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레터 요청을 받고
처음 김근주읽기 뉴스레터 제안을 받고 완곡하게 거절하고 싶었습니다. 책 읽고 소감을 나누는 것으로 충분했거든요. 그런데 한편으론 진솔했던 읽기처럼 진솔한 인터뷰도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됐어요. 어차피 함께 읽기를 계속할 테니, 먼저 즐기자는 심정으로 덥석 제안을 수락했습니다. 우리들의 읽기가 조금씩 성장하듯 우리들의 이야기도 더 풍성해지면 좋겠다는 마음이었습니다. 글을 쓰는 며칠 동안 머릿속 말들이 점점 부풀더니 방안 가득 단어와 문장들이 둥둥 떠다녔습니다. 저는 핫도그처럼 이불을 돌돌 말고는 ‘끙끙’과 ‘쫄깃’을 반복하며 열심히 자판을 두들겼습니다. 결국 생각보다 긴 글을 띄우게 되었네요.
"김근주읽기가 불러온 은혜의 자기장"
책이 불러온 놀라운 책들
『구약으로 읽는 부활 신앙』은 제게 특별했습니다. 죽음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열었고, 구약의 관심에서 신약을 읽어내야 한다는 사실도 배웠습니다. (뉴스레터 4호 전편 참고:) 이 시대의 에클레시아, 김근주읽기 (maily.so) 함께 읽기의 감동과 여운에 젖어있을 때, 다시 매력적인 두 권의 책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데어라 혼의 『사람들은 죽은 유대인을 사랑한다』(엘리, 2023)와 데이비드 조지 해스컬의 『숲에서 우주를 보다』 (에이도스, 2014) 입니다. 김근주읽기가 불러온 은혜의 자기장 안에서 이 책들은 서로 어우러져 춤추고 있습니다.
우리 자신이 곧 역사적 존재
고대 랍비 전통은 이집트 노예 신분으로부터 해방된 것이 단지 우리 조상들만이 아니며 우리 자신도 하느님에 의해 한 명 한 명 자유를 얻었다고 주장한다. 이 전통은 하느님이 시나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토라라는 율법을 주셨을 때 그 자리에는 단지 그 세대의 이스라엘 백성만 있었던 것은 아니라 그들의 모든-생물학적인, 그리고 영적인, 그리고 영적인-미래의 후손까지 함께 서 있었던 것이라고 가르친다. 미국에서 시간은 직선으로 흐르고 그 안에서 중요한 것은 오직 미래일 뿐이었지만, 유대교에서 시간은 그보다는 나선형으로 올라가는 소용돌이나 옛날식 전화기의 꼬인 코드에 가까운데, 그 안에서 미래는 현재이고, 현재는 본질적으로 과거였다. 17쪽. (‘사람들은 죽은 유대인을 사랑한다’ 본문에서)
“현재는 본질적으로 과거였다.” 온몸이 저릿해지는 문장이었습니다. 제 몸의 감각이 태초를 기억하듯이 가슴이 뛰고 피가 돌았습니다. 마치 창조 세계의 자기장 안으로 빨려드는 듯했습니다. 막연했던 죽음의 공포도 미래의 염려도 안개처럼 걷히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직선의 시간을 살아가는 존재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유대교에서 시간은 나선형으로 올라가는 소용돌이치는 역동적이고 입체적인 개념이었습니다. “미래는 현재이고, 현재는 본질적으로 과거”가 될 때, 이집트에서 히브리인 해방도, 토라의 율법 계시도 모두 ‘지금-여기’ 오늘의 나를 향한 구원의 사건이 됩니다. 그리고 구약 성서의 야훼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인이라면 구원의 의미를 ‘에덴의 인간성 회복’의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나이가 들어 죽음의 시간을 향하는 것은 하나님께 다시 돌아가는 축복의 시간이 가까웠음을, 죽음은 창조주와 함께 하는 시간 속으로 온전히 돌아가는 것임을 배웠습니다. 성서는 과거의 역사가 아니라, 우리의 현재이며, 우리 자신이 곧 역사적 존재라는 사실도 깨달았습니다.
"성서는 우리의 현재, 안식일의 식탁에서 천지창조를"
히브리어 성서는 결코 역사적 맥락에서 논의되지 않았는데, 우리 자신이 역사적 맥락이기 때문이었다. 성서는 곧 우리의 현재였고, 우리 가족의 종교 생활 속에서 그런 방식으로 다루어졌다. 매주 안식일이면 우리의 식탁에서는 천지창조가 다시 일어났고, 우리는 일곱째 날에 휴식을 취하신 하느님과 관련된 히브리어 성서의 구절들로 찬양을 드리고, 많은 것이 조화를 누리게 하신 하나님의 창조력에 관한 중세 히브리어 장시들을 낭송했다. 유월절이면 여전히 자유를 향해 탈출하느라 빵을 부풀릴 여유가 없었던 우리는 수천 년 동안 먹어온 똑같은 무교병을 먹었다. 새해 첫날마다 아브라함은 한번 더 아들 이삭의 목에 칼을 겨누고 우리의 미래를 인질로 잡았고, 우리를 붙잡은 그 손아귀에는 운명과 자유의지가 이중나선 구조로 한데 얽혀 있었다. 17~18쪽. (‘사람들은 죽은 유대인을 사랑한다’ 본문에서)
새로운 친구, 쥬빌리아카데미
김근주읽기를 마치고 곧이어 ‘쥬빌리아카데미’에 참여했습니다. 『숲에서 우주를 보다』를 함께 읽었는데요. 이 책은 생물학과 생태학자인 데이비드 조지 해스컬이 1세제곱미터의 숲에서 일 년 동안 관찰한 사색 일기입니다. 그는 자신이 들여다본 숲을 우주를 담은 ‘만다라’로 표현했습니다. “꽃은 진화 과정에서 적응에 적응을 거듭하여 다양성과 통일성 사이의 긴장, 개성과 전통 사이의 긴장을 만들어낸다”는 저자의 말에서 저는 개성과 다양성이 어울어진 함께 읽기 공동체를 떠올렸습니다. 김근주읽기의 인연이 쥬빌리아카데미로 이어졌고, 함께 읽기 공동체를 통해 저는 서로의 고유한 색깔과 향기가 조화와 균형을 이루는 작은 만다라를 경험했습니다.
해스컬은 “자연을 연구하는 사람은 미추의 판단을 넘어서야 한다” 말합니다. 저는 이 말이 하나님이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고 심중을 보신다는 말씀과 맥이 닿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모든 존재를 대하는 우리의 입장도 이러해야겠지요. 성서의 몇몇 구절을 뽑아 누군가를 혐오하고 차별하는 손가락질은 이제 멈춰야 합니다. 신이 창조한 존재를 혐오하고 농락하는 것은 곧 창조주 하나님을 능멸하는 행위와 다를바 없습니다.
"우리 개신교 안에도 제국의 어두운 신앙관이"
편협한 신앙관에서 벗어나길
이제 천편일률적인 서구기독교 신앙관에서 탈피가 필요합니다. 서구기독교뿐만 아니라 동방기독교 등 기독교 안에는 여러 스펙트럼이 있고, 다양한 담론이 존재합니다. 입체적이고 융합적인 공부를 하려면 먼저 열린 마음이 필요합니다. 편협한 신앙관에서 과감하게 벗어나면 좋겠습니다. 한국 개신교 안에는 서구기독교의 어두운 제국의 역사의 그늘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라도프스키의 연대기는 1944년 3월 8일 밤 한꺼번에 대규모 ‘수송’되어 학살당한 체코계 유대인 5000명의 충격적인 살해 현장 속으로 우리를 한 걸음 한 걸음 이끌고 간다. " 41쪽. "5000명의 사람들이, 5000개의 세계가 불꽃에 먹혀버리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그라도프스키는 시적이라기보다는 예언적이었다. 그는 이렇게 쓴다. ‘이 불은 오래전 세상의 야만인들과 살인자들이 붙인 것이다.’ 그들은 빛으로 자신들의 야만적인 삶에서 어둠을 몰아내고 싶어했다.” 42쪽. (‘사람들은 죽은 유대인을 사랑한다’ 본문에서)
저는 이 서사를 읽으며 서구기독교 제국의 잔혹한 역사를 목격했습니다. 기독교인이 그토록 사랑하는 아브라함, 그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기독교 제국이 살해한 것 같아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습니다. 감정이 복받쳐 옷을 찢고 재를 뒤집어 쓰는 심정이었습니다. 기독교가 지구상 가장 잔인한 종교가 될 수 있는 현장을 읽어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홀로코스트, 제노사이드. 악은 절대로 평범해서는 안 되고, 평범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 시대의 ‘욥’
21세기 한국 개신교는 지금 누구를 그토록 혐오하고 제거하고 싶은 걸까요. 기독교가 생각할 소수성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여성과 제국이 양립할 수 없듯이 기독교와 제국은 양립할 수 없으며, 기독교는 절대로 기득권이 될 수 없음을 생각합니다. 유대교와 더불어 기독교는 태생적으로 소수의 자리에 있을 수 밖에 없고 하나님의 원래 계획도 이 자리에서 시작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복음과 부활 신앙은 까닭 없이(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주어진 것으로) 짓밟히고 버림받는 것 같은 삶을 사는, 이 땅에서 고난받고 핍박받는 사람들인 성소수자, 장애인, 가난하고 약한 사람을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소외되고 차별받는 이들이 우리 시대 ‘욥’과 같은 존재입니다. 십자가 죄사함은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
거룩함의 회복
기독교는 신비의 종교입니다. 거대한 우주가 생성되기도 전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티끌과도 같은 사람의 인생 속에 찾아오셨습니다. 그 자체가 기적이고 신비입니다. 기독교가 오늘날 잔인한 종교가 된 것은 성서 속 자연과 신비를 제거했기 때문입니다.
수천 년, 수백만 년 전, 태고의 원형과 신비를 그대로 간직한 채 우리와 함께 지금 여기를 살아가는 자연이 없어진다면, 창조의 시간 속으로 함께 돌아갈 수도 없을 것이고 살아 숨 쉬는 땅이 없어진다면 죽음 이후의 생명의 땅으로 돌아가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성서 속 자연과 신비가 사라진다면 하나님의 거룩한 땅, 그 땅에 깃든 자연의 깊고 깊은 생명력도 사라질 것입니다. 오늘의 기독교가 회복할 거룩함이 무엇인지 생각해야 합니다.
김근주읽기에 제안해요
기독교의 순수성을 회복하는 일에 김근주읽기가 동참했으면 좋겠습니다. 은유 작가는 “순수성은 순수하지 않을 것을 볼 수 있어야” (『우리는 순수한 것을 생각했다』 ITTA, 2023) 한다고 말합니다. 기독교는 좀처럼 낯설고 어두운 면을 보지 않으려는 것 같습니다. 조금이라도 거슬리면 피하거나 마치 없는 듯 지나치려 합니다.
저는 기독교에 강력한 도전장을 던지는 여러 담론을 회피할 게 아니라 안전한 자리에서 배워보고 싶습니다. 니체, 반기독교 철학, 페미니즘처럼 다소 불편한 생각과 이야기도 함께 읽고 나누면 좋겠습니다. 또 이집트,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 문명 등 고대문명과 역사에 관한 책도 함께 읽고 싶습니다. 성서 해석학에 관한 책도 함께 읽고 싶습니다. 그리고 구약 성서 관련 책뿐만 아니라 신약 성서와 관련한 책도 나누고 싶습니다. 아, 제가 너무 욕심이 앞서나 봅니다.
"저 한 잎에 모든 비밀과 신비가 다 기록되어 있다."
이종목 벗님의 드로잉 일기
쥬빌리아카데미 챌린지 『숲에서 우주를 보다』 함께 읽기를 하면서 숲속 친구들이 생겼습니다. 김근주읽기 레터에 엉뚱한 이야기를 하는 것 같지만, 잊지 못할 경험이라 모두와 공유하고 싶습니다.
이종목 벗님(일산은혜교회 장로님)께서 2011년 8월 31일 그린 나뭇잎 드로잉을 전하며 이런 글귀를 적었습니다. “이 잎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 이 노회한 잎에서 신성(神性)을 본다. 나뭇잎 하나에서 유한과 무한의 통로를 본다. 저 한 잎에 모든 비밀과 신비가 기록되어 있다” 어쩌면 우리들의 만남은 예정되어 있었고, 투명한 잎새의 빨려 들어갈 듯한 소용돌이의 동그라미 안에서, 우리는 영원의 눈으로 서로를 볼 수도 있을지 모릅니다. 수천 년 전 시간으로 돌아가 밤하늘의 뭇별이 되어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아브라함을 만났던 바로 그때의 우리처럼요. 하나님이 허락하신 생명의 세계 속에서 영원을 간직하고 소망하며 살아가는 한 사람 한 사람이길 기도합니다.
댓글 2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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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미경
이지연님 감사합니다.🩷 서평해 주신 책들을 기회가 된다면 꼭 읽어보고 싶습니다! 무한애정이 느껴지는 글을 보면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부드러운 손길을 느껴봅니다. 이종목장로님의 회전하는 잎 그림은 저 역시 계속 머릿속에 떠오르더라구요^^ 역시 통했어요☺️김근주읽기, 쥬빌리아카데미 넘치게 사랑해 주는 이지연님 최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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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수
2회에 걸친 귀한 글 감사합니다. ^^ 김근주 읽기를 통해서 나그네에 대한 환대를 배우고 난 다음, 낯섬에 대한 환대에 대해서 저 역시 고민하게 됩니다. 나와 다름을 인정하는 부분에서 시작해서, 일상에서 내가 원하는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방향) 방향으로 진행되지 않는 상황에 낯섬에 대해서도 환대함으로 그 상황을 받아들여야겠다고 다짐하고 있습니다. 저는 ”숲에서 우주를 보다“를 보면서 다윈의 종의 기원,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 등이 읽고 싶어졌습니다. 벽돌책들이라서 엄두가 안 나기는 하지만, 기독교에서는 금서처럼 되어 있는 책들인데, 이분들의 생각 역시 낯섬에 대한 환대로 받아들이면서 즐겁게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김근주 읽기, 쥬빌리로 이어진 인연들이 더욱 더 확장되며, 진화하길 기대해 봅니다. 귀한 나눔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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