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애들 정말 매너가 없어."
지하철에서 나이 든 승객 한 명이 중얼거린다. 젊은 직장인이 노약자석에 앉아 스마트폰을 보고 있고, 임산부가 서 있어도 모른 체한다. 한편 그 젊은 직장인도 속으로 생각한다. "하루 종일 일하고 지쳐서 죽겠는데, 왜 나만 양보해야 하지?"
이것이 2025년 한국의 일상 풍경이다. '예의'와 '배려'라는 단어가 점점 낡은 유물처럼 느껴지는 시대. 우리는 언제부터 이렇게 각박해진 걸까?
숫자로 보는 무례함의 확산
2024년 한국갤럽 조사에 따르면 "일상에서 예의 없는 사람이 늘었다"고 답한 비율이 78%에 달했다. 이는 2019년(65%) 대비 13%p 증가한 수치다.
더 충격적인 것은 직장 내 갑질 현황이다.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2023년 공공기관 갑질 신고 건수는 전년 대비 15% 증가했다. 민간 부문은 더 심각하다. 고용노동부가 집계한 직장 내 괴롭힘 신고 건수는 2019년 법 시행 이후 매년 20% 이상씩 증가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도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대다수 사람들은 신고조차 하지 못한 채 참고 있기 때문이다.
"갑"이 되기 위한 치열한 경쟁
경희대학교 사회학과 송재룡 교수는 한국의 갑질 문제에 대해 "단순히 갑질을 행한 개인의 도덕성이 문제가 아니라 개개인이 한국 사회의 갑과 을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 뿐"이라고 지적했다. 즉, 갑질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적 문제라는 것이다.
한국 사회의 독특한 특징 중 하나는 '갑을 관계'가 극도로 세분화되어 있다는 점이다. 같은 직장 내에서도:
- 부장 → 과장 → 대리 → 사원으로 이어지는 수직적 서열
- 정규직 → 무기계약직 → 계약직 → 파견직으로 나뉘는 고용 형태별 차등
- 대기업 → 중견기업 → 중소기업 → 소상공인으로 구분되는 사회적 지위
모든 사람이 동시에 '갑'이면서 '을'인 상황이다. 과장은 부장 앞에서는 '을'이지만, 대리 앞에서는 '갑'이 된다. 이런 복잡한 위계 구조 속에서 사람들은 끊임없이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고, '갑'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애쓴다.
예의의 경제학: 왜 배려가 사치가 되었나
시간 압박의 시대
현대인들의 하루 일과를 보자. 서울 직장인 기준으로:
- 출퇴근 시간: 평균 2시간 30분
- 실제 근무 시간: 9-10시간
- 야근, 회식 등: 주 2-3회
- 수면 시간: 평균 6시간 미만
여기에 자기계발, 부업, 육아까지 더해지면 개인적인 여유 시간은 거의 남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타인을 위한 '배려'는 사치처럼 느껴진다.
"지하철에서 자리 양보하는 것도 좋지만, 나도 하루 종일 서서 일했는데 왜 내가 또 서야 하지?" 라는 생각이 든다. 예의와 배려가 '여유가 있을 때나 할 수 있는 것'으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이다.
경쟁 사회의 부작용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경쟁이 치열한 사회 중 하나다:
- 대학 입시: 수능 상위 1% 안에 들어야 SKY 대학 진학 가능
- 취업: 대기업 입사 경쟁률 평균 100:1
- 승진: 같은 기수 중 임원까지 올라가는 비율 1-2%
- 부동산: 서울 아파트 평균 가격 11억원, 연봉의 15-20배
이런 극한 경쟁 환경에서 '예의'는 때로 생존에 방해가 되는 요소로 인식된다. "착한 사람이 손해 본다"는 말이 농담이 아닌 현실이 되었다.
디지털 시대의 역설: 연결되었지만 더 무례해진 우리
익명성이 주는 자유방임
온라인에서는 얼굴을 마주보지 않기 때문에 무례함의 비용이 현저히 낮다. 포털사이트 댓글, SNS,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일상에서라면 절대 하지 못할 막말들이 쏟아진다.
문제는 이런 온라인 행동 패턴이 오프라인으로도 전이된다는 점이다.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일수록 면대면 상황에서도 상대방의 감정을 고려하지 않는 직설적 소통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즉석 만족 문화의 확산
배달앱, 온라인 쇼핑, 스트리밍 서비스 등으로 인해 '즉시 만족'에 익숙해진 세대가 늘어났다. 원하는 것을 클릭 몇 번으로 바로 얻을 수 있는 환경에서 자란 사람들에게 '기다림'과 '배려'는 불필요한 번거로움으로 느껴질 수 있다.
실제로 20대의 60% 이상이 "음식 배달이 30분을 넘으면 화가 난다"고 응답했으며, 이는 10년 전 조사 결과(40%)보다 크게 증가한 수치다.
세대 간 예의 기준의 충돌
기성세대 vs 젊은 세대의 다른 관점
50대 이상 기성세대가 생각하는 '예의'
- 나이가 많은 사람에게 존댓말과 절 사용
- 웃어른이 말할 때는 끝까지 듣기
- 회식, 술자리 등 조직 문화 참여
- 직급과 서열에 따른 예우
20-30대가 생각하는 '예의'
- 개인의 선택과 의견 존중
- 업무와 사생활의 명확한 구분
- 성과와 능력 중심의 평가
- 다양성과 수평적 소통
두 세대 모두 나름의 '예의'를 지키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 기준이 다르기 때문에 서로를 '무례하다'고 인식하게 된다.
일상 속 무례함의 진화
Case 1: 카페에서
10년 전: "죄송한데요, 아이스 아메리카노 하나 주세요."
현재: "아아 하나요." (스마트폰 보면서)
10년 전: 직원이 음료를 가져다주면 "고맙습니다" 인사
현재: 음료 받고 바로 자리로 이동
Case 2: 대중교통에서
10년 전: 지하철 안에서 통화하면 다른 승객들이 눈치를 줌
현재: 스피커폰으로 통화해도 대부분 눈살만 찌푸릴 뿐 무관심
10년 전: 임산부나 노약자를 위해 자연스럽게 자리 양보
현재: 스마트폰에 집중해서 주변 상황을 인지하지 못하거나, 못 본 척
Case 3: 직장에서
10년 전: 야근과 회식은 당연한 조직 문화
현재: "업무 시간 외 연락은 받지 않겠다"고 명시하는 직원들 증가
예의가 사라진 진짜 이유들
1. 공동체 의식의 약화
한국 사회의 급속한 개인주의화가 가장 큰 원인 중 하나다. 전통적으로 한국은 '정(情)' 문화, 집단주의 사회였다. 마을 공동체, 대가족 제도 하에서 개인의 이익보다 공동체의 화합을 우선시했다.
하지만 도시화, 핵가족화, 개인화가 진행되면서 '나만의 삶'에 집중하는 문화가 확산되었다. 공동체에 대한 소속감이 약해지니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도 줄어든 것이다.
2. 사회적 신뢰의 붕괴
한국사회의 사회적 신뢰 수준은 OECD 최하위권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을 믿을 수 있다"고 답한 비율이 30%에도 미치지 못한다.
신뢰가 없으면 예의도 사라진다. "저 사람이 나에게 친절하게 대하는 이유가 뭘까?" "혹시 나를 이용하려는 것 아닐까?"라는 의심이 먼저 든다. 선의를 베풀어도 되돌아올 것이라는 기대가 없으니, 굳이 먼저 배려할 이유를 찾지 못한다.
3. 경제적 불안감
청년 실업률 증가, 부동산 가격 상승, 노후 불안 등으로 인한 경제적 스트레스가 무례함으로 표출되는 경우가 많다.
특히 한국의 노동 환경은 세계 최악 수준이다:
- 연간 근로시간: OECD 2위 (1,915시간)
- 최저임금 대비 생활비: OECD 상위권
- 고용 안정성: OECD 하위권
경제적 여유가 없으니 정신적 여유도 없다. 생존을 위한 투쟁에서 예의는 사치가 되었다.
무례함의 숨겨진 비용
하지만 예의가 사라지는 것이 과연 개인과 사회에 도움이 될까? 경제학적 관점에서 보면 오히려 큰 손실이다.
개인적 비용
- 인간관계 악화: 무례한 사람 주변에는 사람들이 모이지 않는다
- 기회 상실: 네트워킹과 협업 기회가 줄어든다
- 스트레스 증가: 갈등 상황이 많아져 정신적 피로도가 높아진다
- 평판 손상: 한 번 박힌 '무례한 사람' 이미지는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사회적 비용
- 사회 갈등 증가: 세대 간, 계층 간 갈등이 심화된다
- 생산성 저하: 직장 내 갈등으로 인한 업무 효율성 감소
- 사회 통합 저해: 공동체 의식 약화로 사회 결속력이 떨어진다
- 정신 건강 악화: 사회 전반의 스트레스와 우울증 증가
실제로 한국의 행복지수는 OECD 평균보다 현저히 낮다. 경제 발전에 비해 삶의 질이 개선되지 않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런 사회적 무례함과 갈등 때문이다.
해외는 다를까? 글로벌 트렌드 비교
일본: 극도의 예의 문화 vs 혼네와 다테마에
일본은 여전히 세계에서 가장 예의 바른 사회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겉으로 드러나는 예의(다테마에)와 실제 속마음(혼네)의 괴리가 크다는 문제가 있다.
젊은 일본인들 사이에서는 "가짜 친절에 지쳤다"는 반응이 나오고 있으며, 실제로 20-30대를 중심으로 보다 직설적인 소통을 선호하는 경향이 증가하고 있다.
미국: 개인주의 vs 기본적 매너
미국은 개인주의 사회지만 기본적인 매너는 철저히 지킨다. "Thank you", "Excuse me", "Have a nice day" 같은 표현은 자동반사적으로 사용한다.
하지만 정치적 극화, SNS 논쟁 등으로 인해 공공장소에서의 무례함도 증가하고 있다. 특히 코로나19 이후 마스크 착용, 백신 접종 등을 둘러싼 갈등이 일상적 무례함으로 확산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북유럽: 개인 공간 존중 vs 사회적 배려
스웨덴, 덴마크, 노르웨이 등 북유럽 국가들은 개인의 공간과 자유를 극도로 존중한다. 하지만 이것이 무례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상대방에게 부담을 주지 않는 것을 최고의 예의로 여긴다. 대중교통에서 불필요한 접촉이나 대화를 피하는 것, 개인적인 질문을 하지 않는 것이 배려의 표현이다.
기업들은 어떻게 대응하고 있나?
매너 교육의 부활
대기업들이 신입사원 연수에서 '비즈니스 매너' 교육을 강화하고 있다. 외부 전문 강사를 초빙해 기본적인 인사 예절, 이메일 작성법, 회의 매너 등을 가르친다.
"요즘 신입사원들은 업무 능력은 뛰어나지만 기본적인 조직 예절을 모르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 인사담당자들의 공통적인 의견이다.
갑질 방지 시스템 도입
많은 기업들이 직장 내 갑질을 방지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고 있다:
- 익명 신고 시스템: 직장 내 괴롭힘을 익명으로 신고할 수 있는 온라인 시스템
- 옴부즈맨 제도: 중립적 위치에서 갈등을 조정하는 전담 조직
- 360도 평가: 상사가 부하직원을 평가하는 것뿐만 아니라 부하직원도 상사를 평가
- 존중 문화 캠페인: 서로를 존중하는 조직 문화 조성을 위한 내부 캠페인
고객 응대 매뉴얼의 진화
서비스업에서는 '감정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한 매뉴얼이 발달하고 있다. 과도한 요구를 하는 고객에 대해서는 정중하지만 단호하게 거절할 수 있는 가이드라인을 제공한다.
일부 기업들은 "직원도 존중받을 권리가 있다"는 메시지를 고객들에게 명시적으로 전달하기 시작했다.
예의의 새로운 정의: 디지털 시대의 에티켓
전통적인 예의가 사라지고 있다면, 새로운 시대에 맞는 예의는 무엇일까?
1. 시간 존중
현대인에게 가장 소중한 자원은 시간이다. 따라서 상대방의 시간을 존중하는 것이 최고의 예의가 되었다:
- 약속 시간 정확히 지키기
- 불필요한 회의나 만남 자제하기
- 메시지 확인했으면 간단하게라도 답장하기
- 업무 시간 외 연락 자제하기
2. 공간 존중
물리적, 정신적 공간에 대한 배려:
- 대중교통에서 적절한 거리 유지하기
- 공공장소에서 큰 소리로 통화하지 않기
- 다른 사람의 개인적 영역 침범하지 않기
- SNS에서 상대방이 원하지 않는 태그나 언급 자제하기
3. 선택 존중
개인의 라이프스타일과 선택을 인정하는 것:
- 결혼, 출산, 종교 등에 대한 개인적 질문 자제
- 음주, 회식 강요하지 않기
- 정치적, 사회적 견해 차이 인정하기
- 세대 간 가치관 차이 수용하기
예의 회복을 위한 개인적 실천 방안
그렇다면 개인 차원에서 할 수 있는 것들은 무엇일까?
1. 작은 배려부터 시작하기
- 엘리베이터에서 뒤에 사람이 오면 문 열어주기
- 마트에서 계산대 앞사람이 카트 정리할 시간 기다려주기
- 식당에서 직원에게 "고맙습니다" 인사하기
- 대중교통에서 내릴 사람 먼저 내려주기
2. 디지털 매너 실천하기
- 메시지 받으면 최소 24시간 내 답장하기
- SNS에서 비난이나 논쟁 피하기
- 온라인 리뷰나 댓글 작성시 건설적 내용으로 쓰기
- 화상회의에서 다른 사람 발언 중 음소거 유지하기
3. 공감 능력 기르기
- 상대방 입장에서 생각해보는 습관 만들기
- 감정이 격해질 때 잠깐 멈추고 심호흡하기
- 다른 사람의 어려운 상황 이해하려고 노력하기
-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가능성 열어두기
사회적 차원의 해결책
1. 교육 시스템 개선
- 초중고 교육과정에 '인성 교육', '시민 의식' 과목 강화
- 대학에서 '사회 윤리', '커뮤니케이션 스킬' 필수 과목 지정
- 직장인 대상 정기적 매너 교육 프로그램 운영
- 공공기관에서 시민 대상 예의 캠페인 실시
2. 제도적 뒷받침
- 갑질 방지를 위한 법적 처벌 강화
- 직장 내 괴롭힘 신고 시스템 개선
- 감정노동자 보호를 위한 제도적 장치 마련
- 공공장소에서의 기본 매너 준수 캠페인
3. 문화적 변화 유도
- 매체에서 배려와 존중을 다루는 콘텐츠 제작 확대
- 기업들의 사회적 책임 강화 (직원, 고객 모두에 대한 존중)
- 지역 공동체 활동 활성화를 통한 공동체 의식 회복
- 세대 간 소통과 이해를 위한 프로그램 개발
미래 전망: 예의는 다시 돌아올까?
예의와 무례함의 미래를 예측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몇 가지 트렌드는 확인할 수 있다.
긍정적 신호들
- MZ세대의 가치관 변화: 젊은 세대 사이에서 정신건강, 워라밸, 인간관계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고 있다
- ESG 경영 확산: 기업들이 사회적 책임을 중시하면서 직장 내 문화 개선에 투자를 늘리고 있다
- 개인주의의 성숙: 단순한 이기주의가 아닌, 타인을 존중하는 성숙한 개인주의로 발전하는 조짐이 보인다
우려 요소들
- 경제적 불안 지속: 부동산, 일자리, 노후 불안 등이 해결되지 않는 한 사회적 스트레스는 계속될 것
- 디지털 격차 심화: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의 소통 방식 차이가 더욱 벌어질 가능성
- 세대 갈등 증가: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 간 가치관 충돌이 더욱 격해질 수 있다
결론: 예의, 생존을 위한 선택
예의가 사라지고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이것이 불가역적인 현상은 아니다. 예의와 무례함은 선택의 문제이며, 사회 구성원들의 집합적 선택에 따라 언제든 바뀔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예의를 '구닥다리 관습'으로 보지 말고 '상호 생존을 위한 사회적 계약'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할 때 모두가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예의의 새로운 가치 제안
- 개인적 이익: 좋은 인간관계는 더 많은 기회와 행복을 가져다준다
- 경제적 가치: 신뢰와 협력이 바탕이 된 사회에서 거래 비용이 줄어든다
- 사회적 효용: 갈등이 줄어들면 사회 전체의 생산성이 높아진다
- 정신적 건강: 서로를 존중하는 환경에서 스트레스와 우울감이 감소한다
결국 예의는 '베푸는 것'이 아니라 '투자하는 것'이다. 내가 남에게 보여주는 작은 배려가 결국은 나에게 돌아온다는 믿음을 회복할 때, 우리 사회도 다시 따뜻해질 수 있을 것이다.
"예의는 사라지지 않았다. 단지 새로운 형태로 진화하고 있을 뿐이다."
이 변화의 방향을 결정하는 것은 결국 우리 모두의 선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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