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픽션입니다.
사전 연명 의료의향서, 나는 오늘 이 서류에 서명을 해야 한다. 내 생명을 담보로 하는, 내 육신과 정신의 의미가 사라지는 이 최종적인 서류에 동의 작업을 거쳐야 한다. 왜? 그래야 하는데? 인간은 모두가 죽음을 경험하겠지만, 아직 나에겐 그것이 현실로 인식되지 않는다. 그런데 왜 내가 이 보잘것없는 작은 종이 한 장에 앞으로의 운명을 맡겨야 하는 거지? 알 수 없다. 이해할 수 없다.
사각형의 흰 벽이 둘러싼 공간이다. 눈부시게 환한 흰색 조명, 직사각형의 테이블과 의자 역시 흰색뿐이다. 나는 이 낯선 공간에서 문득 눈을 떴다. 내가 입은 옷도 역시 흰색이다. 여긴 어디인가? 나는 겨우겨우 기억 하나를 환기시킨다. 그래, 그날 나는 그 서류에 내 이름을 각인했다. 낯선 종이 한 장에 미래를 맡겨버렸다. 결국 나는 이곳에 왔다. 이런 결과를 초래했다는 것은 내가 어떤 중대한 상황에 직면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 나는 그 의향서에 체결한 조약대로 심신을 통제할 수 없는 아주 심각한 상황에 도달했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나는 어느 순간 이 공간에 도착한 것이다. 나는 어쩌면 나를 향한 본질적인 여행 중인지도 모른다. 점차 소멸의 과정으로 그 과정에 보다 익숙해져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런데 나는 왜 이 상황을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을까? 나는 왜 이런 생생한 감각을 여전히 느끼는 중일까? 내 눈앞엔 빨간 버튼이 하나 있다. 저걸 누르면 어떻게 되는 걸까? 누르는 것으로 이미 예정되어 있는 걸까? 내가 저 버튼을 누른다는 건 이미 피할 수 없는 상황일까? 누르지 않으면 이 장면은 영원히 반복되려나? 나는 누르는 것을 택한다. 이 장면의 재생이 끝나더라도.
“안녕하십니까? 당신은 삶과 죽음의 기착지에 도착하셨습니다. 여행하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낯선 음성이 들렸다. 주위를 둘러봐도 어떤 시설조차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소리를 분명하게 들려왔다. 내 귀에 어떤 장치가 있는 건 아니겠지? 손가락 끝으로 감각이 분명하게 전해졌다. 아무것도 없다. 물론, 내 감각은 아직 멀쩡하다.
“이 상황이 이해되지 않을 겁니다. 지금부터 제가 친절하게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차근차근 제 말에 따르시기만 하면 됩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당신이 앞으로 선택할 목적지, 그곳으로 안내할 담당 매니저 K입니다. 일단 제 이야기를 모두 듣고 나서 궁금하신 부분의 질문을 받도록 하겠습니다.”
“2036년 12월 12일 오전 8:30분, 당신은 자율 주행차로 잠실대교를 건너는 중이었습니다. 기상이 꽤 좋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만 그렇다고 사고가 일어날 법한 불길한 분위기도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운이 없게도 당신의 자율주행차는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하고 말았습니다. 노면의 미세한 결빙을 예측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 점에서는 저희 시스템의 오류를 사과드리겠습니다. 방향을 잃은 당신의 자율주행차 K132호는 결국 빙글빙글 회전하다, 다시 차체의 통제력을 잃고 옆으로 구르기 시작했습니다. 중심을 잃고 만 거죠. 균형을 되찾기 위해 시스템의 모든 장치가 기민하게 작동하기 시작했지만 이미 시스템은 통제를 완벽하게 잃어버렸습니다. 완벽한 통제 불능의 상태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결국 가드레일에 옆문과 보닛을 연속적으로 강타 당하고 아슬아슬하게 가드레일 끝에 걸쳐있다, 힘을 잃고 한강으로 추락하고 말았습니다. 당신은 그때의 충격으로 정신을 곧 잃었습니다만 시스템의 생명 유지 장치 덕분에 목숨은 건졌습니다. 다만 목숨만 건진 것일 뿐, 당신의 신체 80% 이상은 이미 살아있다고 볼 수 없는 상태가 되고 말았습니다. 안전벨트를 생략했더군요, 당신은. 우린 판단해야 했습니다. 당신에게 지속적으로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의료 체계를 제공할 것인가, 중단할 것인가, 고민했습니다만, 해답은 중앙 시스템에 이미 존재했습니다. 당신이 전날 체결한 의향서에서 증거를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죠.”
“우린 절차대로 곧바로 작업에 착수했습니다. 당신의 신체가 더 이상 악화되지 않도록 캡슐로 이동시켰죠. 캡슐 안에는 질소가 가득 충전되어 있습니다. 영하 60도의 상태로 당신은 냉동됐습니다. 당신의 신체는 그렇게 작동이 중단됐습니다. 그러니까 생의 첫 죽음을 겪은 셈이라고 말할 수 있겠군요. 하지만 당신의 정신, 즉 영혼은 시스템으로 안전하게 이관이 됐습니다. 우리는 클라우드에서 잠시나마 당신의 생명을 연장시킨 것입니다. 이런 작업을 하게 된 이유는 당신에게 최종적인 결정을 기다리기 위해서입니다. 지금부터 그 과정을 상세하게 설명드리겠습니다.”
도대체 알 수 없는 소리다. 내가 사고를 당했다? 그래서 불가피하게 내 신체는 냉동 작업에 들어갔다? 그렇다면 내가 동태 신세로 전락했다는 얘긴데, 그렇다면 지금의 나는 무엇일까? 나는 이렇게 생생하게 나를 느끼는 중인데, 이것은 어떻게 설명될까? 어쨌든 매니저의 말대로 내가 거의 사망 직전의 상태라면 도대체 어떤 결정을 기다린다는 건가. 나를 다시 살릴 수 있다는 얘긴가? 내가 알기로는 아직까지 냉동인간을 되살렸다는 보고를 들은 적이 없는데, 대체 어떤 결정을 내리라는 건가.
“그런 생각을 충분히 하실만합니다. 지금부터 제가 드리는 말씀을 차근차근 듣고 나서 그다음에 판단을 내리셔도 무방합니다. 일단 의심은 거두시고 제 이야기를 계속적으로 청취해 주시기 바랍니다. 설명해드린 대로 당신은 거의 죽음에 이른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당신을 절체절명의 상태에서 구해내려고 애썼지만 의학의 한계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그 부분에 대해선 꽤 애석하게 생각합니다만, 그런 생각 역시 시스템이 만들어낸 알고리즘 때문이니, 너무 고맙게 생각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매니저가 건조하게 말했다.
“모니터에 의향서가 출력되는 중입니다. 당신의 서명을 확인해 주세요.”
“네 제 서명이 맞습니다. 어제? 어쨌든 제가 서명한 건 분명히 기억합니다.”
“네 확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는 절차대로 당신의 뇌를 스캔할 예정입니다. 우리는 그 시스템을 ABS(Auto Brain Scan)라고 부릅니다. 이름이 중요한 건 아니니까, 아무튼 그 시스템은 당신의 뇌를 구석구석 집요할 정도로 디테일하게 스캔합니다. ABS가 2.0으로 버전업되고 나서 속도가 비약적으로 상승됐습니다. 물론 당신은 그 시간을 인지하지 않아도 될 만큼 빠릅니다만, 우리의 기술진은 시스템을 진보시키는 데 성공했죠. 우리는 성미가 급한 분들을 만족시켜야 했거든요.”
“ABS는 당신의 뇌를 스캔하고 당신의 인생을 7단계로 나누게 됩니다. 당신은 35년을 살았으니 7년으로 나누면 5년씩의 인생으로 나눠지겠군요. 당신은 7개의 방에서 인생을 감상하게 됩니다. 죽음을 맡게 되면 인생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셨나요? 당신은 7개의 인생을 차분하게 감상하신 후, 어떤 결정을 내리시면 됩니다. 시간이 충분한지 여쭤보실 수 있겠습니다. 현실에서 당신이 체험한 시간과 인생의 방에서 영화처럼 재생되는 시간은 서로 다르게 흐릅니다. 말하자면 빛의 속도로 시간이 상대적으로 움직이는 거라고 생각하시면 되겠네요. 나노 분자라고 이야기 들어보셨죠? 그런 것과 꽤 흡사한 개념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러니 당신은 인생의 방에서 7가지 장면을 체험하시고 결정을 내리시면 됩니다. 결정이라고 하니 의문이 드시겠죠? 그 결정이라는 건, 자 연명치료를 거부한 것처럼 완벽한 죽음, 즉 인생의 스위치를 완벽하게 내려버리는 영원한 무의 세계로 영면할 것인지, 아니면 시스템에서 평화롭게 거주할 것인지 판단하는 일입니다. 아, 당신은 이런 질문을 할 수도 있겠습니다. 내가 만약 35살을 7로 나눈 마지막 후반기의 인생을 선택한다면 7년 밖에 살 수 없냐고 질문하실 겁니다. 당신은 꽤 현명한 분입니다. 그런 결과에 아무런 관심조차 기울이지 않는 사람이 꽤 많은 편이거든요. 우린 당신의 그런 예상까지 모두 파악해서 답을 내립니다.”
“당신이 만약 영면을 선택하지 않고 7가지 인생 중에서 하나를 선택한다면, 당신은 시스템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물론 그 생명은 정신적인 게 전부입니다만, 어쨌든 당신은 삶을 계속 살 수 있는 권리를 누리게 됩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십시오. 당신은 절대로 자신의 삶이 가상이라는 사실을 인지하게 못하게 될 겁니다. 당신은 사고를 당하기 전처럼 아무렇지 않게 삶을 계속 살게 될 테니까요. 우리의 메타 유니버스는 그런 혼돈하지 못할 상황을 정확하게 예측하도록 설계됐습니다. 그러니 당신은 그 안전한 뜰 안에서 행복한 삶을 사시면 됩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영원히 말입니다. 물론 당신이 거주하는 세상, 국가, 직장, 사회, 가족, 음식, 모든 것은 사실상 가짜입니다. 정교한 코드로 작성된 세상 혹은 알고리즘이니까요. 하지만 당신은 의심조차 품을 수 없습니다. 당신은 종교처럼 그 세상을 믿고 따르게 될 것입니다.”
“아, 그러니까 나는 두 가지 선택을 할 수 있다는 얘기네요. 영원히 잠들 것인가, 가짜지만 진짜 같은 세상에서 영원히 살 것인가, 둘 중에서 한 가지를 선택해야 한다는군요. 흐음, 이건 쉽지 않은 선택이군요. 어쩌면 꽤 가혹한걸요? 솔직히 모르겠습니다. 아름다운 죽음이 현명한 것인지, 구차하지만 시스템 안에서 코드로서 살아가는 것이 현명한 것인지, 어느 쪽이 현명하고 어리석은 길인지 분간하기 어렵습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당신의 생명이 연장되더라도 당신은 오늘의 기억, 당신이 시스템 안에 거주하는 코드라는 사실을 절대 파악할 수 없을 테니까요. 물론 가끔 버그가 발견되기도 합니다. 그런 경우에는 어쩔 수 없이 구멍이 생깁니다만, 우린 그런 것을 복구할 힘이 있습니다. 우리는 꽤 안전한 원자로로 운영이 되거든요. 태양이 소멸되지 않은 한 말입니다.”
“그렇군요. 그런데 태양도 언젠가 소멸하지 않나요? 그때는 그럼 예기치 않은 죽음을 맞이할 수도 있겠군요. 전혀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상태에서요?”
“그렇진 않습니다. 화성의 이주 계획이 거의 막바지에 이르러서 나사는 현재 대규모의 클라우드 백업 시스템을 화성 기지에 건설 중입니다.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빠르게 우리의 과학 기술은 진보했습니다. 무어가 이야기한 것처럼 우리는 기하급수적으로 발전하고 있으니까요”
“아, 그렇군요. 그럼 저는 언제까지 결정을 내려야 할까요? 결정을 내린 다음엔 저는 어떻게 행동하면 되나요?”
“네 좋은 질문입니다. 결정을 내리면 벽에는 두 가지 스위치가 나타날 겁니다. 스위치는 현재 올라간 상태입니다. 스위치를 아래로 내리면, 즉 전원을 끄면 당신의 마지막 생명 유지 장치는 종료 절차를 밟게 됩니다. 냉동된 당신의 신체는 곧 화장 시설로 이동하게 된다는 거죠. 그리고 우리는 클라우드에서 당신의 프로그램을 내리게 될 겁니다. 프로세스 종료 메시지 잘 아시죠? 유닉스의 Kill 명령어 말입니다. 우리는 그 명령어를 실행할 겁니다. 그러면 당신의 생명도 딱하고 내려가게 될 겁니다. 암흑의 세계로 돌아가는 것이지요. 하지만 되돌릴 기회는 있습니다. 당신이 실수로 내릴 수도 있으니까요. 스위치를 끈다 해도 약 10분간의 최종 결정 기회를 드립니다. 그러니 실수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잠시 저 혼자만의 시간을 가져도 되겠습니까? 저에겐 어쩌면 긴 시간이 필요할지 모르겠습니다. 아, 아까 말씀하신 인생의 방은 어떻게 재생되나요?”
“네 테이블 위의 헤드 마운드 디스플레이를 착용하시면 됩니다. 착용하시면 7가지의 인생을 바로 재생하실 수 있습니다. 순서는 상관없습니다. 원하시는 대로 천천히 감상하시면 됩니다. 시간은 아주 많습니다. 인생을 깊게 다시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현명한 선택을 할 수 있도록요.”
“네 알겠습니다. 그럼 먼저 영상을 감상하고 판단을 내리도록 하겠습니다. 상세하게 안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네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부디 신중한 선택을 하시길”
그래, 나는 7가지의 인생들을 이제부터 감상하면 된다. 일단 보고 나서 판단하도록 하자. 인생의 불을 끌 것인지 계속 밝혀둘 것인지, 판단은 나중에 해도 늦지 않다. 영상을 끝까지 보고 나서도 판단할 수 없으면 어떡하지? 시간이 충분하다는데, 왜 시간이 쫓기는 기분이 들까. 알 수 없다.
나는 헤드 마운드 디스플레이를 머리에 쓰고 7가지 인생을 감상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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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림그릿
픽션인데 리얼하게 느켜져 빠져들었네요..그상황 묘사를 너무 잘하시네요.,잘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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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flower 🌻
이런 세상이 오겠군요~~~ 존재는 이미 하늘 나라로 갔는데 메티버스에 살아서 메세지 보내고 공간 내의 여러 서비스를 이용하는 아바타가 존재하는 세상, 살아 있는 자손들에게 영향을 미치겠네요~ 캬 비트코인도 좀 남겨 놓고 도메인같은 건물과 땅도 사서 임대해주면 자손들은 그를 어떻게 여길까요? 미래의.세상 글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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