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픽션입니다.
빙글빙글, 똑딱똑딱 세상의 시계는 침묵한 채 규칙적으로 아니 암묵적으로 돌아가기만 한다. 이상하게 오늘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지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요즘 계속 이렇다, 기억이 하나씩 바스러지는 기분.
나는 버스 맨 뒷자리, 가운데 좌석에 앉아 있었다. 손에는 하루키의 <태엽 감는 새 연대기>가 위태롭게 들려 있었으며, 꽤 오랫동안 그의 이야기에 열중하고 있었는데, 어느새 의식을 잃고 정면을 향해 멍하게 시선도 없이 그냥 넋을 놓고 바라보고만 있었다. 다소 흐리멍덩하게 어딘가 정신을 놓고 온 사람처럼, 그렇게 의식을 놓은 상태에서 갑자기 마치 강한 힘에 이끌려나가듯이 앞쪽으로 튕겨나갔다. 발사대 위에서 얌전히 신호를 기다리다 우주로 향하는 첫걸음을 내딛는 그러니까 강렬한 폭발음을 기다리는 우주선의 몸체처럼, 나는 그렇게 갑자기 튕겨져 나갔다. 그때 나는 망상에서 깨어나 현실로 급하게 되돌아와야 했지만 그런 충격으로도 얻어지는 건 없었다.
강한 충격, 발사체가 처음 느끼는 중력, 그것을 향해 스스로 만든 반발력으로 어떻게든 맞서보려 했으나 나는 감당할 수 없는 어떤 자연적인 이끌림에 순응해야 했다. 우당탕, 나는 힘없이 고꾸라진 채 몇 번을 앞으로 굴러서 중간 문까지 다다라서야 겨우 멈출 수 있었다. 아픈 것보다, 어디에 문제가 생겼는지 파악하는 것보다 더 시급한 것은 누가 내 이상한 동작을 지켜봤는지, 그 시선들을 재빨리 거두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다행히 그곳엔 거의 사람이 없었다. 어쩌면 몇 명이 앉아있었으나 그들은 그런 이상 사태에 대해 별 관심이 없었다. 모두가 나름의 할 일을 지닌 채, 그 동작에 꽤 열중하고 있었으니, 30초 전의 내가 하루키에 글에 깊이 빠져있다, 잠시 그곳에서 어긋난 것처럼, 그들에겐 그런 균열이 일어날 리 없었다.
나는 찢어진 곳이 없는지 먼저 확인했다. 다친 곳보다 옷감이 멀쩡한지 확인하는 내가 놀라웠지만, 그건 오래도록 굳어온 나만의 습성이니 딱히 스스로에게 클레임을 걸만한 대상도 받아들이지 못하겠다고 거부할 상황도 아니었다. 그런 사건은 언제든 예고 없이 갑작스럽게 상영되는 단편 영화쯤이었으니까. 훌훌 털고 일어나서 뒤로 돌아서서 태연하게 내가 앉아 있던 그 자리로 돌아가면 되는 간단한 일일뿐이었으니까.
뒷자리, 그러니까 내가 앉았던 동일한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서 나는 일을 떠올렸다. 그래, 오늘까지는 취재를 마쳐야 돼. 더 이상 어떻게 미루겠냐고. 데스크에서는 아침부터 난리가 나 있었다. 원래는 오늘 아침까지 인터뷰 초고를 보내야 했는데, 나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이런저런 이유를 볼모로 삼아 어떻게든 마감을 맞춰보겠다고 그저 거짓말을 꾸며대는 삼류 기자쯤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나에겐 인터뷰이가 필요했다. 자신의 성공담, 어떻게 자신이 여기까지 올 수 있었는지 인생의 드라마를 전달해 줄, 깊고 깊은 무용담 같은 것들 들려줄 인터뷰이가 필요했던 것이다.
물론, 나는 최근 지인이 소개한 기업가 한 명을 만나봤다. 그는 자신이 일궈온 회사에 대해, 자신이 얼마나 많은 경쟁자들을 밟으며 현 위치까지 오를 수 있었는지 아냐며 온갖 부정한 방법 그러니까 뒤로 돈을 쓰는 방법부터, 사교계에 발을 디밀으며 상대해야 했던 정계며 재계의 인사들에게 어떤 접대를 했는지 아냐며 그는 자신의 무용담을 자랑삼아 떠들어댔다. 그의 이야기에는 물론 고유의 진실함이 담겨 있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 이야기를 기사에 실을 정도로 대단한 평가를 내릴 것도 아니고 그가 딱히 원대한 꿈을 이뤘다고도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나는 속으로 “그런 건 기업가라면 누구나 가질 법한 그런 진부한 이야기가 아니냐고, 그런 뻔하디 뻔한 스토리텔링으로 기사를 실을 수는 없다고, 내가 그렇다고 소설가는 아니잖아. 지루한 이야기를 어떻게 그럴싸하게 각색해 주겠냐고” 나는 그 기업가와 인터뷰를 마치며 적당한 때에 멋지게 기사 한 편을 실어주겠다고 말했지만 실제로는 구색 정도만 갖추는 것으로 마무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딱히 그에게 어떤 향응을 받은 것도 아니고 청탁을 받은 것도 아니니 굳이 그의 이야기를 윤색해가며 내 소중한 시간을 소비할 이유는 없으리라.
버스는 계속해서 달리고 있었다. 나는 어디로 가는 중이었을까. 비어 있는 자리, 나는 어디에도 앉을 수 있었지만 하필이면 왜 버스 제일 뒷자리, 거기에서도 정 한가운데에 무의식적으로 앉았던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몇 십 분 전의 내가 결정한 행위를 이해할 수 없었다. 이해한다고 모든 이유가 설득력을 가지는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이유 없이 실행되는 것들에 나는 가끔 소름이 끼쳤다. 어떤 이유가 있었겠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없다면 찾아내야 꼭 한다. 이유의 서랍 속에서 그것을 들춰내어서 그 속을 헤집어 놓는 한이 있더라도 나는 그것을 발견해야 한다. 그런 면에서 나는 탐험가가 된다. 다만 어디에서 무엇을 탐험해야 하는지 목적이 없는, 어느 순간 의미가 짠 하고 나타나서 반갑게 내 등을 두들겨 주는 상상, 그렇게 사소하면서도 갑자기 의미가 자라나버리는 그런 의문의 깨달음 때문에 나는 살아갈지도 모른다.
바깥을 보니 점점 익숙한 풍경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반가운 풍경이 갑자기 짙은 검정으로 덧칠해지고 있었다. 폭우다. 갑작스럽게 하늘에서 파도가 퍼붓듯이 탁한 녀석들이 거침없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신이 분노한 것일까, 어쩌면 하늘에서 커다란 범선이 노를 짓는 걸지도 모른다. 그것에 갇힌 수많은 노예들이 노를 크게 저을 때마다 어떤 바람직하지 못한 소용돌이가 형성되는 것이다. 그 힘은 노예들의 근성과 맞물려 새로운 기세를 탄생시킨다. 기묘한 기류의 흐름과 수증기가 혼합되어 일정하면서도 엄정한 질서가 만들어진다. 그 질서는 작심한다. 세상을 잠재우겠다고, 인간을 쓸어버리겠다고 마치 노예 해방 전선에 합류하듯이. 맹렬하게 도시를 가둬버릴 듯 내려 꽂히는 기세 앞에서 나는 한없이 작은 존재가 되어갔다. 숨을 멈추고 겸손하게 두 손을 무릎으로 끌어모으고 나는 그 힘에 이끌리듯 블랙홀 사이로 걸어가듯 빨려 들어갔다.
버스에서 탈출한 나는, 일단 재난에서 피신해야 했다. 몇 번 고개를 좌우로 돌리다 의무적인 뜀박질을 하기 시작했다. 방향도 없이 무작정 아무 곳으로 뛰었다. 얼마나 뛰었을까. 꽤 오랫동안 발버둥을 쳤고 멀리멀리 도망쳤다고 생각했지만 나는 어디에도 당도하지 못했고 어느 곳에도 도착하지 못했다. 그저 끝없이 내가 숨바꼭질하듯이 어디론가로부터 도망치려고 자맥질 중이었다는 사실 하나만 분명했을 뿐, 단지 뛴다는 사실조차 망각할 정도로 나는 숨 가쁘게 뛰기만 했다. 하지만 호흡이 분명 가쁘게 차올랐으므로 멈추지 않는다면 그 숨이 바깥쪽에서 폭발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그 순간 나는 기계적으로 동작을 멈춰버렸다. 마치, 신나게 달려가던 열차가 어떤 장애물 앞에서 급제동을 한 것처럼, 나는 일순간 멈춰졌다.
내가 멈춰 선 곳은 고서점 간판 위의 작은 처마 밑이었다. 언제부터 이곳에 고서점이 있었을까. 매일 걸어 다니던 익숙한 길이었는데, 어느 순간 이곳엔 고서점이 놓여 있었다. 이상했다. 내 기억엔 분명히 고서점은 보이지 않는다. 각인되지 않은 기억이 어딘가 심연 속에 오랫동안 숨어 있다가 수면 위로 급상승이라도 한 걸까. 도대체 뭐지. 왜 이곳에 고서점이 갑자기 나타났단 말인가. 마치 내가 비를 피할 때라고 속삭여주는 것처럼.
그곳에선 오래된 향냄새가 났다. 굳이 그런 냄새를 피우는 행위를 하지 않아도 그곳이 고서점이라는 건 멀리 100미터 바깥에서도 충분히 알 수 있으리라, 그런데 안쪽에서부터 향이 시작되었음은 코를 틀어막아도 알 수 있었다. 뭐, 딱히 고서점에서 오래된 향이 피어오른다고 이상할 건 없었다. 오히려 그게 더 잘 어울릴지도 모를 노릇이니. 뭐가 문제겠는가. 나는 처마 밑에 서서 무섭게 흙 속에 처박히는 빗방울들의 순종적인 행위를 지켜보며, 음, 저렇게 퍼붓다가는 지구에 커다란 구멍이 하나 생기는 게 아닐까, 망상에 사로잡히는 게 전부였을 뿐.
사내가 나타난 것은 그쯤이었다. 그도 나처럼 우산을 챙기지 않았으리라. 그도 나처럼 변칙적인 상황에 갑자기 봉착했으리라. 그래, 우리는 지금 여기서 잠시 동지가 되는 것이다. 인생의 알 수 없는 여러 기운들에 얽히고설킨 그런 운명의 동지가 잠시 되어보는 것이다. 그런 것도 가끔은 나쁘지 않다.
“기억력이 좋으신 편인가요?” 사내가 말했다.
“글쎄요. 기억력이 딱히 좋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어요. 생각해 보니 예전보다 오히려 감퇴되는 느낌이 들긴 하네요. 나이 탓이겠죠. 아마도.” 사내의 질문에 나도 모르게 대답하고 말았다.
“저는 태어나서부터 기억력이 좋지 못했어요. 아니, 기억력이 거의 없다고 볼 수 있겠네요. 저에겐 10개쯤이 유효했다고 봐야 할까요.”
“음, 10개쯤만 기억한다면 문제가 꽤 생길 공산이 크겠는걸요? 이를테면 아내의 생일이라든가 결혼기념일은 저 외딴곳에 방치될 수도 있겠어요. 우선순위 때문에 뒤로 밀릴 공산이 크니까요.”
“그렇죠. 남자들은 보통 회사에서 일을 해야 하니까, 이런저런 직무 때문에 골치도 썩고 그런 직무와 연관되어서 기억해야 될 게 꽤 많은 편이니까요. 그러니 아내의 일들은 중요하겠지만 의도와는 상관없이 뒷전으로 밀려나겠죠. 고객과의 미팅 약속도 있고 상사의 업무 지시 사항도 있고 점심에 뭘 먹을지 미리 결정도 해야 하니까, 10개의 기억력만 가지고는 일상생활이 꽤 위태로워지겠죠?” 사내가 말했다.
“아내의 입장에서는 서글프겠네요” 내가 말했다.
“그렇죠 서글픈 일이죠 아내에게는…”
우리는 잠시 말없이 그칠 줄 모르는 빗방울의 연속적인 행렬을 지켜보고 있었다. 규칙적인 흐름을 보면서 저 고서점이 잠기면 어떻게 되려나 상상했다. 이미 낡어버린 책들이 젖어버린다면 그나마 남은 값어치마저 사라질 텐데, 그렇게 되면 남은 책들은 사람의 선택을 받지 못하겠구나, 이런 생각을 하니 소외된 아내의 기념일보다 책들의 운명이 더 서글퍼지는 것이었다.
“제 모자란 기억력 말이에요. 그게 꽤나 곤란한 상황을 초래하게 만든단 말이지요. 10개밖에 기억하지 못한다는 걸 처음 느낀 순간에 저는 치매 걸린 게 아닌가 생각했어요. 그런 연유로 10살 밖에 안된 어린아이가 엄마 손에 이끌려 병원에 가게 된 거죠. 치매 진단받는 상황을 생각해 보세요. 주위에 온통 노인들뿐인데, 그 틈에 섞여서 치매검사를 받는 기묘한 장면을요. 사람이 그런 상황에 처하면 자신도 모르게 나이를 더 먹게 된다니까요. 내가 10살이라는 사실이 의미가 없어져요. 그들과 어느새 한배를 타게 된 운명을 맞게 되는 거예요. 아주 멍청이가 된 기분이 들었다니까요”
“그 기분 나쁜 검사를 끝내고 저에게 내린 의학적인 판단은 ‘원인 불명’, 하지만 ‘일상생활에 큰 지장 없음’이라는 타이틀이었어요. 아니 세상에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죠? 현대 의학이 미치는 범위가 고작 그것뿐인가요. 10개의 기억력에 의지하고 살아가야 할 10살짜리에게 내린 진단이 고작 원인 불명이라니요. 저는 그날부터 의사들을 믿지 않기로 했어요. 오직 나만의 힘으로 인생을 살아가야겠다고 결심했어요. 단지 10살 먹은 아이가요. 살아온 날보다 살아야 할 날들이 훨씬 많은 작은 소년에게요.”
그 남자는 계속해서 떠들기 시작했다. 나는 그의 이야기 속으로 어느 순간 굴러들어가서 마치 그곳이 진창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는 흐느끼고 있었다. 자신의 오래된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을 찾아서 그 묵힌 것들을 털어놓을 대상을 물색하기 위해 사냥이라도 나선 헌터처럼.
“그래서 제가 오랫동안 연마해온 기술이 있어요. 사소한 것들, 이를테면 기계적이거나 습관적으로 해야 되는 것들 있잖아요. 아침에 일어나서 세수하고 씻고 출근하는 일? 점심 먹으면 커피 마시고 퇴근하는 길에 마트 들러서 아내가 좋아하는 과일 사 오는 일? 이런 일은 의식하지 않아도 자동적으로 실행하는 것으로 삼아야겠다고 결심하며 그것들을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 고민했죠. 그런데 딱히 실천할만한 궁극의 아이디어가 떠오르는 건 아니더라고요. 그래서 그냥 하자, 하나가 트리거 되면 연쇄적으로 반응이 일어나는 것처럼, 마치 화학 작용이 일어나서 연거푸 다음 동작으로 이어지는, 그런 규칙성 있는 것들로 만들어나가자 하고요. 물론 그걸 익히기 위해 연습 또 연습, 매일 훈련을 해야 했어요. 그 일은 저를 혹독한 삶으로 안내했어요. 하지만 감수해야 했어요. 이 치열한 사회에서 살아남으려면 어린 나이에 치매에 걸렸다는 그런 좋지 못한 판정 따위를 받은 사람으로 낙인찍혀 오해받지 않으려면요. 물론 제 발밑엔 말발굽 같은 게 찍혀 있을 지도 모르죠. 제 발밑을 매일 확인해 봤는데 다행히 그런 건 없더라고요. 어쨌든 실행했어요. 단순하기 짝이 없는 그런 일상적인 것들 말이에요. 1년에 하나씩 습관을 다져나가기 시작해서 지금까지 30개 정도는 무리 없이 하게 됐어요. 겉으로 보면 일상인과 별로 다를 바 없이요.”
“아, 그렇군요. 겉으로 보기엔 이상한 점은 없었어요. 갑자기 옆에 나타나셨던 것만 빼면 제가 받은 첫인상은 다른 사람과 그리 다르지 않네요” 내가 말했다.
“네. 그건 제가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오랫동안 저를 다져왔기 때문이죠. 그런데 그런 평범하면서도 매일 해오는 일들이 문제가 아니었어요. 정말로 중요한 것들,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고객의 오더라든가, 엄마가 병원에 입원했는데 병문안 가는 일이라든가, 누구한테 돈을 빌려준 사실이라든가, 그런 기억은 절대 잊어버리면 안 되잖아요. 그래서 그런 것들을 잊지 않아야겠다. 그런 확정 아닌 확정을 내리며 살다 보니, 제가 처음에 언급한 것처럼 10개 정도의 기억은 별 무리 없이 운용할 수 있겠다는 판단이 든 거죠. 그것도 오랜 시간에 걸쳐서 파악한 사실이지만요”
“아하, 그럼 당신은 10개의 기억을 무리 없이 외울 수 있다. 10개는 적어도 기억상실에 걸린 환자처럼 혹은 1초 전의 기억을 망각한 금붕어처럼 살지 않아도 된다는 얘기네요?”
“네 그렇습니다. 그 사실을 깨닫고 받아들이는데 다소 시간이 소요되긴 했지만, 어쨌든 저는 저 자신을 잘 알게 됐다고 할까요? 비로소 제 세계에서 눈을 떴다고 느끼게 됐습니다.”
“아, 그렇군요. 그런데 10가지 일의 우선순위, 그러니까 어떤 일을 먼저 처리할지는 어떻게 결정하시나요? 저는 그게 궁금해지는걸요?”
“네, 그건 일종의 뭐랄까 이런 문장을 들어보신 적이 있는지 모르겠는데, 혹시 스택형 인간이라고 들어보셨습니까?”
“스택형 인간? 제가 40년 가까이 살아봤지만 저의 영역적인 한계인지는 모르겠으나 도통 그런 말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무슨 탑 같은 건가요?”
“하하, 그런 건 아니고요. 스택이란 게 IT에서 흔하게 쓰이는 용어인데, 음 비유를 좀 해드려야겠군요. 어릴 적에 비스킷 같은 거 담아놓는 깡통, 그런 거 하나쯤 집에 있으셨죠? 엄마가 하루 동안 먹어야 할 분량을 조절해서 깡통에 담아두시곤 했거든요. 엄마는 그런 잘 맞는 용기를 찾는 거에 꽤 능했어요. 말하자면 비스킷의 너비와 딱 맞는 그런 통이라고 해두죠. 아무튼 그 통에 엄마가 비스킷을 담아두면 저는 심심할 때마다 그걸 꺼내 먹곤 했어요. 물론 더 이상 먹지 말아야 할 때는 아주 높은 선반 위에 올려놓는 바람에 꽤 곤혹스러운 지경에 빠진 적도 있지만요. 스택은 그런 비스킷 통을 연상하시면 됩니다. 비스킷 사이즈와 딱 맞는 과자 통, 그 위로 과자가 차곡차곡 쌓이는 개념이 바로 스택입니다. 한 10개쯤, 어떤 통은 20개 정도 담기는 것도 있었지만, 일렬로 쌓아놓으면 보통 10개 정도 담기는 편이었어요”
“아, 그렇다면 당신의 기억력은 비스킷을 담는 과자 깡통 같은 거라는 얘기네요. 과자 깡통, 이거 뭔가 우스꽝스러운데, 그런 광경을 생각하니 지금 초코칩 쿠키가 생각나는군요. 가방 속에 쿠키라도 하나 있으면 좋으련만…”
나는 쿠키를 생각하며 군침이 돌았으나 고서점 앞에서 쿠키를 찾는 일은 무용할 뿐이었다. 남자는 계속적으로 말을 쏟아냈다.
“스택형 인간의 기억력의 한계는 비스킷 깡통으로 보완된다? 이렇게 당신의 모자란 기억력을 해석하면 되겠군요?”
“네 우습지만 그게 맞습니다. 하지만 그런 방식을 도입한다고 해서 기억력을 획기적으로 개선하는 것도, 모자라는 기억력을 보완하는 것도 아니었어요. 그건 단지 임시방편에 불과했던 거죠. 머릿속이 빈 느낌인데, 그 속에 대신 깡통이 들어찼다고 생각해 보세요. 기분이 좋을 리 있겠어요? 아무튼 저는 그 사실을 받아들여야겠어요. 그게 차라리 속 편하다, 그걸 인정해야 나머지 삶을 살수 있다,라고 판단한 거죠.”
“그렇게 한다고 문제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으나 저에겐 새로운 공황 장애 증상이 생겼어요. 그건 말하자면 일종의 강박증이었죠. 그 과자 깡통, 그러니까 스택 안에 할 일 들이 2~3개쯤 유지될 때는 큰 문제가 없었는데요. 말하자면 마음이 편안해졌죠. 그런데 스택에 쌓인 일들이 늘 제때 처리되는 게 아니잖아요. 어떨 때는 저도 미루는 습성을 피할 수 없는 평범한 인간인지라, 꽤 게을러지게 됐죠. 그렇게 되면 스택에 할 일들이 계속 쌓이는 거예요. 비스킷이 꽉 찬 깡통처럼 스택 위에 할 일 들이 계속 쌓여갔죠. 그렇게 쌓여가다 9개쯤 이르면 저는 신경이 극도로 예민해져요.. 누군가에게 끔찍한 일을 저지를 것처럼 극도의 긴장 상태에 빠져들고 말아요. 그럴 때는 옆에서 누가 건드리면 어퍼컷을 한 방 날릴 것처럼 예민한 상태를 넘어서 착란 상태에까지 빠지는 겁니다. 저를 전혀 통제할 수 없게 돼요. 어떤 폭력을 휘두를지 알 수 없게 돼요. 빨리 먹어치워야 하는 거예요. 게걸스럽게.”
“아, 혹시 지금 스택엔 할 일이 얼마나 쌓여 있는지 모르겠네요. 혹시나 당신이 폭력을 휘두른다면 저는 빨리 이곳을 피신해야 할 것 같아서요. 솔직히 말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런 걱정은 하시지 않아도 됩니다. 다행히 오늘 아침에 처리해야 할 일들을 모두 마치고 돌아와서 지금은 스택에 처리할 일이 2개밖에 안 남아 있어요. 요컨대 아주 평화로운 상태입니다. 누가 나를 건드려도 지금은 전혀 폭력적이지 않아요. 아주 유순한 상태죠. 시비를 걸어도 저는 지금 그냥 웃으며 넘어갈 겁니다. 누가 제 따귀를 후려갈긴다 하더라도요.”
“그런데 궁금한 게 하나 있습니다. 당신은 어렸을 때 그 심각한 진단을 받고 나서 일상의 평범한 일들을 처리하기 위해 스스로 기술을 연마해오셨다고 했는데요. 그런데 사회생활하다 보면 10개의 기억력만 가지고는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할 것 같은데요? 저만하더라도 오늘 당장 처리해야 할 일들이 지금 내리는 폭우처럼 쉴 새 없이 폭격 중인데요. 대충 헤아려 봐도 20가지 목록이 넘어가는데 그렇게 저장 공간이 모자랄 때는 어떻게 대처하죠?”
“좋은 질문이십니다. 그럴 때 아주 요긴한 방법이 하나 있죠. 이것도 제가 고안해낸 기술인데요. 10개의 스택이 차 버렸을 때, 처음엔 어떤 일 하나를 선택적으로 버려버릴까 생각도 해봤어요. 그런데 그렇게는 도저히 못하겠더라고요. 이건 완벽하지 않다. 이건 비겁하다. 뭔가 대안이 있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다, 제가 대화로 다른 사람을 설득하는데 꽤 능하다는 판단이 들었어요. 제가 설득 기술 하나는 끝내주거든요. 실제로 그 일로 밥 벌어먹고 살고 있기도 하고. 어쨌든 저는 사람 정신 홀리는데 아주 능해요. 저와 대화를 나누고 나면 그 사람을 저의 세계로 깊이 빠져들게 할 자신이 있어요. 이를테면 저를 늪으로 만들어버리는 거예요. 상대방이 한 발을 들이밀면 나머지 발도 자동적으로 합류할 수밖에 없도록, 불가항력적으로 공기를 완전히 바꿔버리는 거죠. 그게 제 능력이에요.”
“와, 사람의 정신을 홀린다? 뭐 최면 같은 건가요? 저는 사이비 종교의 교주 같은 게 떠오르는데요?”
“음, 그것과 비슷할지도 모르겠어요. 찾아보면 조상님 중에서 그런 방면으로 명성을 떨친 분이 계실지도 모르죠. 뭐 저는 족보란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서 그 부문에 대한 명확한 증거를 찾을 수는 없지만, 어쨌든 제가 그런 재능을 가지고 있다는 건 확실합니다. 그걸 실험으로 확인했거든요?”
“실험요? 무슨 인체를 대상으로 임상 실험이라도 펼쳤다는 말인가요?”
“그렇게 해석하셔도 무방합니다. 저는 저의 모자란 기억력, 나날이 늘어가는 할 일 들을 처리하기 위해 불가피한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날부터 헌팅을 시작했던 거죠. 대상을 주변에서부터 물색하기 시작했어요. 포위망을 만들어 놓고 그 안에서 포집된 대상에게 접근하기 시작했죠. 그리고 아주 우연하게 그 대상과 대화를 시작하도록 상황을 만들어요. 모든 것이 자연스러워야 해요. 인위적으로 조작됐다는 느낌이 전혀 들어서는 안돼요. 그 대상에 젖어들어가게 만들어야 하니까요. 자신의 바지가 아래쪽부터 서서히 젖어서 상반신까지 올라온다는 사실조차 직감하지 못하도록 아주 서서히 물들어가게 하는 거죠”
“마치 제 바지가 지금 빗물에 점점 젖어들어가는 것처럼요?”
“네 바로 그런 거죠.”
“그렇게 어떤 대상을 결정지으면 그러니까 헌팅의 대상을 확정하면 저는 그 먹이의 목 부근을 꽉 물어버립니다. 아, 물론 실제로 문다는 건 아니에요. 제 앞니가 짐승의 송곳니처럼 강력하지는 않아요 하하. 뭐, 그렇게 사냥감을 요리하기 시작하면 저는 대화법으로 그의 경계를 허물어뜨리고 허술한 모양으로 다가가서, 제 대화에 깊이 편입시킨 후, 그의 정신세계를 해체하기 시작해요. 마치 레고 조각 분해하듯이요”
“레고 조각 분해라. 인간이 그렇게 분해될 수도 있군요”
“네 그렇게 분해되죠. 철저하게 어쩌면 태어난 처음의 시점으로 돌아가듯이 어느 순간 예의 풀려버립니다. 정신세계란 것이…. 그저 나중엔 무의 세계만 남는 거죠. 아주 허무해지는 거죠. 그다음엔 저의 의식의 세계를 풀어 놓아요. 비스킷을 차근차근 깡통에 쌓듯이 새로운 스택을 만드는 거죠. 저만을 위한 전용 용기를 만드는 거예요. 부르면 언제든 나타나는 마치 개인 비서처럼, 언제든 부르면 나타나서 제가 해야 될 일들을 안내하고 실행까지 해주는 거죠.”
“좀 무섭군요. 그러면 거의 좀비로 만드는 거 아닌가요?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은 어떻게 되는 거예요? 자신을 완전히 잃어버리는 건가요?”
“그렇진 않아요. 일상생활하는 건 큰 무리가 없어요. 평소처럼 살면 돼요. 다만 자신의 정신세계가 누군가에게 사로잡혔다는 사실은 망각하게 되죠. 은연중에 붙들려서 갑자기 이끌리듯, 결국엔 내가 아닌 사람처럼 행동하게 돼요. 자신의 인생보다는 저의 인생의 범주 안에서 머물게 되니까요.”
“그렇다면 거의 숙주가 되는 거네요. 프로메테우스에 나오는 에일리언이 기생하는 숙주, 그런 거 말이에요. 영화에서는 기생이 끝나면 숙주는 버려지던데요? 그럼 당신에게 사로잡힌 숙주는 어찌 되나요? 영화처럼 목숨을 잃게 되나요?”
“영화를 많이 보셨군요. 영화처럼 숙주를 더럽히지는 않아요. 하지만 숙주는 영원히 자신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하게 되죠. 기계적으로 이끌리는 삶을 살게 되겠죠. 자신이 좋아하는 게 무엇이었고 무엇을 능숙하게 잘 했는지, 누구를 깊이 사랑했는지, 그런 간단한 사실조차 잃게 됩니다. 아니, 그런 게 없어도 사는 건 무방하다고 생각하게 될 거예요”
“아, 그렇군요. 그런데 진짜 아까부터 궁금한 게 하나 있었어요.”
“뭔가요? 말씀해보세요.”
“저, 지금 등에 살짝 소름이 끼치려고 하는데, 저는 어떻게 되는 건가요? 저도 혹시 당신에게 세뇌 그런 걸 당하게 되나요?”
“당신은 의심이 참 많은 사람이로군요. 자 대화에만 열중하세요. 쓸데없는 질문은 삼가시고요. 저 고서점 안에서 풍겨 나오는 향에 집중해보세요. 그윽한 향이 뭉근하게 퍼져가는 걸 감상하세요. 부유해나가는 공기의 흐름을 느껴보세요. 그 파장의 깊이를 느껴보세요. 의심하지 마시고요. 오래된 책의 냄새를 맡아보는 것도 도움이 될 거예요. 거부하지 말고, 당신의 운명일 뿐이에요. 모든 기억을 잊어버립시다. 냄새에 계속 집중하세요. 뭔가 피곤을 느끼면 말씀해 주세요. 당신 작업하는 데 참 힘들었어요. 기억하나요? 오늘이 대체 몇 번째 대화인지? 왜 이렇게 사람을 성가시게 만들어요? 기억이 나지 않는다면 이제 거의 마무리된 셈이네요. 기억나는 게 하나도 없죠? 그렇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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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림그릿
잘읽었습니다. 이런소재는 어떻게 생각해내시는지 놀랍네요~~
공대생의 심야서재 뉴스레터
읽어주셔셔 감사합니다. 소재는 그냥 평소에 정리해두는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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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flower 🌻
스텍형 인간이라~~ 코딩과 관련한 일을 하시면서 사유의 확장과 더불어 상상력의 영역으로까지 넓히시는 공심님의 글~ 멋지네요그 낯선 사내의 숙주가 되기가 이번엔 힘든 케이스였는데 거의 마무리 단계로군요~^^ ㅋㅋㅋㅋㅋ 내 눈을 바라봐~~~ 허경영이 갑자기 생각났어요.^^ 농담인거 아시쥬?
공대생의 심야서재 뉴스레터
코딩을 하다 보니 이쪽으로 생각이 자연스럽게 전개됐습니다 ㅎㅎ 사유의 확장까지는 모르겠고 생각이 전환된 것 같기는 합니다. 허경영 ㅎㅎㅎ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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