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간 뉴스레터를 자주 보내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지금 학기말이자 연말이 되어 제가 시간에 쫓기며 살고 있어서 글 쓰는 시간을 내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요즈음 정형식 헌법재판관 후보자의 인사 청문회가 진행 중입니다. 아마도 대통령이 하는 일 중에 나라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일이 대법관이나 헌재 재판관의 임명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미국에서 50년 이상 지속된 낙태의 권리가 미 대법원에 의해 위헌 판결을 받은 것은 트럼프 대통령의 보수적 판사들의 임명의 결과라는 것을 보아도 대통령의 행정 권한의 행사는 대부분 그 영향이 제한적이고 단기적이지만 사법부를 어떻게 구성하느냐는 나라의 근간에 대한 판단을 한다는 점에서 장기적이고 근본적인 영향을 미치는 일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법부의 무책임한 판결들로 거대한 사회적 비용을 지불했다는 사실들도 법관들의 법 철학과 가치관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되었습니다. 국제법의 규범과 역사적 사실을 무시한 징용공 판결은 한일 관계를 파탄으로 몰고 갔고, 그것이 ‘사법 농단’의 수사와 재판을 통해 사법부의 권위를 크게 훼손해 왔습니다. 과연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 인용 판결이 헌정사에 어떻게 평가될 것인지도 보수 국민들은 회의적인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의미를 생각한다면 윤 대통령이 지극히 보수적인 정형식 후보자를 임명한 것은 정권 교체의 의미를 다시금 생각하게 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의 국회 인사청문회 답변 중에서 우리 사회에서 흔히 공직자 청문회에서 보이는 반 자유시장주의적 발언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는 차남에게 1억7천만원을 빌려주고 연 0.6%의 이율을 책정한 것을 두고 증여세를 절약하기 위한 “세테크”가 아닌가 하는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법률가 답게 자식에도 돈을 빌려주면서 융자 계약서를 쓰고 분명히 한 것은 후보자가 아마도 이러한 공직의 가능성을 늘 염두에 두고 살았거나 법률가로서의 정확성을 기했다고 보여집니다. 지금처럼 저출산과 고령화 추세에 지금처럼 자식들에게 재산을 물려주는 것에 대해 높은 세금을 추징하는 것이 맞느냐는 별개의 논의 사항입니다.
제가 주목하는 답변은 이것입니다. “제 아들처럼 부모에게 돈을 빌릴 수 있는 환경에 처하지 않은 국민이 많다는 것을 안다”며,“그런 사람들이 이런 내용을 접하고 상대적 박탈감에 젖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다”고 답변했습니다.
이것은 우리 사회에 고위 공직자들의 청문회에서 자주 등장하는 전형적인 답변에 속합니다. 돈이 많아서, 그리고 자식에게 남들보다 많이 지원해줘서 일반 국민들이 보면 박탈감을 느끼게 되고 그런 점에서 미안하다는 말입니다.
법조인들이 특히 고위직 판사나 검사를 그만두고 변호사를 하면서 큰 돈을 번다는 사실을 모르는 국민이 얼마나 될까요? 이 돈이 전관예우와 같은 사법부의 부패구조에 의한 부당한 소득이 아니라면 왜 사죄의 대상이 되어야 할까요? 부모가 열심히 일해서 자식을 위해 돈을 쓰는 것이 왜 미안한 감정을 갖고 해야 하는 일일까요?
그리고 성공적으로 산 사람들이 더 많은 부를 갖고 가족을 위해 더 많은 돈을 쓸 수 있다는 사실에 왜 국민들은 상대적 박탈감을 느낀다고 전제를 할까요? 이러한 사고의 근저에는 부를 나쁜 것으로 보는 반자본주의 가치관이 짙게 깔려 있습니다. 박탈감이란 박탈당했다는 감정의 준 말입니다. 박탈이란 남의 재물이나 권리, 자격 따위를 빼앗음을 뜻하는 말입니다. 지금 후보자는 우리 국민들은 부자들의 부가 자신의 재물을 빼앗아간 결과라고 생각한다고 인식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지극히 공산주의적 사고입니다. 부자들의 부가 착취의 결과라는 인식이지요. 우리가 열심히 일하는 것은 세금을 더 내기 위해서도 아니고 자신만 잘 살자고도 아닙니다. 가족은 경제 공동체이고 무조건적 사랑의 조직입니다. 그래서 자식에게 잘 먹이고, 잘 입히고, 더 좋은 교육을 시키려고 우리는 열심히 일을 합니다. 이는 본능적이기도 하고 부모로서 책임감 있는 훌륭한 일입니다. 가장의 책임을 무겁게 느끼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런데 자식에게 더 좋은 기회를 마련해 주는 것에 대해 국민들이 박탈감을 느끼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이야기할 까요?
상대적 박탈감이라는 위선적 수식어는 종종 ‘사회에 위화감을 조성한다’는 말로 대체되기도 합니다. 경제적으로 절대적 평등이 없는 사회는 조화롭지 않은 사회이고 잘못된 사회라는 표현입니다. 역시 평등한 사회가 정상이고, 경제적 부와 소득의 차이가 나는 사회는 비정상이라는 인식입니다. 그리고 국민들은 경제적으로 남들보다 풍요롭지 않으면 시기심으로 스스로 정신적 상처를 내는 자학적이고 성숙하지 못한 존재들이라는 생각이 깔려 있습니다.
국회의 인사청문회에서 평등 지상주의의 좌파적 야당의 공세를 피하기 위한 수사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부를 부끄러워하거나 가족을 위해 돈을 쓰는 일이 사회적으로 바람직하지 못한 일인 양 표현하는 대한민국의 지도자급들의 위선적 반자본주의적 표현은 퇴출해야 하지 않을까요?
부가 부끄러운 것이라면, 자식에게 많이 베푸는 것이 반 사회적인 것이라면 돈을 벌지 말았거나 청문회에 나서기 전에 돈을 버는 대로 사회에 기부를 했어야지요? 왜 자신이 지키지도 못하고, 믿지도 않는 가치관을 마치 믿고 사는 것처럼 솔직하지 못한 모습을 보입니까? 트럼프가 부자인 것을 부끄러워하는 적은 본적이 있나요?
정치인들의 서민 코스프레도 이제는 그만 두어야 합니다. 시장에 가서 떡볶기를 먹고 어묵을 사 먹으며 마치 자신들이 서민들처럼 살고 있는 것과 같은 쇼도 그만두어야 합니다. 모두 반 자본주의적인 정치인들의 광대놀음입니다. 그 시간에 경제가 활성화하려면 뭘 해야 하는지 전문가들과 함께 고민에 고민을 거듭 하는 것이 맞지요? 대통령, 국회의원이 골목시장 지나간다고 골목 시장 경기가 살아납니까?
우리가 걱정할 일은 이런 관행적인 국회답변과 정치인들의 서민 코스프레 속에는 반자본주의적 가치관이 전제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돈을 번 것이 자랑이 되는 사회가 정상인 사회입니다.
댓글 1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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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치보이
좋은 글 정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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