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임은 늘 있는데, 친구는 없다

인맥은 풍부하지만 진짜 관계는 줄어드는 역설

2025.09.02 | 조회 7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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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해 보이는 것들에, 다른 시선을 붙입니다.

지난 주말, 한 구독자로부터 이런 메시지를 받았다. "카톡방이 30개가 넘는데 정작 힘들 때 연락할 사람이 없어요. 이게 정상인가요?" 이 질문은 우리 시대의 가장 아이러니한 현상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연결은 풍부하지만 관계는 빈곤한, 모임은 많지만 친구는 없는 시대의 초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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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트워킹의 함정: 관계를 거래로 만드는 시대

현대인들이 구축하는 인맥의 대부분은 '도구적 관계'다. 특정 목적을 위해 형성되고 그 목적이 사라지면 자연스럽게 소멸하는 관계들이다. 직장에서의 팀 프로젝트, 육아맘 모임, 취미 동호회, 투자 스터디까지. 모든 만남에는 명확한 목적이 있고, 그 목적 하에서만 관계가 지속된다. 문제는 이런 관계들이 아무리 많아도 진정한 의미에서의 '친구'가 되지 못한다는 점이다.

사회학자 로버트 퍼트남(Robert Putnam)은 『볼링 얼론』에서 이를 '연결하는 사회자본(bonding social capital)'과 '연결짓는 사회자본(bridging social capital)'의 차이로 설명한다. 전자는 비슷한 배경의 사람들과 깊이 있는 관계를 맺는 것이고, 후자는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과 폭넓은 네트워크를 구성하는 것이다. 현대인들은 후자에만 집중하며 전자를 놓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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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네이티브의 관계 방정식

상황을 더욱 복잡하게 만드는 건 디지털 환경이다. 카카오톡 단체방 30개, 인스타그램 팔로워 1000명, 링크드인 연결 500명. 숫자상으로는 풍부한 관계망이지만, 정작 개인적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은 손에 꼽는다.

디지털 커뮤니케이션의 특성상 우리는 '편집된 자아'만을 보여준다. 인스타그램 스토리에는 행복한 순간들만 올라오고, 업무용 메시지에는 전문적인 모습만 드러난다. 이런 환경에서는 취약함을 드러내는 진정한 친밀감이 형성되기 어렵다.

젊은 세대일수록 이 현상은 더욱 두드러진다. 2023년 갤럽 조사에 따르면, 20-30대 한국인 중 "진정한 친구가 3명 이하"라고 답한 비율이 67%에 달한다. 이는 10년 전(45%)보다 20%포인트 상승한 수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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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의 경제학: 관계에도 기회비용이 있다

경제학적 관점에서 보면, 인간관계에도 기회비용이 존재한다. 한정된 시간과 에너지를 어디에 투자할 것인가의 문제다. 현대인들은 '넓고 얕은' 관계에 투자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고 판단한다.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을 알고 있으면 정보 접근성이 높아지고, 기회가 생겼을 때 도움을 받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착각이다. 취업 정보의 70%가 '약한 연결'을 통해 얻어진다는 연구 결과가 종종 오해받지만, 이것이 깊은 관계가 불필요하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몇 개의 강한 연결이 있어야 약한 연결들이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 핵심이다.

실제로 심리학 연구들은 일관되게 보여준다. 깊은 관계 3-5개가 있는 사람이 얕은 관계 100개가 있는 사람보다 삶의 만족도, 스트레스 대처 능력, 심지어 수명까지 모든 면에서 우월하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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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친구의 조건: 취약성과 지속성

그렇다면 진짜 친구란 무엇인가? 친밀한 관계의 핵심은 '자기 확장'과 '상호 취약성'이다. 자기 확장이란 상대방과의 관계를 통해 내가 더 넓은 세상을 경험하고,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단순히 정보를 주고받거나 같은 활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관점을 통해 세상을 새롭게 보게 되는 경험이다.

상호 취약성은 더욱 중요하다. 브레네 브라운(Brené Brown)은 『감히 크게 도전하라』에서 "취약성 없이는 진정한 연결이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우리가 완벽한 모습만 보여주는 한, 상대방도 완벽한 모습만 보여줄 것이고, 그 관계는 표면적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현대 사회의 구조는 이런 취약성을 드러내기 어렵게 만든다. 경쟁 사회에서 약함을 보이는 것은 위험하고, 개인주의 문화에서 타인에게 의존하는 것은 부담스럽다. 결국 우리는 안전한 거리를 유지하며 '적당한' 관계만을 맺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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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의 질을 높이는 3가지 전략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단순히 모임을 줄이고 소수의 사람과만 만나라는 것은 현실적이지 못하다. 대신 기존의 관계들을 더 깊게 만드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첫째, 의도적 깊이 추구다. 일상적 대화에서 한 단계 더 들어가는 질문을 던져보자. "요즘 어때?"가 아니라 "요즘 가장 고민되는 일이 뭐야?", "일은 잘 돼?"가 아니라 "일하면서 가장 의미를 느끼는 순간은 언제야?" 같은 식으로. 점진적으로 깊어지는 대화가 관계의 질을 바꾼다.

둘째, 정기적 일대일 만남이다. 단체 모임에서는 깊은 대화가 어렵다. 소음도 많고, 여러 사람의 관심을 끌어야 하며,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기 부담스럽다. 정말 가까워지고 싶은 사람과는 따로 만나는 시간을 만들어야 한다. 월 1회든, 분기별 1회든 일관성이 중요하다.

셋째, 도움 주고받기의 균형이다. 역설적이게도, 일방적으로 도움만 받거나 주기만 하는 관계는 깊어지지 않는다. 상호 의존성이 관계를 단단하게 만든다. 때로는 도움을 청하고, 때로는 적극적으로 도움을 제공하는 것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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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움이라는 공공의 적

이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전체의 과제다. 미국에서는 2023년 '외로움 담당 장관(Minister of Loneliness)'을 임명했고, 일본에서도 '고독·고립 대책담당 장관'이 있다. 외로움이 흡연만큼 건강에 해롭다는 연구 결과들이 나오면서, 이를 공중보건 문제로 접근하기 시작한 것이다.

WHO의 2023년 보고서에 따르면, 성인 4명 중 1명이 사회적 고립감을 경험하고 있으며, 이는 심장병 위험을 50%, 치매 위험을 30% 증가시킨다. 경제적 손실도 만만치 않다. 외로움으로 인한 의료비 지출과 생산성 저하로 미국 경제가 연간 1,540억 달러의 손실을 본다는 추산도 있다.

관계의 미래를 다시 생각하기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관계에 대한 관점의 전환이다. 네트워킹을 통한 효율성 추구에서 벗어나, 관계 자체가 주는 가치를 인정하는 것이다. 친구는 무언가를 얻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함께 있는 것 자체가 의미 있는 존재라는 것을 다시 깨달아야 한다.

앞서 언급한 독자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카톡방이 30개가 넘는데 정작 힘들 때 연락할 사람이 없다"는 것은 비정상이 아니다. 오히려 너무나 정상적인 현대인의 모습이다. 문제는 이것이 정상이라고 받아들이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변화는 작은 것에서 시작된다. 오늘 밤, 오랫동안 연락하지 못한 친구에게 안부 메시지를 보내보자. 단순한 "잘 지내?"가 아니라 "요즘 너를 생각하게 되는 일이 있었는데, 어떻게 지내고 있어?"라고. 그리고 상대방의 답변을 진심으로 들어보자. 그 작은 용기가 관계의 질을 바꾸고, 결국 우리 삶의 질을 바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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