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8일 김근주읽기 1년 모임을 가졌습니다. '읽고 쓰고 함께 노는 평신도들 : 우리들의 신앙 이야기'를 주제로 발표하고 토론한 내용을 세 차례 나누어 싣습니다. 순서는 1. 이범진(고낙임), 2. 진상협(황상수, 김대연), 3. 이은주(정진아) (이하 존칭생략) 입니다.
몇 남지 않는 침착한 사람들에 대하여
이범진 ❘ 복음과상황 편집장
‘김근주 읽기’ 1년을 기념하는 모임에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모임을 처음부터 지켜본, 외부자의 시선으로 ‘김근주 읽기’의 의미를 살피고자 합니다. 내부에서 어떤 이야기가 오가는지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제 발제에는 치명적인 한계가 있겠지만 ‘이렇게 보는 외부자도 있구나’ 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여 주시면 좋겠습니다.
김근주읽기는 김근주 사태에서 시작
‘김근주 읽기’는 아시다시피 김근주 사태에 대한 ‘공론화’ ‘숙의’ 과정의 연속으로(혹은 결과로) 생겨난 모임입니다.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겠습니다.) 저는 그 매개가 ‘책’이라는 점에 주목하였습니다. 왜 하필이면 책을? 누가 요즘 책을 읽는다고? 사실 저도 매달 월간지를 만들어내는 사람입니다만, 책 읽을까, 유튜브 볼까, 선택의 순간이 오면 고민 없이 유튜브를 봅니다.
저는 순전히 제 직업 때문에 책을 읽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모인 분들은 누군가의 사상을 따져 알기 위해서 그의 책을 구해서 읽고 나누겠다는 분들입니다. 이 모임의 시작 자체가 매우 매우 매우 가능성이 없어 보였습니다. 책을 읽겠다는 부담감을 짊어지는 사람들은 생각보다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생각보다 더 적습니다. 여기 계신 분들은 그런 의미에서 우리 시대 천연기념물로 비유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매우 희귀하며 고유한 분들입니다.
"적극적으로 덤벼야 하는 결심과 결단"
책읽기란 주체적 모드Mode
저는 다른 많은 선택지 중에서 굳이 책을 드는 사람에 대해서 관심이 많습니다. 특히 종이책에 대해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여러분들이 한번 잘 생각해보세요. 종이책(또는 책 읽는 기능만 있는 이북리더기)을 들고 읽을 때의 마음가짐을 잘 떠올려 보세요. 그때의 ‘마음가짐’(Mode, Attitude)이 어떤가요? 내가 핸드폰으로 뉴스를 접할 때,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에 접속할 때의 마음가짐과 무엇이 다른가요? 제 경우를 예로 들어보자면, 뉴스나 SNS는 나를 매우 적극적으로 부릅니다. 나는 그냥 듣기만 하면 되고, 끌려가면 됩니다. 그 이후는 특별한 노력이 필요 없습니다. 한 시간 두 시간도 훌쩍 지나갑니다. 반면에 책을 읽을 때는요? 내가 매우 적극적으로 덤벼야 합니다. 책 읽는 데에는 결심과 결단이 필요합니다. 뉴스나 페북의 글을 읽을 때보다 훨씬 주체적인 모드가 됩니다.
보통 페이스북에 접속해서 스크롤을 내릴 때 무슨 생각을 하시나요? 아무 생각도 안 하시죠? 그런데 내 마음을 잘 들여다보면, ‘오늘은 누가 사고 쳤나’ ‘어디 싸움 난 곳 없나?’ 재밌는 일 찾아다니죠. 이미 소셜미디어가 우리의 마음과 뇌신경을 어떻게 변질시키고 있는지에 대한 연구는 많이 나와 있습니다. 좋은 책과 다큐멘터리도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주1)
문해력 상실은 인류에게 치명적
일찍이 학교에 디지털 기기를 도입해 ‘교육 선도국’으로 불렸던 스웨덴이 최근에 다시 종이 교과서와 연필을 도입하고 있다는 뉴스(가디언)를 접했습니다. 디지털 텍스트가 아동의 문해력에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2025년부터 ‘디지털 교과서’를 도입해, 2028년까지 전면 도입한다는 말이 들립니다. 어느 방법이 교육 관점에서 더 좋을지는 논쟁이 계속될 것입니다. 다만 문해력 측면에서는 디지털텍스트보다 종이텍스트가 더 도움이 된다는 연구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문해력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언급되는데, 제가 생각할 때 문해력은 단순히 독서의 퀄리티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생각이 담긴 글을 이해하는 인간 습성과 태도입니다. 그래서 문해력의 상실은 인류에 매우 치명적이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사람들은 점점 쇼츠 영상에 익숙해지고, 이제 영화도 1.25배로 봅니다.
"예배로부터 우리를 이탈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종이주보를 온라인주보로 바꾸자는 캠페인도 조금 아쉽게 생각합니다. 환경을 아낀다는 측면은 이해가 되는데요. (요즘은 산림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 친환경 종이들도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오히려 스트리밍보다 탄소발자국을 더 적게 남기기도 합니다.)
온라인주보를 볼 때, 핸드폰으로 봅니다. 핸드폰으로 주보를 보면서, 카톡의 알림이 자꾸 신경이 쓰입니다. 중요한 메일이 와 있을 것 같아서, 아니 그냥 습관적으로 다른 어플을 열게 됩니다. 아마 예배 때 핸드폰으로 성경책을 보는 분들은 제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아실 겁니다. 핸드폰은 우리를 자꾸만 순간순간 예배로부터 이탈시키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그동안 종이 성경책, 종이 주보가 잡아주던 마음가짐(Mode)이 있었습니다.
책 앞에서 침착해진다는 것
어쨌든 중요한 사실은, 사람은 책 앞에서 침착해진다는 것입니다. 글을 쓸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디에 어떤 방식으로 글을 쓰느냐에 따라 우리의 태도와 인식이 달라집니다. 철학자 니체가 손을 다쳐서 글씨를 쓸 수 없게 되자, 타자기를 사용하게 되는데요. 그때 그는 자기 안의 쓰기 체계가 송두리째 바뀌고 있음을 알아챕니다. 손글씨를 써야 할 때, 카톡을 써야 할 때, 페이스북에 써야 할 때 우리의 마음가짐은 각각 달라집니다. 양 엄지손가락을 이용해서 핸드폰을 터치할 때와 열손가락을 최대한 사용해서 키보드 자판을 누를 때와 펜을 움켜잡을 때의 마음 상태가 각각 다르다는 것입니다. 또 글을 읽을 대상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저는 ‘김근주 읽기’ 뉴스레터에 실린 구성원들의 이야기와 글을 읽으며, 그 진지함과 진실함에 압도되는 경험을 했습니다. 그분들이 김근주 읽기 모임을 함께하는 이들과 나누는 이야기가 결코 가볍지 않다는 데에서 이 모임의 저력을 확인하였습니다. 책을 함께 읽는, 진지하고 침착한 사람들에게 자기의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기에 더 정성을 다하였을 것이리라 쉽게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흑백논리의 시대를 건너는 가장 빠른 길
다시 처음으로 돌아갑니다. 김근주 읽기는 ‘김근주 사태’에서 비롯된 것이고, 고유명사 김근주를 넘어서 수많은 김근주들을 지키고, 또 우리를 지키기 위해서 시작된 모임입니다. 그런데 혐오와 배제, 흑색선전과 정죄의 광기가 휘몰아치는데 그에 맞서는 방법이 ‘함께 읽기’라고 한다면, ‘너무 태평한 거 아니냐’라는 식의 반응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책을 읽는 행위를 “수동적”이고 “방어”적인 것으로 인식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을 것입니다. 차라리 반박 논리를 정갈하게 정리해서 홍보하고 단톡방에 뿌리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물론 그런 운동도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저는 지금으로서는 함께 책을 읽는 것이 흑백논리의 시대를 건너는 가장 빠른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논리가 통하지 않는 시대입니다. 김근주 선생님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음해하는 사람이 앞에 있다고 생각해봅시다. 그와 논리적 대화가 가능할까요? 논리는 같은/유사한 알고리즘을 가진 사람들끼리 통하는 것입니다. 알고리즘의 수식과 작동 방식이 다른 사람들과는 논리로 소통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김근주’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이미 알고리즘은 “아니오”로 작동하는 사람들에게 김근주의 “무엇무엇”은 자동 생략될 뿐입니다.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그들도 침착하게 알아가야 할 기회가 필요합니다.)
"다시 처절하게 반성하고 빌드업해야"
침착하고 진지한 마음
지금은 우리의 기본 없음(가짜뉴스에 휘말리고, 피곤한 싸움을 회피하는)을 처절하게 반성하면서 다시 빌드업해야 할 때입니다. 10년이 걸릴 수도 있고, 20년이 걸릴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먼저 우리는 침착하고 진지한 마음(mode)을 다시 찾아야 하고, 함께 책 읽기는 그것을 가능하게 할 것입니다. 침착하게 함께 읽을 때, 우리는 자신의 알고리즘을 다시 설계하는 경험을 하게 되겠지요. 결국에는 반대 입장에 있는 사람을 만나도 당황하지 않고 말과 글을 나눌 수 있는 내공이 길러졌으면 좋겠습니다.
수학자이자 물리학자인 파스칼은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마음으로 일하고 있는지 여부를 알려 주는 가장 신뢰할 만한 표지가 바로 반대 앞에서 침착한 태도”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1년 동안 4권의 책을, 함께 읽는, 공동체를 만들어, 침착한 생태계를 형성하고 있는 ‘김근주 읽기’에 감사드립니다.
주 1) 다큐멘터리는 넷플릭스의 ‘소셜딜레마’와 최근 EBS에서 방영한 10부작 다큐 ‘책맹인류’를 추천합니다. 저는 니콜라스 카의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청림출판)에 큰 영향을 받았고, 이 발제를 준비하면서는 제프리 빌브로의 《리딩 더 타임스》(IVP) 등을 참고하였습니다. 발제문의 구체적인 인용과 예화는 두 책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토론 : '몇 남지 않은 침착한 사람들에 대하여'를 읽고
고낙임 / 일산은혜교회 집사, IVF 미디어사역부 간사
안녕하세요, 저는 일산은혜교회 집사이자 캠퍼스 선교단체 IVF의 미디어 사역부에서 간사로 일하고 있는 고낙임 집사입니다. 김근주 읽기는 두번째 책 <복음의 공공성> 부터 함께 하고 있습니다. 귀한 자리에 마이크를 들게 되어서 무척 떨리지만, 이 자리에 참석하신 분들을 대신해 함께 생각할 것들을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는 대로 실천하는 용기, 읽는 것은 그런 힘"
이범진 편집장님께서 외부자의 시선으로 '김근주 읽기' 모임을 잘 정의해주셨습니다. 일련의 '사태'에 대응하여 '읽기'를 선택한 이 모임을 '몇 남지 않은 침착한 사람들', '천연기념물'에 비유해주셔서 일단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말씀하신대로 디지털 미디어 시대에 책을 읽는 사람들, 더 나아가 진지한 신앙에 대해 고민하는 크리스천들의 모임이니 지극히 '적은 자들 중에 적은 자'라고 할 수 있겠네요.
또 '김근주 읽기'를 논리가 통하지 않는 가짜뉴스 시대에 논리로 재빠르게 반박하기 보다 침착하게 빌드업 하고, 생태계를 만들어 가는 운동이라고도 평가해주셨는데요. 저도 그 부분이 이 '김근주 읽기'의 기본 정신이고 매력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김근주라는 신학자의 책을 매개로 성경의 본문과 실천적인 신앙을 고민하면서 각자의 자리에서 배운 것을 가지고 일상을 살아가는 - 김근주 교수님이 강조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공적인 책임을 다하고자 노력하는 분들을 이곳에서 만나게 되어서 참 좋았습니다. 그리고 이 운동의 의미가 앞으로도 잘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질문 1) 왜 읽기인가요?, 읽기의 힘은 무엇일까요?
편집장님께서 앞부분에 '굳이 책을 드는 사람'과 '종이책을 대하는 마음가짐'에 대해 많이 말씀해주셨는데요, 저는 편집장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김근주 읽기'에 참여하고 있는 저의 일상을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저도 스마트폰을 보는 시간이 (스크린타임에 따르면) 하루에 3시간 정도, 많은 날은 5시간 정도 됩니다. 그에 비하면 종이책을 집어드는 시간은 아주 소소하지요(다른 분들은 어떠실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책을 읽는 그 시간만큼은 다른 어떤 시간보다 정신을 집중하게 되고 차분해지는 시간인 것 같습니다. 물론 가끔은 TV를 틀어놓거나 아이들의 방해로 멀티테스킹을 하면서 읽을 때도 있고, 카톡에 올라오는 다른 분들의 나눔을 먼저 스캔했다가 주말에 몰아서 책을 읽을 때도 있었지만 독서는 저에게 그 어떤 행동보다 편안하고 선호하는 취미입니다. 책을 넘기면서 중요한 문구에 연필로 줄을 긋거나 메모를 하는 '사각사각' 소리는 제가 제일 좋아하는 ASMR이고요. 책을 읽으면서 떠오르는 느낌이나 생각들을 카톡에 올릴 때의 떨림, 그리고 함께 나눈 글을 읽을 때 마치 수채화 물감이 여러번 덧칠할 때마다 색이 달라지는 것 같은 그런 기쁨과 희열을 여기 계신 분들도 다 경험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토론이랄 것까지는 아니지만 여러분들을 대신해 몇 가지 생각해 볼 질문들을 정리해 봤습니다. 저는 이 토론을 제안받기 전까지 (기존에 다른 책모임에 많이 참여해 봤음에도 불구하고) '독서'란 굉장히 개인적인 취미이고 개인의 생각과 세계관을 바꾸는 능력 정도로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말씀하신대로 '읽는 행위' 자체가 뇌와 마음에 끼치는 특별한 영향력이 있다는 것이 요즘 많이 회자되고 있지요.
거기에 더 나아가서 나누고 싶은 것이 있는데요, 실제로 이번 <구약의 숲>을 읽는 동안 저희 교회 한 집사님께서 주변의 아동학대가 의심되는 어린 학생에게 관심을 갖고 경찰에 아동학대 신고를 하게 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집사님께서 교회 목장 모임에서 그 이야기를 하시면서 "그 아이의 상황을 보고 <구약의 숲>에서 읽고 있는 내용이 생각이 났다. 내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그런 이야기를 알고 있는데 어떻게 그런 상황을 모른척 지나갈 수 있는가? 그래서 용기를 내어 신고를 하게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그 순간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데요, 두렵고 떨리지만 아는 대로 실천하는 용기, 읽는 것은 그런 힘이 있구나를 깨닫게 되는 순간이였습니다.
여러분이 생각하시는 '읽기의 힘'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읽기'는 우리를 어디까지 데리고 갈 수 있을까요? "책 읽는 공동체"는 무엇을 상상해 낼 수 있을까요? 이런 질문을 하다보니, 구약도 그렇고 신약도 '함께 읽는 책'이였다는 사실이 새삼 새롭게 다가옵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질문 2) 읽기의 확산, 읽는 인간으로 전도는 어떻게 가능할까요?
두번째 질문은 식상한 질문일 수도 있습니다만, 제가 캠퍼스에서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미디어 사역을 하고 있는데요, 젊은 친구들의 문해력과 독서인구 감소라는 현실이 현장에서도 굉장히 체감되는 상황입니다. 저희가 <신학블록버스터>라는 유튜브 프로그램을 제작하기도 했고, 거기에 김근주 목사님께서 출연해주시기도 했는데요. 신학을 쉽게 대중적인 언어로 전달해준다는 취지에도 불구하고 대체로 댓글을 보면 기존에 신앙생활의 연륜이 있으신 분들이 댓글을 많이 달아주셨습니다.
재미있다는 반응도 많지만 실제로 이 영상이 젊은 친구들에게 잘 닿았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당장 저희 아이들도 책을 되게 안 좋아합니다. '책 읽는 엄마'를 노출시키기 위해서 일부러 아이들 보는 앞에서 책을 읽기도 하는데 잘 안 먹힙니다. '생태계'라고 하면 다양하고 새로운 생명들이 번성하는 이미지를 상상하게 되잖아요?
'김근주 읽기'도 좋은 생태계로 빌드업하기 위해서는 외연의 확장, 혹은 선교적인 역동들이 어느 정도는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범진 편집장님께서도 <복음과 상황>을 만드시면서 이런 고민들이 많으실 것 같은데, '읽기'의 확산, '읽는 인간'으로의 전도,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좋은 아이디어나 의견 있으신 분들은 댓글 창에 남겨주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댓글 2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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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미경
이범진 편집장님! 외부자의 따뜻한 시선으로 살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주체적으로 읽기를 하는 일이 얼마나 자부심이 있는 행동인지 덕분에 다시 환기하게 되었습니다. 잡지를 어찌 그리 잘 만들어 주시는지요~ 볼때마다 감동입니다!👍 김근주목사님의 책을 읽으며, 복음과 상황 잡지를 읽으면서 그리고 수 많은 좋은 책들 앞에서 열린 마음으로 빌드업이 꼭 되어야겠다고 다짐해봅니다.ㅎ 고낙임 집사님 감사합니다! 미디어 사역에서 일하시는 모습을 상상하며 참 멋지시구나 생각됩니다. 좋은 질문 덕분에 '함께 읽는 책'이 얼마나 귀한지 다시 마음에 새겨봅니다. 역시 함께 읽기는 너~무 좋은거 였어요^^🩷 읽기보다 더욱 좋은 건 역시 이범진님 고낙임님 입니다😍 함께 해서 행복합니다^^ 감사해요🙏🩷🩷
김근주읽기 (280)
😍 감사합니다. 함께해서 행복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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