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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 수동형 인간
머리와 심장 사이를 생각이 느리게 오고 가듯 저는 느린 글쓰기를 고집했어요. 모니터 앞에 앉아서 깜박이는 커서에 생각이 심어 놓은 새싹을 튀우려 했죠. 그렇게 몇 분, 아니 몇 시간이 흘러, 단 하나의 글자조차 쓰지 못하더라도 상관없었어요. 적어도 그 힘을 감당해낼 듬직한 엉덩이는 마련해 두었으니까요. 언젠가 글의 줄기들이 단단하게 자라날 테니까요. 그런 면에서 본다면 글쓰기는 기다림일까요?
하지만, 글쓰기는 그런 느린 기대감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내가 주체가 되어서 누군가를 설득한다는 일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그러니 리모트 컨트롤당하는 로봇이 되는 편이 나을 지도 모르겠어요. 그런 마음을 먹고 글을 쓰다 보면 자꾸만 구석으로 숨게 됩니다. 나도 모르게 수동적인 표현, 자신 없는 어투, 남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문장에 집착하게 됩니다.
“‘보여집니다’? ‘보인다’도 아니고 저게 대체 어느 나라말인가요? 도저히 안 되겠습니다. 사장님, 긴히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보여집니다’는 이중 피동 표현으로써 ‘보입니다’,라고 쓰시는 게 맞습니다. 회사를 이끌어 나가는 대표님으로써 우리말을 올바르게 쓰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기 신입 사원들이 보고 배웁니다.”
정말 이렇게 따지고 싶었어요. 하지만 한마디도 내뱉지 못했습니다. 저도 먹고살아야 하는 한 달짜리 인생이었으니까요, 통쾌한 장면을 상상만하다 무대의 막을 내려버렸습니다. 글을 쓰며 살다 보니 이런 번지수도 없는 말이 신경을 자꾸 거슬리게 만듭니다. 듣다 보면 그 자리에서 바로 교정해 주고 싶을 정도죠. “전 프로 불편러인일까요?” 국문학 전공도 아닌 공대생 출신 프로그래머가 굳이 국어 문법을 따지려고 드는 이유는 뭘까요.
글을 쓰는 날이 늘어날수록 원리의 장벽에 부딪힙니다. 귀동냥으로 배운 기술만으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저는 글 쓰는 모임을 이끌며 피드백까지 전달하다 보니, 우리말의 기본 구조를 탄탄히 다져야 한다는 인식이 커져 갔습니다. 단순히 ‘피동형을 쓰지 마세요, 수동태보다는 능동태를 써야 좋은 문장입니다’, 이런 명령 투의 말로는 설득력이 떨어졌습니다. 왜 능동태를 쓰는 게 좋은지, 수동태를 연속으로 사용하는 것이 왜 자신을 두 번 죽이는 일인지, 그 이유를 보여주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피동형과 같은 말인 수동태는 흔히 번역체가 낳은 시대의 산물이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피동형 문장이 무조건 잘못된 것이 아니라 상황에 맞지 않게 습관적으로 쓰는 무신경함이 문제입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피동형 문장을 이중으로 쓰는 행태입니다. 한 사람이 쓰면 그걸 좋은 줄 알고 모방합니다.
우리말의 피동 표현법은 문장의 주체가 타인의 힘에 의하여 움직이도록 유도합니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문장을 볼까요.
동사를 피동형으로 변형하는 방법 (이, 히, 리, 기 등의 접사를 동사에 붙여 활용
예 1) 보다 => 보이다(피동사):
지금 서울의 하늘에는 구름만 지나면서 비가 소강상태를 ‘보이고’ 있는데요. (정상)
잠시 후 회의가 속개될 것으로 ‘보여집니다’.(잘못)
예 2) 쓰다 => 쓰이다.
내가 투자한 돈이 그렇게 쓰여지는 줄은 몰랐다.(잘못)
내가 투자한 돈이 그렇게 쓰이는 줄은 몰랐다(정상)
위의 첫 번째 문장에서는 ‘보다’ 동사를 ‘보이다’를 사용하여 피동형으로 변형했습니다. 두 번째 문장은 ‘보다’를 ‘보이다’ + ‘~어지다”의 이중 피동으로 사용하여 어색한 문장을 만들었습니다. 두 번째 문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쓰다’ 동사의 피동형은 ‘쓰이다’인데, ‘~어지다’를 더하여 이중 피동으로 만들었습니다.
‘필력과 구도가 잘 잡혀진 사군자’ => ‘필력과 구도가 잘 잡힌 사군자’ (잡히다 : 피동사)
‘잘 짜여진 각본’ => ‘잘 짜인 각본’ (짜이다 : 피동사)
‘발에 밟혀진 대통형의 얼굴’ => ‘발에 밟힌 대통형의 얼굴’(밟히다 : 피동사)
‘태엽이 감겨진 시계’ => ‘태엽이 감긴 시계’(감기다 : 피동사)
‘볼펜이 담겨진 필통’ => ‘볼펜이 담긴 필통’(담기다 : 피동사)
위의 문장은 피동사를 이중으로 활용한 사례들입니다. 피동사에 추가적으로 ‘~어지다’를 붙이니 이중 피동이라는 이상한 괴물이 탄생했습니다. 이중 피동 표현은 무서워서 피하고 한 번 더 비겁한 행동을 보이는 꼴입니다. 하지만 ‘사동사’는 상황이 다릅니다. 피동사는 문장의 주체가 당하는 것이지만, 사동사는 타인에게 행동이나 동작을 하게 함을 나타내는 동사입니다. 사동사에는 ‘~어지다’를 붙여도 됩니다. 위의 사례처럼 ‘만들다’ ‘살다’ ‘알리다’ ‘밝히다’, ‘먹이다’, ‘앉히다’는 사동사입니다. 사동사도 인터넷 사전을 뒤지면 잘 나옵니다. 이 동사들은 ‘~어지다’를 붙여 ‘만들어지다’, ‘알려지다’, ‘밝혀지다’, ‘먹여지다’, ‘앉혀지다’라고 써도 문법적으로 오류가 아닙니다.
글은 쓰더라도 읽히지 못하면 죽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아무도 봐주지 않는 글, 타인의 마음에 물길을 내지 못하는 글은 생명을 얻지 못한 운명과 다를 바 없습니다. 해석 당하는 삶의 자세에서 벗어나 이제 이끄는 삶을 살아갈 때입니다.
에세이 : 생각에서 빠져나오는 방법
생각에 잠기는 게 좋을까? 빠져나오는 게 좋을까? 미니멀리즘이 유행이라는데 이번 기회에 머릿속에서 생각을 조금이나마 절감해볼까나. 역시 선택은 그 무엇이든 어렵다. 보이지 않는 생각이라는 것은 더욱더.
4차 산업혁명의 유행과 더불어 점점 생각할 이유가 사라진다. 기계적으로 출근하고 기계적으로 코딩하는 나의 일상을 관찰하자니, 확실히 생각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그런 면에서 개발자인 나로서는 생각을 깊이 하지 않아도 원하는 프로그램을 뚝딱 만들어준다는 똑똑한 ‘노코드 플랫폼’의 등장이 낯설면서도 반갑기만 하다. 정말 생각하지 않아도 그러니까 구체적으로 표현하거나 기술을 쓰지 않아도, 내가 그토록 고대하던 세계를 ‘노코드’가 도깨비방망이 후려치면 끝나듯 뚝딱 창조해 줄까. ‘이러다 인간의 역할이 점점 축소되는 건 아냐? 아예 개발자라는 타이틀이 영영 사라지게 되지는 않을까? 나 이제 뭐 먹고살라고?’
그래서 나는 요즘 생각하지 않으려 애쓴다. 하지만, 생각하지 않고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니 필요한 생각만 선택적으로 고르면 된다는 얘기로 결론이 나겠지만…… 그런데 필요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에 대한 판단은 어떻게 내려야 되려나. 그것조차도 내가 주도하는 것이 아닌, 스마트한 기계에게 맡기만 그만이려나? 생각이 말살되는 시대, 생각할 필요가 사라졌으니 피곤하게 생각에 집착하지 말고, 무엇이든 기계에게 편하게 맡기면 그만 아니겠나. 기계든, 인공지능이든, 전문적인 직업을 가진, 말하자면 나보다 우월한 존재에게.
‘노코드 앱’ 개발 플랫폼이 출시되자마자 나는 반색하며 그 소식을 최신형 노트북 화면으로 먼저 접했다. ‘이제 커뮤니케이션이 더 간소해지겠구나. 개발자와 디자이너 간, 개발자와 기획자 간의 높은 장벽이 곧 허물어지고 말겠구나’, 라는 생각과 함께. 하지만 곧 그런 낙관적인 전망은 공포로 변질되어 간다. ‘나처럼 기술을 깊이 익히지 못한 인간들은 더 급속도로 도태되겠구나, 이 세계에도 이제 유행병이 더 깊어지겠구나, 가진 사람 그러니까 툴을 다룰 줄 아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간의 간극은 더 벌어질 수밖에 없겠구나’라는 무서운 생각.
나는 직업병에 걸린 사람처럼 ‘노코드’ 개발 플랫폼을 뒤지기 시작했다. 평소에 그랬듯 남들보다 반 박자 빠르게 동향을 접하려고 몇 가지 툴을 재빠르게 선별한 후, 바로 다운로드했다. 역시 실행이 관건이다. 생각은 짧게, 그러니까 고민 따위에 흡착하려는 습성에 기울어지지 말고, 축적된 즉흥 프로세스에게 역할을 맡기는 것이 현명하다.
몇 가지 툴을 다운로드하고 나서 바로 테스트에 돌입했다. 제품의 장단점, 시장성, 편의성 등을 종합적으로 체험해보고 바로 판단까지 이른다. 몇 차례의 프로세스가 순식간에 지나갔지만 비교적 생각하는 시간은 짧았다. 동물적인 판단이라고 봐야 할까, 경험이라는 측면으로 해석해야 할까. 아무튼 빠르게 테스트해보고 빠르게 계속 사용해야 할 것인지, 그 여부를 판단하기에 이른다.
그래, 지금까지 이 세계에서 버텨온 나만의 생존 방식이다. 구태의연하다면 그럴 수 있겠지만... 관습처럼 굳어진, 프로그램화된 나만의 방식에 따라 최종적인 판단을 내리는 것이다. ‘So far, so good’ 아직까지는 그럭저럭 괜찮다. 지금까지 잘 해냈던 것처럼, 앞으로도 지금처럼 살아가면 될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안심해도 될 것인지, 여전히 주위엔 공포가 숨어있다. 안심할 때마다 옆구리를 쿡 찌른다.
또, 생각이 앞을 가로막는다. 불쑥불쑥 안개처럼 밀려드는 어떤 흐릿한 존재, 불안하고 두렵기만 한, 막연하며 실체는 불분명하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기운에게 나는 위협을 느낀다. 생각에 분포된 대다수의 부정적인 기운, 그것을 감지하는데 능한 나는 비교적 메타인지가 높은 사람일까, 그저 부정적인 기운에 휩쓸리고 마는 나약한 자신을 인증하는 것에 불과할까. 여유가 찾아올 때마다 말하자면 빈틈이 무럭무럭 자라날 때마다, 슬금슬금 고개를 쳐드는 잡초 같은 생각을 뿌리째 뽑아낼 수 있다면 좋으련만, 그런 일은 살아가는 동안 목격하지 못할 듯하다.
나는 지금 고민 중이다. 어떻게 하면 기계적으로 학습하고 기계적으로 반응하는 인간으로 나를 변모시킬 수 있을지. 물론 그 가능성은 고민보다는 실행에 달려있겠지만.
이번 주의 음악과 책
오늘은 바흐의 브란덴부르크 협주곡을 편곡한 버전을 듣겠습니다. 쿠바 출신 밴드인 Klazz Brothers & Cuba Percussion이 편곡을 맡았어요.클래식과 재즈의 만남 추천합니다.
Air from Classic Meets Cuba(2004)
Suite No.3 BWV 1068 (Air)
카라얀 버전도 첨부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bvj25SpFUJ8&ab_channel=BerlinPhilharmonicOrchestra-Topic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 주에도 또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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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inny
반성하게 되는 글이네요... 내나라 국문법을 더 잘 몰라서요 ㅠㅠㅠㅠㅠㅠ 영문법은 달달 외웠으면서 무지 뜨끔하면서 읽어내려갔습니다 🤣🤣 오늘도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공대생의 심야서재 뉴스레터
반성까지야 ㅎㅎ 국문법 저도 잘 몰라요. 그냥 쓰다 보니 조금씩 공부하게 된 것 뿐이랍니다. 재밌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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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망
가끔 셜록홈즈 베네딕트가 말하는 말투를 가만히 들어보면 생각이 많다는 생각이드네요! 에세이가 제일 편한 글쓰기인데 가끔은 ㅜㅜ넘나 답이 없는 어려운 글쓰기! 앞으로도 가끔은 저도 지나친 현실주의와 냉철한 셜록홈즈의 마인드를 가져야한다는 생각! 플러스 국어능력시험 자격증까지 공부할까 생각이 듭니다.ㅎㅎㅎ 글 재미나게 잘 읽었어요^^
망망
가만히 들어보면 (저는)이 빠졋어요 ㅎㅎ
공대생의 심야서재 뉴스레터
에세이가 어쩌면 제일 어려울지 몰라요. 쉽게 생각하고 접근하지만 하다 보면 어렵다는 걸 알게 됩니다. 그리고 삶에서 얼마나 많은 생각을 하고 그것에서 무엇을 얻는지 생각해볼 필요도 있어요. 댓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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