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285

운인 것 같지만 섭리

2024.03.01 | 조회 1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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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우쟁

파리로 떠난 우정의 일기를 메일로 보내드립니다.

공짜 피자

바다 수영을 마치고 탄수화물을 섭취하고자 피자 맛집을 찾았다. 이탈리아 피자를 못 먹어봐서 그런가 상당히 맛있었다. 한창 먹고 있던 중 갑자기 우두두 머리 위로 잿가루 날벼락을 맞았다. 이게 뭔 난리인가 어쩔 줄 모르고 당황하자 직원이 다가왔다. 길고양이가 천장에서 뛰어서 그런 거란다. 

어깨 위의 재를 살짝 털어냈을 뿐인데 옷에 검은 얼룩이 생겼다. 그정도로 심각했다. 당연히 피자는 더이상 먹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직원은 미안하게 됐다며 피자 한 판을 다시 만들어주겠다고 했다. 이미 반이나 먹어서 배가 불렀다. 사양하지 않고 포장으로 달라고 했다. 멀쩡한 피자 한 판을 호스텔로 가져가 다음날까지 두고 두고 먹었다. 웬 떡이얌!

ㅈㅁㅌ
ㅈㅁㅌ

 

브라보, 브루노

처음 이론 시험을 치르던 날, 센터에는 한 오지랍 넓은 아저씨가 있었다. 이름은 브루노. 그는 60점짜리 시험지를 들고 끙끙거리는 내가 안타까웠는지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다가 한국어 가이드를 제공받을 수 있게 도와줬다. (아니, 담당 강사였던 크라우스는 왜 진작 안 줬지? 허참!) 번역본을 참고한 덕분에 내용을 빠르게 숙지하고, 사전 찾는 수고를 덜 수 있었다.

며칠 후 주말, 재시험을 보기 위해 센터를 찾았다. 또 브루노 아저씨가 소파에 앉아 있었다. 시험 문제를 받고 열심히 푸는 사이에 크라우스 강사는 또 자리를 비웠다... 언제 돌아올지도 모른 채 한참을 기다리는데, 옆에 있던 부르노 아저씨가 또 오지랍 넓게 ”내가 채점해 줘?“라고 물었다. ‘이 아저씨는 뭐하는 사람이지?‘ 시험 결과는 86점, 객관식에서 만점을 받자 아저씨는 진심으로 축하해줬다. 

이론 시험을 통과하자마자 곧바로 카운터 직원에게 AIDA3 강습을 신청했다. 시간이 넉넉치 않은 관계로 당장 내일부터 시작하고 싶었다. 걱정했던 대로 당장 빈 강사가 없다는 답이 돌아왔다. 그때 옆에서 커피를 내리던 브루노 아저씨, 또 한 마디 건넸다. “나 스케쥴 되는데?” 속으로 '브라보!'를 외쳤다. 상황은 이랬다. 그는 휴가 중이라 심심할 때마다 센터에 상주했던 것이고, 복귀를 며칠 앞당긴 것이다. “휴가 기간 끝나고 맡은 첫 강습이야. 잘 해보자.” 

센터 안
센터 안

 

인복 몰아쓰는 중

다합에서 보내는 둘째 주가 시작됐다. AIDA3 단계는 더 쉴틈이 없었다. 오전 9시에는 바다 수영을, 오후 4시에는 수영장 훈련을 받았다. 그리고 그 중간 시간은 브루노 아저씨가 소개해주는 맛집에서 같이 점심을 먹고, 강의실로 자리를 옮겨 이론 수업을 받았다. 아저씨는 나를 보스라고 불렀다. 내가 원하는 대로 혹은 내 컨디션에 맞게 강습 일정을 조율해 줬으며, 4일 차에는 추가로 바다(오픈워터) 수영도 나가줬다. 

AIDA3 pool 레벨 취득
AIDA3 pool 레벨 취득

AIDA3는 이전 레벨과 다르게 한국어 번역본도 없고, 내용이 훨씬 복잡하고 많았다. 브루노 아저씨는 그 어려운 걸 칠판에 그림까지 그려가면서 설명했다. 똑같은 질문을 여러 번 해도 꾹 참아주고, 한 챕터가 끝날 때마다 내가 잘 이해했는지 확인하면서 열정을 다해 가르쳤다. 그게 너무 고마워서 (미안해서) 더 열심히 공부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까지 했는데 또 낮은 점수를 받으면 안 되지…

보통 말이 없는 편이라고…
보통 말이 없는 편이라고…

“오늘 오후에 그냥 봐! 넌 할 수 있어!” 시간이 지나면 또 까먹을까봐 걱정된 것일까, 아니면 다합에서 공부만 하는 내가 안타까웠던 것일까, 시험을 예상했던 것보다 일찍 치르게 됐다. 아직 준비가 덜 되었지만 자습시간 1시간을 갖고 바로 펜을 들었다. 최종 점수는 86점. 커트라인 75점을 여유롭게 넘겼다. 통과다. 브라보.

Open water requirements 칸만 비어 있음.
Open water requirements 칸만 비어 있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자격증 취득에 필요한 조건인 24m 잠수에 실패하고 말았다. 'AIDA3' 명칭 뒤에 'pool'이 붙은 이유다. 브루노 아저씨는 "도대체 클라우스랑은 어떻게 그렇게 깊게 잠수한거야? 나랑은 한 번도 못 내려가더니."라고 투덜댔다. "아니 나도 내가 그렇게 깊게 들어갔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아..." 분명 지난 주까지만 해도 20m를 수월하게 내려갔는데, 이번에는 이퀄라이징이 좀처럼 되지 않았다. 수면에 올라왔을 때 귀에서 '피용 피용 피요옹'하고 압력이 빠지는 소리까지 나는 걸 보아 분명 귀에 문제가 생긴 것 같았다. 

누군가는 숨 참기 기준(static apnea 2분 45초)을 맞추지 못 하고, 누군가는 긴 거리를 한 숨에 수영하는 기준(dinamic apnea 55m)을 통과하지 못 해 자격증 취득에 실패한다. 이럴 경우 1년 안으로 부족한 것만 다시 시도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나는 브루노 아저씨에게 1년 안으로 다시 다합에 와서, 24m 수영하는 걸 보여드리겠다고 약속했다. 

 

이렇게 빡센 여행은 또 처음

살이 빠져서 그런가 요즘 내 몸이 내 몸 같지 않다. 다른 사람의 몸을 빌려 쓰고 있는 느낌이다. 10kg나 빠진 몸으로 매일 바다 수영을 2회, 요가를 1회 하고 있으니 일정을 마치고 호스텔로 걸어가는 것 조차 힘들었다. 예전보다 식욕도 확연히 줄었다. 작은 도시락통을 하나 챙겨왔는데, 한 끼를 다 먹지 못 해서 늘 남은 음식을 포장해 가져갔다가 다음 끼니로 먹었다. 

한편 자유 시간이 생기면 책을 읽고자 바다 옆 카페를 기웃거렸다. 오늘 간 곳은 everyday old cafe, 매일이 늙은 거라나 뭐라나… 하는 카페였다. 늙음을 인정하고 나면 편하지 아무렴. 이집트의 뜨거운 햇살을 쬐며, 챙겨온 책을 펼치면… 10분 만에 졸음이 쏟아졌다. 거리의 길고양이와 강아지들 처럼 널부러 자다가 다시 일어나 책을 읽었다. 몸이 피곤한 만큼 낮잠은 달콤했다.

센터 밖
센터 밖

 

파리에서 어쩌다 이집트까지…

파리와 이집트의 시차는 겨우 1시간. 그럼에도 고래와 자주 연락을 하지 못 했다. 매번 와이파이를 찾기 어려웠고, 저녁 9시만 되면 몸에서 하품시계가 울려왔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폭우로 인해 있던 와이파이 마저 죄다 고장나버려서 한동안 아날로그 일상을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고래가 진지하게 물었다. "왜 굳이 이집트까지 가서 다이빙을 하는 거야? 자격증을 따서 강사 할거야?” 강사가 되고 싶은 생각은 없다. 자격증이 커리어의 수단은 아니라고 답했다. 그는 ESTJ답게 되물었다. “그럼 대체 왜 해?” 나에게는 너무 당연하고 명확한 이유가 있었다. 재밌으니까. 이걸 몰라서 묻나 싶었다. ENFP는 재미를 위해선 뭐든 할 수 있다. (나만 그런가) 힘들게 딴 자격증이 아무 쓸모 없어도, 이게 사는 재미지. 

궁합이래
궁합이래

‘재미’만 있으면 뭐든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재미’만 쫓기엔 현실적으로 한계가 있다. 이집트까지 올 수 있게 된 건 어쩌면 ‘우연’이었다. 다합 여행하기 좋은 2월에 2주나 방학을 해서 시간적 여유가 있었고, 마침 이집트로 가는 왕복 비행기표가 30만 원이었고, 2주 숙박비는 10만 원밖에 하지 않는다고 하니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이집트 뿐 아니라 내 파리 삶 전체를 통틀어 하나부터 열까지 계획대로 된 건 없었다. 모두 우연히 찾아왔다. 열심히 계획을 세워도 어딘가 빈틈이 있고, 완벽한 계획이더라도 내 뜻대로 세상은 돌아가지 않으니까 최소한의 목표만 설정하고, 내가 할 수 있는 최선까지만 노력했던 것 같다. 

예기치 못 한 순간 어떤 일이 발생하고, 어떤 인연을 만나고, 어떤 사실들을 깨닫게 되는 건 ‘우연’일까? 엄마는 이게 다 ‘섭리’라고 말했다. 간혹 아무도 없는 교회에 들어가 차가운 나무 의자에 앉아, 어두운 내부로 비추는 햇살을 맞으면서 기도를 드렸다. 낯선 공간에서 십자가 앞에 앉아 현재에 존재하는 나를 감각했다. 비록 먼지 만도 못 한 존재지만, 그 안에 아주 작게나마 신앙이 있다는 사실을 고백했다.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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