 필요 이상으로 갖게 된 우리의 무언가는 다른 이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을 결국 가져온 것은 아닐까 싶거든요

_도현지, <이사야서 l 어둠을 딛고 빛을 읽다> 2일차 소감

 

∥ 배워야 합니다 ∥ 

저는 아주 조금씩 성소수자분들의 내부자적(insider)인 목소리나 경험에 대해서 외부자로서 배워가고 있습니다. 이분들의 목소리나 경험은 그 자체로 가치가 있습니다. 하지만 여성이기에 내부자적인 시선을 가질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적어도 이분들이 공동체 안에서 처해 있는 상황은 제가 보기엔 소외된 여성들이 가부장제에서 이중억압구조를 겪는 모습만큼 심각해 보이기에 조금 주제가 넘은 글을 쓰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이들을 배척하는 분위기는 이미 대세이며 주류담론이고, 그리스도인들이 그 자리에 합류한다는 것은 결코 소외된 자의 자리에 서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합당하지 않은 태도입니다. 물론, 제 부족한 생각이 어떻게 성소수자들이 처한 어려움을 헤아릴 수 있을지 고민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이러한 목소리를 통한 운동이 하나님의 소외된 자의 시선을 따라가고 있는지도 의문입니다

"하나님의 시선이 향하는 곳으로"

∥ 시선을 맞추고 ∥ 

오늘 아침 <시냇가에 심은 나무> 큐티에서 디매오의 아들 바디매오가 예수님을 불렀던, 그래서 가던 길을 멈추셨던 예수님과 소음으로 생각했던 사람들 사이에서 제 모습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소외된 자의 목소리와 경험에 조금 급히 가던 길을 멈추고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물어보고' 또 '듣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시선을 낮추고가 아니라 시선을 맞추고, 위에서가 아니라 함께 들어주는 자세가 우리에게 필요하지 않을까요.

사랑하는 나의 딸아_도현지 제공 
사랑하는 나의 딸아_도현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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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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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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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bout 1 month 전

    현지님🌸감사합니다! 레터를 읽으며 현지님에 대해 더 알게 된 것 같아서 기뻐요^^ 사랑을 두고 기도하셨군요.👍👏👏 아픔, 시련, 두려움을 넘어서는 큰 사랑의 기록들이 감동입니다. 하신 공부가 반짝반짝 빛나길, 하나님의 크신 축복이 늘 함께 하시길 기도합니다. 사진을 보니 눈사람조차 따뜻하게 느껴지네요..기분탓이것죠? ㅎ 좌담회 정말 기대됩니다! 건강하십시오💕💕 사랑하고 또 사랑합니다😍😍

    ㄴ 답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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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주읽기'는 신학자 김근주 목사의 저서를 함께 읽는 독서클럽으로, 책 이야기, 모임 안내, 참여자들의 인터뷰를 뉴스레터로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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