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일, 12시 조금 지난 시각, 나와 한기연 사람들은 어김없이 깃발을 들고 종로 4가역 앞에 모였다. 구치소에 계신 고진수 세종호텔 노조 지부장을 비롯해, 사회 곳곳에서 투쟁하고 계신 노동자들을 위해 예배를 드린 뒤, 우리는 광화문 광장으로 함께 걸었다. 바람이 거셀수록 깃발은 더욱 펄럭였고, 투쟁을 외치는 목소리도 더 크게 울려 퍼졌다. 오랜만에 만나는 사람들과 반갑게 투쟁가를 부른 뒤, 내가 속한 한기연 단체는 조금 이르게 해산했다. 어느 평범한 노동절의 하루였다.
그날의 기록

그대로 집에 돌아가기엔 뭔가 아쉬웠다. 날이 지나치게 화창했다. 광화문에서 서울시청 앞으로 걸어가, 그 앞에 놓인 빈백에 누워 책을 읽었다. 30분쯤 지났을까, 경찰과 휠체어 이용자들의 무리가 눈에 들어왔다. 조금 전까지 있었던 광화문 광장 앞 분위기와는 미묘하게 달랐다. 행진 속도는 확연하게 느렸고, 검은 옷을 입은 경찰들이 그들을 빽빽하게 둘러싸고 있었다. 그것이 차도로 나오는 걸 막기 위함인지, 차량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하기 위함인지 알 수 없었다. 평온한 듯 위태로워 보였다. 나는 읽던 책을 덮고 행진 뒤편에 합류했다. 그런데 방향이 이상했다. 불과 100m 앞에 있는 광화문 광장으로 향하지 않고, 좁은 길로 우회하고 있었다. 그 길 끝에는 경찰이 친 바리게이트가 기다리고 있었다. 경찰과 휠체어가 나란히 멈춰 섰다. 적막이 흘렀다. 이 틈을 타 사람들은 하나 둘씩 앉아 숨을 골랐다.
누군가 말했듯, 투쟁에는 희노애락이 다 담겨있다. 갑자기 행진을 이끌던 트럭에서 장기자랑을 시작하겠다는 안내가 흘러나왔다. 지쳐보이던 사람들이 몸을 일으켰다. "잔인한~여자라~" 어느 연대인이 티얼즈를 맛깔나게 부르자,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흥부자가 되어 춤을 췄다. 즐거움을 아는 이들이야말로 진정한 챔피언이리라. 나는 흥겨움을 애써 참아야했던 경찰들에게 위로의 시선을 보내고, 구석으로 물러나 담배를 물었다. 휠체어에 앉은 흡연자들과 함께, 어깨를 수줍게 들썩였다.
그러나 노래는 오래 가지 않았다. 스피커에서 나오던 노래가 "경찰들은 문을 열어라! 우리도 행진할 권리가 있다!"라는 외침으로 바뀌었다. 이윽고 몇몇 사람들이 바리게이트를 향해 돌진했고, 충돌이 발생했다. 무장한 경찰들 사이에서 누군가는 다칠 것 같았다. 특히 휠체어로 바리게이트를 밀어내는 모습은 처절했다. 하지만 처절함을 느낀 것은 나 혼자뿐인 듯했다. 누구도 놀란 기색이 없었다. 구호를 외치는 연대와 몸을 맞대어 충돌하는 연대는 분명 차원이 다른 일이었다. 쿵쾅대는 가슴을 쓸어 내리면서, 애써 태연한 얼굴로 자리를 지켰다. 내가 몸을 사리는 사이 바리게이트가 열렸다. 우리는 마침내 광화문 대로로 들어섰고, 그곳에서 다른 연대인들을 만날 수 있었다. 이날 광장에는 8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였다고 한다. 언론노조, 건설노조, 서비스노조, 간호노조, 교육노조를 비롯해 시민, 종교, 사회, 정치단체 등 수많은 단체들이 우리 앞을 지나갔다. 서로에게 손을 흔들고, 투쟁 구호를 외쳤다. 저마다 구호는 달랐지만, 사람답게 일하고 싶다는 요구는 똑같았다. 저마다 자신의 노동을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들이었다.
나는 우리 무리가 그 긴 행진의 마지막 순서로, 그들을 뒤따를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우리는 움직이지 않았다. 할 수 없었던 것인지, 하지 않은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순간 한 휠체어 이용자가 무리 안에서 중앙차도로 튀어 나갔다. 휠체어가 이렇게 빠르게 이동할 수 있는 건지 처음 알았다. 지나가려던 빨간 버스가 그 앞에 멈춰섰다. 흡사 경찰이 세워둔 바리게이트처럼 검은 휠체어는 버스만큼 거대해 보였다. 곧이어 활동가가 마이크를 들고 소리쳤다. "안녕하세요 시민 여러분, 잠시 불편하시겠지만 저희는 지금 장애인이 타지 못하는 광역버스 앞에 멈춰 서 있습니다. 여러분이 매일 이용하시는 공공버스를 우리 장애인도 누릴 수 있도록 이동권을 보장받고 싶습니다!"

어디선가 경찰의 답장이 흘러나왔다. "종로지검으로부터 권한을 받아 이행합니다. 여러분들은 0항 0조를 위반하고 계십니다. 채증하고 있으며, 도로 점거를 멈추지 않으면 체포합니다." 두 목소리가 시끄럽게 울려퍼지는 가운데, 나는 '이것도 노동이다'라는 대형 현수막 앞에 자리를 잡았다. 경찰이 우리를 둘러쌌다. 내 옆에는 휠체어를 탄 사람뿐 아니라 발달장애인들도 함께 서서 현수막을 잡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대부분 여성이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경찰들은 젊고 훤칠한 근육질의 몸을 하고 있었다. 거기에 두꺼운 갑옷과 검은 마스크까지 낀 채로 내 등을 밀었다. 나는 저항하지 않았다. 그저 방패가 미는 쪽으로 슬금슬금 밀렸다. 활짝 펴져 있던 현수막은 그대로 쪼그라졌다.

그렇게 거리 점거는 끝났다. 그곳에서 불편함을 느낀 시민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누군가는 인상을 찌푸리며 불편함을 호소할지 모른다. 또 다른 누군가는 '잠깐 불편해도 괜찮다'고, '장애인은 평생을 불편하게 살고 있지 않냐'며 조용히 응원의 마음을 보냈을 수도 있다. 팽팽한 긴장 속에서 그 자리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지친 나는 해단식까지 남지 못하고 집에 돌아왔다. 오는 길에 또 장애학 글을 읽으면서 생각했다. 꼬부랑 영어를 읽고 글을 쓰는 것만으로는 세상이 변하지 않겠구나 하는 생각. 휠체어를 끌고 광화문에 나가 도로를 점거하는 당사자들과, 그 곁에서 함께 싸우는 활동가들이 있기에 세상은 지금까지 조금씩 변해왔다는 사실. 어쩌면 장애학은 그들의 발자취가 헛되지 않도록 기록하는 일일지도, 그 뿐일지도 모르겠다.
장애인은 왜 이동권 투쟁을 할까?
1990년 7월 26일 내가 태어나기 직전, 미국에서 장애인 차별금지법 ADA(Americans with Disabilities Act)이 통과된다. 버스 앞에 눕고, 도로 점거하고, 휠체어로 길을 막으며 시민들의 불편을 의도적으로 유발한 노력 끝에 얻어낸 결과였다. 그후 5년 뒤, 영국에서도 Disability Discrimination Act가 제정된다.

이동권은 편의의 문제가 아니라 권리의 문제다.
내가 18살이 되던 해, 한국에서도 '장애인차별금지법'이 시행됐다. 이 법은 미국과 영국의 차별금지법과 다르게 ‘장애인’이라는 단어가 앞에 붙어서 불완전했다. 국가가 인정한 ‘등록된 장애인’만을 보호한다는 점에서 다시 배제와 차별을 허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법으로 인해 장애인은 이동권을 요구할 최소한의 근거를 획득했다.
문제는 법이 존재하더라도 현실에서 충분히 구현되지 않는 데 있다. 장애인차별금지법 제19조는 교통수단에서의 차별을 금지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장애인들은, 특히 경기도에 사는 장애인은 버스를 타고 이동할 수 없다. 따라서 이날의 거리 점거는 이미 존재하는 법적 권리가 지켜지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었다. 맨 앞줄에서 이끌던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시위는 법과 현실 사이의 간극을 드러내고, 보이지 않던 권리를 공공의 공간 위로 끌어올리는, 몸을 통한 정치적 실천이었다.
- 장애인차별금지법 제19조 – 이동 및 교통수단에서의 차별금지
- 장애인을 이유로 교통수단 이용을 제한하면 안 된다.
- 국가는 버스, 지하철, 택시 등에서 동등하게 이동할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
- 국가는 필요한 경우 장애인에게 편의를 제공할 의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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