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가 일어나야 한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이지연의 신앙 이야기
저는 점심시간 동료들과 도란도란 이야기하는 것을 행복으로 여기는 평범한 직장인입니다. 아메리카노 한잔을 손에 들고 ‘가즈아’를 호기롭게 외치다가도, 불현듯 은행 대출이 생각나면 총총 발걸음을 사무실로 재촉합니다.
12년 전인 2011년, 저는 신앙의 멘토인 친오빠를 교통사고로 잃었습니다. 사랑하는 오빠를 잃은 슬픔, 홀로 남겨진 듯한 외로움, 사무치는 그리움으로 오랫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문득 “지연아, 우리 하나님나라에 대해 같이 공부하자” 했던 오빠와의 약속이 떠올랐습니다. 나들목교회와 기독연구원 느헤미야와의 만남은 제 간절한 마음의 약속에서 시작됐습니다. 그때부터 열심히 김형국 목사님과 느헤미야 교수님들 강의와 설교, 영상과 책을 탐독했습니다. 2019년 저는 기독연구원 느헤미야 입문과정에 입학했고, 같은 해 나들목네트워크 서로교회의 성도가 됐습니다.
개신교의 슬픈 현실, 이광하 목사님의 글
“한국교회가 앞장서 동성애를 반대하는 데, 김근주 목사가 찬물을 끼얹고 혼란을 일으키고 있다. 같은 교단이지만 이렇게 놔두면 안 될 것 같아서 이단성 여부를 조사해 달라”(‘뉴스앤조이’ 이용필 기자, 2021.8.26. 참조). 예장통합 총회 이단성 연구· 조사 헌의안 중, 강원노회 측에서 김근주 교수 이단성을 조사해 달라는 이유는 참으로 개탄스러웠습니다. 저는 분노했습니다. 한국 개신교의 슬픈 현실을 보는 순간이었습니다.
2022년 가을, 일산은혜교회 이광하 목사님의 페이스북 글을 읽었습니다. “나에겐 합동이나 합신의 경직됨보다 통합의 똥멍충이 짓이 더 절망적으로 다가온다.” 그동안 제가 알아왔던 이 목사님의 성품을 생각하면, ‘똥멍충이 짓’이라는 단어는 목사님이 표현할 수 있는 최대치의 욕이었습니다. 페북에 적힌 이 단어가 제 가슴을 쳤습니다. 분노와 울분으로 꾹꾹 눌러쓴 것만 같았습니다. 그때 헌의안을 상정한 한국개신교계 지도자들의 수준과 김근주 교수님을 향한 저열한 마음을 더는 좌시하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평신도가 일어나야 한다’라는 절박한 심정으로 김근주읽기에 동참했습니다. <복음과상황>에 쓴 강경희 님의 글도 제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어느 종교든 진리를 독점한다는 우월의식이 그보다 못한 종교로 전락해”
21세기형 이방인 신자
함께 읽기 톡방에 저를 ‘21세기형 이방인 신자’라 쓴 적이 있습니다. 제가 모태신앙이 아니고, 또 기독교인 되기 전에 불교와 동양사상에 관심이 많았기에 나온 말이었습니다. 기독교인이 된 후에는 이런 공부와는 다소 멀어졌지만, 다른 종교와 사상에 깊은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진리와 궁극에 대한 목마름과 숭고한 정신을 추구하는 것에 존경의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많은 기독인이 자신과 다른 종교를 폄하하고, 심지어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라며 가볍게 말할 때 안타까움을 느낍니다. 어느 종교든 자신이 무조건 옳고 진리를 독점하고 있다는 우월의식을 갖는 순간, 그보다 못한 종교로 전락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어쩌면 김근주읽기는 작은 교회"
21세기형 에클레시아 김근주읽기
어쩌면 김근주읽기 톡방이 작은 교회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각자가 생각하는 감명 깊은 구절, 나와 다른 이들의 글을 서로 나누는 곳, 가까운 사람들과도 나누기 어려운 내면의 생각과 마음을 교환하는 것이 무엇보다 좋습니다. 일종의 상호작용이 일어나는 것 같습니다. 어느덧 글을 공유하면서 서로 안전하게 대화할 수 있다는 안도감이 있습니다.
김근주읽기의 약점은 사실 강점이기도 합니다. 서로에 대한 사전 정보가 없다는 것이 어쩌면 보이지 않았던 불평등을 없애는 것이기도 하니까요. 사회적 배경이나 지위를 지운 채 오롯이 나눔의 글로 서로를 투명하게 보는 놀라운 경험을 했습니다. 프레임도 없고, 편견도 없는 이 공간이 그래서 특별합니다. 평소에는 오글거려서 써보지 못한 글도 과감하게 올리고, 그래서 잠시 쥐구멍에 들어갔다가 나오기도 했지만요. 서로를 알아가며 삶을 배울 수 있는 나눔을 통해 그리스도의 역사하심과 치유와 회복을 경험하였습니다. 제게는 마치 교회와 같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생각할 죽음
죽음은 제 불안의 근원이자 존재의 중요한 화두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한 후 죽음의 불안에서 어느 정도 벗어났지만, 몸과 마음이 연약해지면 여진처럼 남아있는 미세한 죽음의 불안이 저를 흔들곤 합니다. 그래서일까요. 『구약으로 읽는 부활 신앙』을 읽으며 저는 죽음의 문제를 주의 깊게 보았습니다.
“구약의 모든 관심은 죽지 않는 영원한 삶이 아니라 이 땅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에 있다.”19쪽 “사는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지만, 그 삶에는 반드시 끝이 있다. 구약의 기자들은 이러한 인간의 한계에 전혀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20쪽 “삶을 끝내고 조상들의 길로 가는 것은 마땅한 질서이다. 그런 의미에서 죽음은 항상 하나님과 반대되는 것이거나 저주라고 말하는 것은 혹은 죽음은 보편적으로 죄의 결과라고 이해하는 것은 구약의 보편적 이해에 있어서 옳지 않다.”25쪽 (김근주 ‘구약으로 읽는 부활 신앙’ 본문 중에서)
구약에서 말하는 죽음의 의미가 선명하게 다가온 구절들입니다. 불안은 인간의 유한성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마음에서 싹틉니다. 우리는 모두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인간의 유한성을 받아들이며, 자신의 참된 본성을 깨달을 때 참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믿음이 있다면 죽음의 두려움도 이길 수 있겠다 생각했습니다.
구약의 관심에서 신약 읽게 돼
『구약으로 읽는 부활 신앙』을 함께 읽으며 구약 성서에 대해 새로운 눈이 열렸습니다. ‘구약을 모르고 신약을 안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과 신약의 전제가 되는 구약을 그동안 경시하는 풍토가 만연했음을 배웠습니다. 구약의 관심에서 신약을 읽는 것의 중요성과 구약을 경전이나 법전처럼 기계적으로 외우고 적용하는 단순성에서 벗어나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게 구약은 하나님 구속의 역사 안의 이야기(내러티브)로 읽고 접근할 때 그 의미가 새롭게 다가왔습니다. 궁극적으로 성서는 인류와 인간에 대한 지극한 하나님의 사랑 이야기임을 확신합니다. 김근주 읽기를 통해 성서 속 과거가 아니라 과거의 의미를 새롭게 하는 역사가 일어나길 바랍니다. 김근주 읽기가 복의 통로로 자리매김하길 바랍니다.
흩어진 모자이크를 맞추듯
『구약으로 읽는 부활 신앙』을 읽고, 데어라 혼이 쓴 『사람들은 죽은 유대인을 사랑한다』(엘리)를 읽었습니다. “사회적 약자의 죽음을 지배 문화가 어떻게 활용하는지에 대한 고전이 될만한 작품”이라는 정희진의 해설도 의미심장했고, 죽음의 의미를 포괄한 시간에 관한 구약 성서의 해석이 어떠한지도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또한 평소 알고자 했던 유대교 신앙의 정수를 느낀 듯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 마태 또는 마태 공동체가 썼다는 신약 마태복음을 다시 읽었습니다. 깐깐하고 답답한 고구마 같이 여겨졌던 유대인들에 대한 편견도 극복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죽음, 유대인, 유대교, 편견 등 이리저리 흩어지고 막연했던 제 머릿속의 개념과 생각들이 여러 겹의 독서를 통해 하나로 완성된 모자이크처럼 맞춰졌습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는 것은,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은, 이 세상이 전부이고 이 세상에 유한한 존재로 떨어진 나를 받아들이는 과정이며, 하나님은 사랑이시므로 이 세상이 우주, 이 현세 안에 나를 가두거나 속박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이 우주, 이 세상의 창조주 영원 안으로 나를, 인간을, 세상을 들어가게 하여 창조주 안에, 피조세계 원래 자리에 있게 하여, 참된 생명으로 인도하고 역설적이게도 참 자유를 누리게 되는 것이지 않을까 한다.” (‘구약으로 읽는 부활 신앙’ 5일차 5월 19일 이지연 님의 소감 중에서)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주는 존재"
똑똑, 약한 자들의 문을 두드리는
사람, 김.근.주.는 성소수자, 장애인, 사회적 소수자를 있는 그대로의 존재로 사랑하는 이입니다. 인간에 대한 연민과 사랑 하나로 모든 한계와 조건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이 세상에 뛰어든 예수님의 모습과도 겹쳐 보입니다. 세상 한가운데 뚝 떨어져 홀로 남은 것 같은 지독한 외로움 속에 있는 자들을 찾아가 똑똑 문을 두드릴 것만 같은 사람입니다. 다가와 함께 가만히 있어 줄 것 같은 사람, 우리가 가난하고 약하고 작은 존재임을 뼈저리게 느낄 때 비로소 만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앗! 김근주라면 절대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있어요. 남다른 유머 감각입니다. ㅎㅎ
김찬주 님의 글, 모두 안전한 공론의 장
제게는 함께 읽는 모든 분의 글이 하나하나 소중했습니다. 밤하늘 별처럼 마음에 박히는 글들이 넘쳐났습니다. 그중 특별히 한 분의 글을 꼽자면 김찬주 님의 글입니다.
“마지막 결론장이다. 이 책에 제시된 모범 사례는 너무 이상적인 높은 수준의 기독교인을 말하고 있지 않나 싶다. 그런 고상하고 순전한 마음만이 진실한 의미의 부활 신앙인 것만 같이 이해가 되어서 적잖이 불편한 마음으로 마치게 되어 유감이다. 뭐를 깨달았다고 말하기는 쉽다. 그러나 그대로 살고 고치고 할 수 있는 능력조차 없는 자기 자신에 대한 절망, 그 이후에 오는 은혜가 나를 살리는 그런 수준의 삶에서 허덕이며 나 자신에 대한 생각을 더 이상 하지 않는 그런 사람으로 변화되기를 간절히 바라게 되는. 한 차원 더 하나님께 가까이 가게 되는 길을 보여주신 것 같아 감사하다.” (‘구약으로 읽는 부활 신앙’ 12일차 김찬주 소감 중에서)
실천적 신앙인의 고뇌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습니다. 어떤 통찰이나 깨달음에 대한 강박 없이 담담하고 냉정하게 써 내려간 글이 제게는 더 큰 울림으로 다가왔습니다. 참으로 진솔하고 정직한 소감이라 느꼈습니다. 여러 번 김찬주 님의 글을 읽어보며 그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진실하게 이 문제를 놓고 씨름했는지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글의 말미에 이렇게 쓰셨습니다. “반항하면서도 이상하게 수용이 되는, 그리고 삶과 신앙에 있어 바른 지침이 되는 좋은 책이었다고 생각한다.” 제 마음에 파문이 이는 글이었습니다.
이 분의 글을 읽으면서 어쩌면 김근주 읽기의 존재 이유이자 묘미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모두가 안전하게, 용기 있게 자신의 생각과 이야기를 쓸 수 있는 공론의 장입니다.
:) 이지연 님의 인터뷰는 두 편입니다. 후편은 다음 호에 계속됩니다.
~ to be continued
댓글 1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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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미경
이지연님 많이 감사합니다. 지연님의 글을 많이 읽어서 그럴까요? 교회에서 매주 만날 것만 같은 가까운 분으로 여겨집니다. 참 감사한 마음입니다🙏 사진도 글에서도 지연님의 따뜻한 성품이 느껴집니다. 노을사진은 작품이네요! 아픈 일을 겪으셨을때 얼마나 힘드셨을지요 ㅠ 읽기에서 만났지만 실제로 뵈면 더없이 기쁠것 같습니다! 언젠가 기쁘게 만나 뵙길 바랍니다. 두번째 뉴스레터도 기다립니다. 넘 감사해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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