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ver ending studies

빨간 약을 먹으면

이상한 나라에 남아 토끼굴이 얼마나 깊은지 보여주지

2026.05.28 | 조회 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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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학 커리큘럼의 첫 수업, '장애와 불평등(Disability and Inequality)'이 드디어 종강했다. 그토록 하고 싶던 공부를 할 수 있게 됐다는 기대와, 과연 잘 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 속에서, 짧고도 강렬한 석 달을 보냈다. 

안락한 비장애 중심주의적 사고를 거부하고, 고통을 마주하는 선택
안락한 비장애 중심주의적 사고를 거부하고, 고통을 마주하는 선택

한 가지 드리고 싶은 말씀은, 당신이 원격으로 공부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 프로그램은 영국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리즈대학교는 영국의 장애학 운동과 발전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왔고, 현재도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장애학을 공부하는 당신은 사회학 및 사회적책학부 소속입니다. 이곳에는 영국에서 가장 오래된 장애학 연구센터가 있습니다.) 이로 인해 우리는 영국의 역사적 맥락에서 장애학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우리 학부는 탈식민주의를 추구합니다. 탈식민주의는 장애학의 중요한 주제이기도 합니다. 당신이 지적한 것처럼, 장애학은 상당 부분 서구 중심적인 경향을 보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는 학문 전반에 존재하는 편향을 반영하기도 합니다. 영문 학술지가 많이 인용되기 때문에 전 세계 학자들이 영어로 연구를 발표해야 한다는 구조적 현실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One point I will make is that although you are studying remotely this programme is based in the UK and the University of Leeds has a particular relationship to the UK movement and role in the development of disability studies in the UK (the School of Sociology and Social Policy which is the School you are connected to in the University is home to the oldest disability studies research centre in the UK) so we do speak to our history in this way. That being said we also have a decolonial specialism in the School and this is also a priority of the programme. You are right that a lot of disability studies is western-centric in its focus. This also reflects biases in the general academic landscape (for example English-language academic journals are the most cited and so academics globally are pressured to publish in English).  

클라우디아 교수님

교수님(모피어스)은 파란 약과 빨간 약을 보여주며, 파란 약을 먹으면 내가 믿고 싶은 걸 믿게 되고, 빨간 약(장애학)을 먹으면 끝까지 가게 된다고 말했다. 다시 말해서, 장애학을 처음 시작하는 내게, 세계의 장애인 불평등과, 그 구조적 원인과, 해결 방법을 찾기 위한 학계의 노력을 보여줬다. 약 효과는 생각보다 셌다. 비장애인으로서 익숙했던 세계가 낯설어졌다. 개인적인 차원에 머물던 나의 관점이 점차 세계로 확장되는 것 같았고, 한국의 장애인 불평등 문제도 보다 구조적으로,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뿐 아니라 나는 점점 파란 약을 먹은 사람들 사이에서 이방인이 되어가고 있다. 그렇다고 사람들에게 빨간 약을 먹어야 한다고 설득하는, 일종의 '장애인식개선'이나 '연대 구축'과 같은 거창한 목표는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기에 나는 아직 장애를 잘 모른다. 장애를 아는 일은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이해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기에, 내가 할 수도 없다. 다만 '무엇이 장애로 정의되는가'를 둘러싼 권력 관계를 이해하는 게 나의 현실적인 목표다. 그 과정에서 배제되는 사람들을 발견하고, 운동의 명분과 언어를 함께 만들어가고 싶다. 빨간 약, 분명 선택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믿는다.

To those seeking to live their lives in a more conscious way—through an understanding of the environments they inhabit, its effects on themselves, their actions, and the ways in which they relate to others and organise society—the red pill is recommended.

지그문트 바우만의 Thinking sociologically에서 살짝 수정


 

100점 만점에 57점 👏

 

장애학이 무엇을 공부하는 학문인지 어느 정도 파악했다고 해서, 성적이 잘 나오는 건 아니었다. "This is a very interesting paper. Your paper does not really discuss disability inequality in depth, however." 클라우디아 교수님의 피드백에 따르면, 나는 흥미로운 접근을 하는 데 성공했지만, 불평등을 만들어내는 구조를 설명하는 데는 실패했다. 

앞으로가 걱정이군
앞으로가 걱정이군

 

도대체 뭐라고 썼길래 이 점수를 받았나?

 

2999자로 '3000자 미만'에 딱 맞게 작성한 내 과제는 한 마디로 완벽해 보였다. 최근 방영된 '내 마음은 몽글몽글'을 사례로 삼아, 장애인의 연애(intimacy)가 미디어에서 어떻게 재현되는지, 그 재현 방식이 어떤 의미와 이미지를 재생산하거나 강화하는지를 분석하면서 자화자찬했다. 단순히 이 프로그램의 좋고 나쁨을 평가하려는 것이 아니라, 프로그램을 구성하고 있는 설정 요소들을 작은 단위로 나누어 각각 대중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궁극적으로 어떤 불평등을 만드는지 살펴보고자 했다. 

 

첫째, 출연자 섭외의 문제 - 이 프로그램의 출연자들은 화려한 스펙을 갖췄다. 기본적으로 직업은 필수고, 승마 같은 고급 취미를 가졌으며, 세 명의 출연자 중 두 명은 꽤 유명한 유튜버다. 비장애인 리얼리티 연애프로그램에 의사, 변호사가 섭외되는 것처럼 이 프로그램도 능력주의적 특성을 그대로 따른다. 그 결과 '탈시설', '빈곤', '고독'과 같은 발달장애인의 일상적 어려움은 보이지 않는다. 대신 기존에 존재하던 '순수하고 솔직한 이미지'가 강화되고, 발달장애인 개인의 노력과 성공으로 설명되는 '대단한 장애인'이라는 해석이 붙는다. 

출연자는 정작 본인의 소개팅 자리에서 자신의 장애 유형을 소개하지 않는다.
출연자는 정작 본인의 소개팅 자리에서 자신의 장애 유형을 소개하지 않는다.

소소한소통에서 일하면서 출연자들을 실제로 만난 적이 있다. 그들이 얼마나 매력적인 사람들인지 잘 알고 있기에, 제작진의 섭외 이유도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러나 아쉬운 점은, 출연자들이 자신의 매력을 드러내기도 전에, 오프닝에서 ‘장애 유형’으로 먼저 분류되고, 직업으로 소개되고, 호스트(이효리, 이상순)의 발화를 통해 그들의 매력이 설명되었다는 점이다. 이 방식은 오히려 그들의 매력이 축소되어 보이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 같았다.

 

둘째, 출연자의 데이트에 개입하는 연출 방식의 문제 - 제작 PD는 발달장애인 가족구성원으로서 발달장애인의 연애를 지지, 응원하려는 의도로 이 프로그램을 만들었다고 밝혔다. 그러나 그는 종종 카메라 앵글 안으로 들어가 상황을 통제했다. 예컨데 출연자들이 기차를 잘못 타려 할 때나 갈등 상황에 놓였을 때 제작진이 개입하는 장면이 나온다. 비장애인 출연자의 데이트였다면 개입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사실 누구나 한 번쯤 떨리고 두근거리는 마음에 데이트 도중 길을 잃는다. 그럼 주변 사람에게 물어 도움을 받으면 될 일이다. 또한, 거리에서 지지고 볶고 싸우는 커플들은 흔하다. (영수와 순자가 싸운다고 나는솔로 제작진이 달래주지 않듯) 제작진의 개입으로 인해 장애인의 데이트가 도움 또는 중재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증명했다. '제작진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출연자의 데이트는 실패했을 것'처럼, '제작진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관계 갈등을 해결하지 못하고 소개팅이 끝나버렸을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첨부 이미지

내심 발달장애인 연애 프로그램이 만들어진다고 해서 기대가 컸던 것 같다. 정상적이라고 여겨지는 데이트의 기준을 깨주길 바랐으나, 익숙하고 안전한 형식을 고수한 것 같아 아쉽다. 이를 테면 장대비가 내리던 날, 가려고 했던 레스토랑은 갑자기 문을 닫아서, 결국 떡볶이 맛집을 갔는데, 너무 매워서 땀이 흘러 메이크업이 다 지워지는, 그런 엉망진창인 소개팅에서 피어나는 사랑같은 것. (실제로 내가 했던 소개팅이다.) 애써 고르고 고른 소개팅보다 아무 기대 없이 우연히 하게 된 소개팅에서 보석같은 인연을 만나기도 하듯이, 나는 이 프로그램이 기존 연애 프로그램이 보여주지 않는 소소하지만 아름다운 소개팅을, 연애 방식을 상상하게 해주길 바랐다.

 

셋째, 출연자를 교육의 대상으로 만드는 콘셉트의 문제 - 알록달록하고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몽글몽글 상담소'는 교육을 받는 학교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데, 이 공간에서 발달장애인 출연자들은 수업을 듣고 상담을 받으며 학습과 훈련을 통해 성장하는 존재로 그려진다. 실제로 2화에서는 이효리의 요가 수업을 비롯해 다양한 학습이 진행되고, 이어지는 마지막 3화에서는 장애인 교육 전문가들이 다수 등장해 출연자들에게 관계 맺는 방식을 교육하는 장면이 연출된다. 프로그램의 슬로건인 '마음껏 도전하고, 마음껏 실패하고, 마음껏 사랑하라'에 따라 사랑에 도전하고 실패하는 경험만을 보여줄 수도 있었을텐데, 발달장애인의 '사랑'을 교육해야 할 대상으로 보여주고 있다. 

  칠판 앞에 선 선생님? 다른 리얼리티 연애 프로그램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앵글이다. 
  칠판 앞에 선 선생님? 다른 리얼리티 연애 프로그램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앵글이다. 

 

넷째, 출연자와 호스트 사이의 위계 문제 - 교육을 강조하는 설정 속에서, 상담사는 비장애인이고 상담소를 방문한 사람은 장애인으로 고정된다. 발달장애인 당사자가 상담해준다면 어땠을까. 연애 경험이 있는 발달장애인, 혹은 연애 경험이 없더라도 누군가 당사자로 나와서 공감과 해석을 바탕으로 함께 이야기 나눌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러나 이러한 가능성은 배제되고, 상담과 해석의 권한은 비장애인에게 집중시켰다. 이런 위계 설정은 편견을 반영하고, 또 이를 강화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추가로, 해외 사례와 비교하기 - 해외에는 이미 발달장애인 연애 리얼리티 프로그램이 다수 존재한다. 2019년 호주에서 처음 방송된 '러브온더스펙트럼 Love on the spetrum'이 대표적이다. 이 프로그램은 미국 버전으로도 제작되어, 현재 시즌4까지 방영되었고, 시즌5이 제작중이다. 당사자들의 설레는 첫 만남부터 같이 사는 집을 구하는 일까지, 연애 서사의 일대기를 기록하고 있어 개인적으로 재미있게 보고 있는 프로그램이다. 이러한 해외 프로그램과 한국 프로그램을 나란히 두고 비교해보면 분명한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무엇이 더 바람직한 재현 방식인지 평가하는 일은 시청자의 몫이리라. 단지 분석하는 과정에서 각 국가가 가진 문화적 배경과 사회적 맥락을 파악할 수 있어서 그 자체로 흥미로웠다.

첨부 이미지

 

분석한 내용을 토대로 능력주의, 헤게모니, 교차성 등 수업에서 배운 개념(concept)을 연관시키려 노력했다. 그러나 그 개념들이 불평등 구조까지 분석하지는 못했다. 정리하면, '몽글상담소' 프로그램에서 발견한 요소들을, 한국 사회의 미디어 구조로 확장시켜서, 우리 사회가 어떠한 방식으로 차별을 유지하고 재생산하는지 설명해야만 했다. 그래서 '무엇이 불평등한 사회를 초래하는가?'하는 질문에 답을 제시해야 했다. 아직까지도 일기에 그 답을 쓸 수 없는 걸 보면 나는 장애 불평등이 왜 발생하는지 설명하지 못 한다. 

 

문서 파일을 열면 교수님의 댓글을 확인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 친해지고 싶은 클라우디아 교수님...❤️ 
문서 파일을 열면 교수님의 댓글을 확인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 친해지고 싶은 클라우디아 교수님...❤️ 

 

 

PASS만 하자

 

50점을 간신히 넘겨서 재수강을 면했으므로 참으로 다행인 일이다. 이것으로 앞으로 나의 목표는 PASS다. 51점이어도 좋으니 통과만 하자. 박사할 거 아니니까. 현재 푸코의 정치학 읽기 자료가 쏟아지고 있어 잠시 벗어나 프란시스 다이어리 쓰기에 심취했다. 진도에 한참 뒤쳐졌지만, 즐기기로 했다. 오늘 일기도 역시 무한 긍정 마무리. 멘탈 꽉 잡아!

 


 

번외. 그러니까 '장애학'은 말이다 

 

  • 사회학의 한 분야로 경제학, 정치학, 역사학, 심리학 등 다양한 학문을 넘나 들면서
  • 장애인의 불평등 문제를 사회 구조 속에서 분석하고,
  • 이를 설명하고 비판할 수 있는 학문적 근거(언어와 이론)을 구축해,
  • 사회적, 정치적 실천으로 연결하는 데까지 확장시키는 학문이다. ⭐

 

빨간 약 먹은 내 모습?
빨간 약 먹은 내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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