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유산: 죽은 뒤의 나를 누가 소유하는가

사후 데이터와 온라인 계정의 소유권을 둘러싼 새로운 논쟁

2025.08.13 | 조회 2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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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해 보이는 것들에, 다른 시선을 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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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독일 연방대법원은 역사적인 판결을 내렸다. 15세 딸이 지하철 플랫폼에서 사망한 후, 부모가 딸의 페이스북 계정 접근권을 요구한 사건에서 법원은 "상속인은 고인의 디지털 계정을 상속받을 수 있다"고 판시했다. 이 판결은 단순히 한 가족의 슬픈 사연을 넘어, 인류가 맞닥뜨린 전혀 새로운 법적·윤리적 딜레마의 출발점이 되었다.

우리는 지금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흔적을 남기며 살아가는 세대다. 매일 우리가 남기는 디지털 발자국은 과거 어떤 왕이나 철학자의 기록 보다 상세하고 방대하다. 카카오톡 메시지, 인스타그램 사진, 유튜브 구독 목록, 온라인 쇼핑 기록까지. 이 모든 것들이 우리가 죽은 후에도 서버 어딘가에 남아있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시작된다. 이 모든 디지털 흔적들은 과연 누구의 것인가?

법의 사각지대에 놓인 디지털 자아

현재 한국의 민법은 디지털 유산에 대한 명확한 규정을 두고 있지 않다. 전통적인 상속법은 토지, 건물, 현금 같은 유형 자산을 전제로 설계되었기 때문이다. 디지털 데이터는 물리적 형태가 없고, 플랫폼 업체의 서버에 저장되며, 이용약관이라는 복잡한 계약 관계 속에 존재한다.

이 법적 공백은 현실에서 무수한 갈등을 낳고 있다. 고인의 카카오페이 잔액은 상속될 수 있지만, 카카오톡 대화내용은 접근할 수 없다. 네이버 클라우드에 저장된 가족사진들은 비밀번호를 모르면 영원히 잠겨버린다. 고인이 운영하던 유튜브 채널의 수익은 어떻게 될까? 아이디와 패스워드만 알면 상속인이 그대로 이어받을 수 있을까?

더욱 복잡한 것은 디지털 유산이 단순히 경제적 가치만을 가지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사진 한 장, 메시지 하나에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추억과 감정이 담겨있다. 동시에 그 안에는 타인의 사생활이나 민감한 정보도 포함되어 있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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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랫폼의 제왕들이 결정하는 사후의 운명

현재 디지털 유산의 운명은 사실상 플랫폼 기업들의 정책에 달려있다. 구글은 '비활성 계정 관리자' 서비스를 통해 사용자가 미리 지정한 사람에게 계정 접근권을 넘길 수 있도록 한다. 애플은 '디지털 유산 관리자' 기능을 도입했고, 페이스북과 카카오톡은 고인 계정을 '추모 계정'으로 전환하는 옵션을 제공한다.

하지만 이런 서비스들은 플랫폼마다 다르고, 대부분의 사용자들은 이런 기능의 존재조차 모르고 있다. 한국일보의 최근 보도에 따르면, "디지털 유산은 상속 가능한 자산"이라고 응답한 사람이 64%에 달했지만, 정작 이를 위한 사전 준비를 한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더 심각한 문제는 플랫폼 기업들이 일방적으로 정한 이용약관이 사실상 법률을 대신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용자가 죽으면 계정을 삭제하겠다고 명시한 약관도 있고, 가족이라 해도 절대 접근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조항도 있다. 한 사람의 디지털 생애가 몇 개의 기업 정책에 의해 좌우되는 기형적 구조가 고착화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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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는 어떻게 대응하고 있는가

미국의 경우 현재 47개 주에서 개정 통일 디지털 자산 접근법(RUFADAA)을 채택해 입법했다. 이 법은 상속인이나 법정대리인이 고인의 디지털 자산에 접근할 수 있는 권한을 명시하고 있다. 다만 개인의 사생활 보호와 상속권 사이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복잡한 절차를 두고 있다.

앞서 언급한 독일 연방대법원의 2018년 판결은 더욱 진보적이다. 법원은 "페이스북 이용 계약상의 지위 자체가 상속인에게 승계된다"고 판시함으로써 디지털 유산의 상속을 폭넓게 인정했다. 이는 디지털 계정을 일종의 재산권으로 보겠다는 선언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이런 판결도 완벽한 해답은 아니다. 고인의 친구들이 보낸 개인적인 메시지까지 가족이 모두 볼 수 있어야 하는가? 고인이 생전에 철저히 비밀로 한 정보들도 상속의 대상인가? 법적 권리와 윤리적 고민 사이의 간극은 여전히 크다.

데이터 소유권이라는 근본적 질문

디지털 유산 논쟁의 핵심에는 더 근본적인 질문이 자리하고 있다. 데이터의 소유권이란 무엇인가? 내가 페이스북에 올린 사진의 진짜 주인은 나일까, 페이스북일까?

전통적인 소유권 개념으로는 이 질문에 답하기 어렵다. 데이터는 복사가 가능하고, 여러 곳에 동시에 존재할 수 있으며, 물리적 점유라는 개념이 적용되지 않는다. 내가 구글 포토에 업로드한 사진은 구글 서버에 저장되지만, 나는 여전히 원본 파일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누가 진짜 '소유자'인가?

일부 학자들은 데이터에 대한 새로운 권리 개념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소유권이 아닌 '이용권' 또는 '통제권'의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관점에서 보면 디지털 유산도 단순한 상속 문제가 아니라, 고인의 데이터 이용권을 누가 어떤 조건으로 승계할 것인가의 문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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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현실과 과제

한국에서도 "디지털 자산은 이제 우리의 삶의 일부이자 중요한 재산"이라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지만, 법제도는 여전히 아날로그 시대에 머물러 있다. 정부와 국회는 디지털 유산에 대한 종합적인 법적 프레임워크 마련을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하지만 단순히 서구의 법제를 베껴오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한국의 가족 문화와 개인정보보호에 대한 독특한 인식, 그리고 세계에서 가장 발달한 디지털 환경이라는 특수성을 모두 고려해야 한다.

더 중요한 것은 기술적 해결책이다. 블록체인 기술을 활용한 디지털 유산 관리 시스템, AI를 이용한 고인의 의사 추정 알고리즘, 생체인증과 연동된 상속 절차 등 새로운 기술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법이 기술을 따라잡기보다는, 기술과 법이 함께 진화해나가는 통합적 접근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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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가

개인 차원에서는 지금부터라도 디지털 유산 계획을 세워야 한다. 주요 계정들의 아이디와 패스워드를 정리하고, 각 플랫폼의 사후 계정 관리 서비스를 미리 설정해두는 것이 기본이다. 더 나아가 어떤 정보는 상속하고 싶은지, 어떤 정보는 완전히 삭제하고 싶은지에 대한 구체적인 의사를 남겨야 한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일 뿐이다. 우리 사회 전체가 디지털 유산이라는 새로운 현실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에 대한 근본적인 합의가 필요하다. 개인의 프라이버시와 가족의 알권리, 기업의 이익과 공공의 가치 사이에서 어떤 균형점을 찾을 것인가?

기원전 3000년 수메르인들이 쐐기문자로 자신의 사상을 기록하기 시작한 이래, 인류는 늘 후세에 무엇을 남길 것인가의 문제와 씨름해왔다. 하지만 우리가 맞닥뜨린 디지털 유산의 문제는 그 규모와 복잡성에서 전례가 없다.

죽음 이후의 디지털 자아를 누가 소유할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단순히 법률 조문에서 찾을 수 없다. 그것은 우리가 어떤 사회를 만들어갈 것인지, 개인과 기술과 제도가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인지에 대한 근본적인 선택의 문제다.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우리 모두는 이미 방대한 디지털 유산을 쌓아가고 있고, 그 운명은 아직 결정되지 않은 채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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