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밤인지, 이른 새벽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시각. 창밖은 깊은 잠에 빠져 있었고, 방 안의 공기는 밤새 묵은 상념처럼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아마도 새벽 두 시를 막 넘겼을 무렵이었으리라. 나는 흡사 의식을 치르듯, 익숙한 손놀림으로 드리퍼에 여과지를 안치고 곱게 갈린 원두 한 스쿱을 조심스레 담았다. 곡선이 우아한 킨토(KINTO) 커피 서버 위에 드리퍼를 올려놓자, 짧지만 완벽한 정적이 공간을 감쌌다. 어쩌면 그 순간, 나는 시간이 흐른다는 사실마저 까맣게 잊었던 건지도 몰랐다.
김을 내뿜는 100℃의 물줄기를 드리퍼 중앙에서부터 천천히 나선을 그리며 부었다. 갈색 원두 가루가 검붉은 물과 섞이며 차분히 몸을 열었는데, 그 모습은 언제 봐도 경건했다. 곧이어 아직 어린 화산처럼 봉긋하게 피어오르던 커피 거품이 이내 만족스럽다는 듯 스르르 가라앉았다. 바로 그때, 불현듯 어떤 깨달음이 스쳤다. 이 섬세한 과정, 이 친숙한 풍경이 얼마나 자주 내 일상에서 무심히 지나쳐졌던가. 늘 그 자리에 있었기에 오히려 주목받지 못했던, 소중한 순간들의 존재를.
시선을 돌리니, 탁자 위에 붉고 매끈한 자태를 뽐내는 작은 깡통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손가락으로 슬쩍 밀어보니, 녀석은 제법 옹골찬 무게로 버텼다. 자신의 자리를 내어주지 않고 싶었던 것이다. 마치 "나 여기 있소" 하고 조용히 항변하는 듯했다. 캔 표면에는 "DECAF DECAFEINE illy blend"라는 글자가 선명했다. 그래, 디카페인. 밤늦은 시간의 커피 한 잔을 위한, 카페인의 구속으로부터 자유를 선언하는 일종의 면죄부이자, 불면의 밤으로부터 나를 지켜줄 작은 방패막이가 아닌가.
나는 그 붉은 깡통을, 마치 처음 만난 존재처럼 찬찬히 뜯어보기 시작했다. 거창한 발견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스쳐 지나가는 일상의 파편들 속에서 억지로 의미를 건져 올리고픈 욕심도, 손가락으로 튕기면 제법 경쾌한 소리를 내는 저 깡통의 물성이나 커피의 모든 향을 내어주고 축 늘어진 여과지의 고요한 퇴장 따위를 탐구하려는 학문적 호기심도 아니었다. 다만, 무언가를 발견했다면 그것을 그럴듯한 문장으로 빚어내야 한다는, 글 쓰는 자의 오랜 강박이 슬며시 고개를 드는 것을 느꼈다. 어쩌면 이 순간, 그저 나를 에워싼 익숙한 풍경과 사물들, 그 무심한 존재들을 새삼스레 의식하게 되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작은 의미는 있었으리라.
어쩌면 관찰이란, 매일 마주하는 지극히 평범한 풍경 속에서 자신만의 고유한 시선을 드리워 숨겨진 의미의 의미들을 길어 올리는 행위일 것이다. 돌이켜보면 나는 너무나 오랫동안 주변의 많은 것들을 의식의 수면 아래로 흘려보냈던가! 그저 세상을 무심히 대했던 것은 아닐까. 지금 이 순간의 생각은 때늦은 반성일 수도, 순간적인 감상의 파편일 수도, 혹은 그저 한밤중의 커피 향처럼 스쳐 지나가는 덧없는 상념일지도.
문득 이런 질문이 떠올랐다. AI가 모든 것을 보고 기억하는 이 시대에도, 인간의 관찰은 여전히 의미를 지닐까? 어쩌면 AI의 예리한 시선이 내가 무심코 흘려보낸 일상의 모든 장면을 완벽하게 포착하고, 심지어 나보다 더 섬세하게 묘사해 줄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면 이제 고단했던 나의 두 눈은 안식을 맞이해도 되는 걸까? 그런 안락함 뒤에 숨겨진 상실감은 어디로 갈까?
지난 몇 달간, 나는 AI와 한 지붕 아래 산 것이나 다름없었다. 좋든 싫든, 그것은 나의 생계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득 이런 의문이 고개를 들었다. 단지 먹고살기 위해, 나도 모르는 사이 내 고유한 사유의 영역까지 AI에게 내어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마치 파우스트처럼, 편리함이라는 달콤한 속삭임에 넘어가 내 영혼의 한 조각을 거래한 것은 아닌지. 모든 것을 의심하라고 외쳤던 데카르트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모든 것을 의심하고 다 생각할 필요를 느꼈다. AI와의 관계, 그리고 그 속에서의 나 자신에 대한 명확한 조율과 나름의 원칙 정립이 절실했다. 그래서 나는 관찰의 렌즈를 바깥세상이 아닌, 내 안으로 돌려야만 했다.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 그 이전에 나 자신부터 들여다봐야 했다.
그러다 문득 AI의 능력을 직접 시험해 보고 싶은 장난기가 발동했다. 처음에는 이 부족한 글솜씨를 키우려면 무엇을, 어떻게 관찰해야 하는지 자문이라도 구해볼까 싶었지만, 이내 생각을 바꿨다. 녀석의 조언을 듣기 전에, 먼저 그 '의심 많은 스승'의 관찰력부터 검증해 봐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무작위로 풍경 사진 한 장을 골라 던져주며, 다음과 같은 지시를 내렸다.
첨부한 사진을 관찰하고그 결과를 특정 대상으로 비유하고또 묘사하는 글을 한 문단으로 작성해 봐.

챗GPT 4.5
넓게 펼쳐진 갈색 들판 위로 하얀 구름이 마치 떠오른 고래처럼 유유히 헤엄치고 있다. 이 구름은 부드럽고 둥근 몸짓으로 공기의 바다를 가로지르며, 저 멀리 낮게 깔린 산들을 지나가는 듯하다. 들판의 잔디는 마치 고요히 잠든 모래사장처럼 평온하고 고요하며, 햇빛을 받아 금빛으로 물든 채 따스한 꿈을 꾸고 있는 듯하다. 하늘과 땅 사이, 이곳의 모든 것은 조화롭게 숨 쉬며 고요한 휴식을 취하고 있다.
클로드 소넷 4.0
넓게 펼쳐진 갈색 들판이 마치 거대한 양피지처럼 펼쳐져 있다. 겨울의 끝자락에서 봄을 기다리는 이 땅은 오랜 세월 농부의 손길을 받아온 화폭 같아서, 그 위로 드문드문 서 있는 나무들이 붓으로 찍어놓은 점들처럼 보인다. 멀리 연한 푸른빛의 산맥이 수평선을 따라 잔잔한 물결처럼 이어지고, 그 위로는 솜사탕을 뜯어놓은 듯한 하얀 구름들이 파란 하늘 캔버스에 자유롭게 떠다니고 있다. 이 풍경은 마치 한 폭의 수채화 같아서, 자연이 스스로를 그린 평온하고 소박한 작품처럼 느껴진다.
제미나이 2.5 Pro
첨부된 사진 속 풍경은 마치 곧 아름다운 이야기로 채워질 광활한 한 폭의 빈 캔버스 같습니다. 겨우내 숨을 죽인 듯 누렇게 펼쳐진 대지는 새로운 계절의 다채로운 색깔을 기다리는 바탕처럼 고요하게 펼쳐져 있고, 그 위로 드넓게 펼쳐진 푸른 하늘과 그 하늘을 유유히 떠다니는 뭉게구름 한 점은 마치 화가가 찍어낼 첫 번째 붓 터치, 혹은 평화로운 서곡의 첫 음표처럼 느껴져 조용하면서도 벅찬 기대감을 자아냅니다.
과연, AI들이 펼쳐놓은 비유와 묘사의 향연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들의 글을 읽으며, 관찰이야말로 글쓰기의 가장 근원적인 출발점이며, 메마른 문장에 생기와 깊이를 불어넣는 핵심 요소임을 새삼 절감했다. 동시에, 내가 그동안 얼마나 피상적인 시선으로 세상을 대해왔는지 깨달으며 뜨끔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자존심도 꽤 상했다. 특히 챗GPT와 클로드, 그리고 제미나이가 보여준, 인간의 감성을 넘보는 듯한 관찰력과 표현력은 경탄을 넘어 약간의 질투심마저 느끼게 했다.
그렇다면 진정한 관찰이란 무엇일까? 단순히 대상을 응시하는 시각적 행위일까, 아니면 분석가의 눈으로 대상을 해부하듯 파헤치는 지적 활동일까. 어느 한쪽만으로는 부족할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관찰은, 차라리 짙은 안개가 자욱한 숲길에서 길을 찾는 탐험가의 몸짓과 닮았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흐릿하고 불분명하여 막막함마저 느끼지만, 숨을 고르고 오감을 열어 조심스레 한 걸음씩 내딛다 보면, 미세한 빛줄기, 바람의 방향, 흙의 질감 속에서 서서히 길의 윤곽이 드러나는 것처럼 말이다.
AI가 펼쳐 보이는 섬세한 묘사의 힘은, 단순히 입력된 이미지 데이터 그 자체에서만 비롯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들이 빚어내는 문장 속에는, 학습 과정에서 흡수한 방대한 텍스트 데이터, 즉 인간 문명이 축적해 온 표현과 감성의 편린들이 녹아있기 때문이리라. AI에게 물리적인 '눈'은 없다. 그저 이미지를 픽셀 단위의 명암 값으로 해독할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AI는 주어진 정보 너머의 숨겨진 의미를 길어 올리고, 때로는 없던 디테일까지 창조해 낸다. 마치 숙련된 소설가가 몇 가지 단서만으로 한 편의 이야기를 직조해 내듯, 혹은, '악마적인' 상상력으로 빈틈을 메우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듯하다. 그 모습은 마치 나를 향해 이렇게 속삭이는 것 같았다.
"보라, 인간이여! 너 또한 이렇게 관찰해야 한다.진정한 관찰은 대상을 넘어선 창의적 상상력에서 발화하는 법.네가 보지 못하고 표현하지 못하는 것은,어쩌면 너의 상상력이 게으른 탓은 아니겠는가?"
기록하는 순간, 과연 일상은 특별한 의미를 걸치게 될까? 사소한 사물일지라도 깊이 관찰하면 그것이 전혀 다른 존재로 변모할 수 있을까? 물론 사물 자체가 물리적으로 변하지는 않겠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과 태도는 분명 달라질 것이다. 어쩌면 모든 것은 그렇게, 관찰자의 인식 속에서 끊임없이 새롭게 태어나는지도 모른다. 신기하게도, 시선을 주고 의미를 찾아 기록하기 시작하면, 아주 평범했던 대상들이 저마다의 이야기를 품은 존재로 다가온다. 조금 전, 무심코 커피를 내리던 그 순간과는 달리, 이제 내 앞의 커피 서버에 담긴 짙은 갈색 액체와 투명한 얼음 조각들, 심지어 옆에 놓인 탄산수 한 병마저도 내 의식 속에서 다른 차원의 존재감을 획득했다. 마치 그것들 뒤에 숨어 있던, 혹은 이전에는 미처 알아보지 못했던 또 다른 얼굴과 조용히 대화를 나누는 듯한 기분. 조금은 과장된 표현일지 모르나, 그 순간의 교감은 분명 생생했다.록하는 순간, 과연 일상은 특별한 의미를 걸치게 될까?
사소한 사물일지라도 깊이 관찰하면 그것이 전혀 다른 존재로 변모할 수 있을까? 물론 사물 자체가 물리적으로 변하지는 않겠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과 태도는 분명 달라질 것이다. 어쩌면 모든 것은 그렇게, 관찰자의 인식 속에서 끊임없이 새롭게 태어나는지도 모른다. 신기하게도, 시선을 주고 의미를 찾아 기록하기 시작하면, 아주 평범했던 대상들이 저마다의 이야기를 품은 존재로 다가온다. 조금 전, 무심코 커피를 내리던 그 순간과는 달리, 이제 내 앞의 커피 서버에 담긴 짙은 갈색 액체와 투명한 얼음 조각들, 심지어 옆에 놓인 탄산수 한 병마저도 내 의식 속에서 다른 차원의 존재감을 획득했다. 마치 그것들 뒤에 숨어 있던, 혹은 이전에는 미처 알아보지 못했던 또 다른 얼굴과 조용히 대화를 나누는 듯한 기분. 조금은 과장된 표현일지 모르나, 그 순간의 교감은 분명 생생했다.

이렇게 관찰의 의미를 곱씹다 문득 오래된 사진첩에서 빛바랜 풍경 사진 한 장을 꺼내 들었다. 그 순간, 나는 현재의 방 안이 아닌, 사진 속 황금빛 들녘이 광활하게 펼쳐진 그곳으로, 그 시간 속의 나에게로 건너갔다. 아마 길을 걷다 무언가에 이끌려 발걸음을 멈췄던 찰나였으리라. 하늘에는 마치 만화 속 말풍선처럼 뭉실한 구름이 두둥실 떠 있었고, 그것이 내게 무어라 말을 건네는 듯했지만, 그 속삭임을 온전히 해독할 길이 없어 다만 카메라 셔터로 그 순간의 느낌을 봉인해 두었던 것 같다. 지금 돌이켜보니, 과거의 나라면 무심히 스쳐 지나갔을 법한 그저 그런 풍경. 하지만 이제는 그 안에서 새로운 감각, 새로운 이야기가 꿈틀거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관찰의 눈을 뜨자, 잊혔던 순간이 비로소 의미를 갖고 되살아난 것이다.
이렇게 하루하루 사소한 발견의 조각들을 주워 모으다 보면, 어느덧 내 주변의 모든 것이 이전과는 전혀 다른, 깊이를 알 수 없는 매혹적인 세계로 변모해 있지는 않을까. 그때가 되면 비로소 깨닫게 되리라. 그토록 찾아 헤매던 특별한 일상이란 것이, 실은 멀리 어딘가에 존재하는 신기루가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 내가 무심코 흘려보냈던 수많은 순간 속에 보석처럼 숨겨져 있었다는 사실을.
결국, 다시 본질적인 질문으로 돌아오게 된다. 관찰이란 과연 무엇인가? 단순히 표면을 훑는 '본다'를 넘어, 그 이면에 숨겨진 의미와 관계를 읽어내는 '통찰'의 영역으로 나아가는 것. 그렇다면 이 여정에 필요한 특별한 시선이란 무엇일까? 혹시 AI와 함께하는 글쓰기가 그 길을 밝혀줄 돋보기, 혹은 미처 생각지 못한 관점을 제시하는 조력자가 되어주지는 않을까? 기대해도 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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