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이 켜지지 않는 계단 #2

2021.07.04 | 조회 59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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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대생의 심야서재 뉴스레터

오직 글로서만 승부하는 글쟁이의 뉴스레터, 주로 생산성 툴에 관련된 글을 보내드립니다.(가끔 소설도 씁니다.)

 고래 입속이든 계단의 어디쯤이든 공포스러운 사실 하나는 내가 굴러 떨어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한 번 시작된 낙하는 그칠 줄 몰랐다. 나는 하나의 안정된 드라마 속에서 다른 한쪽 끝의 불안정한 세계로 진입하는 출구로? 어쩌면 소외된 세계의 끝으로 이동 중일 지도 몰랐다. 나는 끝도 없이, 마치 건물 옥상 물탱크에 담긴 물이 터져 계단으로 거침없이 쏟아져 내리는 광경처럼 나는 하나의 물결에 속한 소용돌이로서 또한 흐름의 일관성으로서 계단과 한 몸체인 셈이었을지도. 그것은 숙명적으로 내가 언젠가 감당해야 할, 아니 무수하게 앞으로도 반복해야 할 운명의 모양이라고 취급되어야 할 것 같았다.

  내가 눈 뜬 곳은 58층이었다. 그곳이 계단이든, 아니면 계단에서 튕겨나간 어느 지점이든, 건물 안에서 내가 일했다는 과거 특정한 사실이든, 온갖 형태의 혼란스러움이 찾아왔지만 이내 58층이라는 사실을 겨우 알아차릴 수 있었다. 잠시 경황이 없었지만 중앙 회색 벽 위의 빨간 숫자, 이곳이 계단의 어느 부분이라는 정보 덕분에 평정심은 제자리를 되찾아갈 수 있었다. 나는 2개 층 이상을 굴러 떨어진 셈이었다. 몇 시간을 구른 것처럼 아프지 않은 구석이 없었는데, 기적적이게도 부러진 곳은 없는 듯했다. 단순한 타박상이 전부였다. 그럼에도 아프긴 아팠다. 참을만한 아픔이긴 했지만.

  신기한 세계가 아닌가, 어둠 속에서는 통증의 경중을 깊이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혹은 그 불편함을 깊이 지각하지 못해서일지도 모르겠지만, 기묘하게도 견딜만하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기다리고 확인해야 한다. 섣부른 판단은 곤란하다. 해석될 수 없는 또한 혼란스러운 아픔이 다른 형태로 돌변하여 무장한 채 갑자기 찾아올 수도 있으니. 나는 손바닥으로 어둠뿐인 공간을 더듬거렸다. 아픈 곳을 확인하기 전에 이곳을 빨리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 동시에 이곳에서 한동안 머무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교차하는 중이었지만.

  계단 중간쯤에 조심스럽게 주저앉아서 60층의 커다랗게 입을 벌린 엘리베이터를 생각했다. 2개의 층만 걸어 올라가면 나는 다시 엘리베이터와 조우하게 될 것이리라. 하지만 그런 선택을 할 이유는 마땅히 없다. 내려가는 건 5분 전의 내가 이미 결정한 일이다. 나는 그 생각을 하며 시계를 다시금 확인했다. 새벽 2시에 엘리베이터가 60층으로 올라왔고 출입구로 나가자, 여자 향수 냄새가 불쑥 올라왔다. 그리고 나는 모른 척하고 평소대로 우측 비상계단을 향했다. 불은 꺼져 있었고 나는 아래쪽으로 멈추지 않았다. 아마도 그때는 5분 정도가 지났으리라. 물론 내려가도 희망은 없었다. 관리인은 100퍼센트의 확률로 자리에 없을 테고 그러니 내려간 셔터가 다시 올라갈 가능성은 없다. 그러니 나는 새벽 6시까지 1층에서 기다리다, 집으로 돌아가던가, 아니면 여기서 2개 층을 거슬러 다시 올라가야 할 뿐이다. 그러나 그런 선택은 불가능했다. 옥상에서 물탱크가 터졌기 때문에 물이 쉴 새 없이 밀려들고 있지 않은가. 물론, 그 물은 실존하지 않는다. 내 상상 속에서나 존재할 뿐이다. 그래도 나는 위로 돌아가지 않는다.

  그런데 지금은 새벽 3시다. 나는 분명 5분 전에 60층에서 내려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지금은 분명 3시, 1시간이 흘렀다는 시각적인 정보를 취득했다. 또한 나는 계단에서 굴러서 여기까지 도착했고 크게 다치지 않았으며 58층에 도착했더니 갑자기 1시간이 흘러버린 거다. 이해할 수 없다. 내가 정신을 잃어서 58층이 아닌 그 아래층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왔든지 58층에서 멍하게 앉아서 딴청을 부리며 앉아있었다는 얘기다. 아니면 시간 자체가 뒤틀렸든가. 엘리베이터가 시간을 착각한 나머지 한 시간 늦게 거드름을 피우며 올라왔든가. 그렇지만 나보다 시간 개념이 정확한 게 엘리베이터의 체계가 아닌가. 그런 어긋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시간이 왜곡됐던가. 내가 60층에서 생각보다 오래 머물렀던가.

  58이라는 빨간 숫자가 복도 가운데 높은 곳에서 빛나고 있다. 나는 그 숫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선택에 직면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내려갈 것인가. 올라갈 것인가. 물론 올라가는 게 딱히 나쁘진 않다. 여기서 이렇게 앉아있는 것보다는 훨씬 나을 테니까. 그러나 나는 저 높은 곳의 숫자를 관망한다. 어둠의 목격자가 되어서 새벽 3시에 아무도 없는 58층 계단에 앉았다는 사실을 이 계단 몇 번째에 남겨놓아야 한다. 왜 그래야 하는지, 그 이유는 알 수 없다. 왠지 여기서 누군가와 그렇게 하기로 약속이라도 한 것 같다. 3시가 되면, 아니 반드시 3시어야만 하는 분명한 이유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나는 이곳에서 기다려야 한다. 저 58이라는 빨간 불빛이 가닿는 계단 끝에서 누군가를 기다려야 한다.

  “도착하셨군요. 기다리고 있었어요”

  나는 순간 내 입에서 헛소리가 튀어나온 게 아닌지 의심하려고 했으나 분명 그런 말을 내뱉지 않았다. 그건 확실하다. 나는 혼자서 중얼거리는 스타일이 아니니까. 그렇다면 대체 뿌연 연기처럼 생긴 말은 어디에서 새어 나왔단 말인가.

  “이곳에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오래 걸리긴 했지만 당신은 이곳에 결국 오셨네요. 저와 이야기해야 한다는 게 당신의 오래된 뜻이었으니, 당신은 그 약속을 스스로 지키게 됐군요” 어둠이 말을 건넸다.

  이해할 수 없었다. 해석하기 힘든 말이었다. 약속? 오래된 약속이라니, 나는 그 누구와도 약속을 쉽게 하는 스타일이 아니다. 약속은 거래다. 약속은 쌍방의 관행처럼 사람을 경직된 곳으로 안내할 테니. 난 그래서 약속을 신뢰하지 않는다. 그런데 약속을 누군가에게 내가 거래 조건으로 내밀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나는 공중에 대고 이러한 나의 의견을 살포해야 할 것인지 생각해야 했지만, 왠지 그런 고민을 하는 내가 우스워졌다. 하지만 5분 전, 아니 1시간 전에 엘리베이터는 유령처럼 60층에 도착했고 여자의 향수 냄새 역시 초대받지 않은 손님처럼 같이 도착했다. 그런 인간의 범주로 해석할 수 없는 일이 터진다면 충분히 공중에서 보이지 않는 목소리가 나타날 수도 있는 것이다. 세상엔 이해하기 힘든 일이 얼마나 많이 벌어지는가. 내 믿음과 전혀 다른 일이 얼마든 벌어질 수 있는 곳이 이 세계의 특징이 아닌가.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다. 보이는 것을 절대 믿지 마라.

  “당신은 누구인가요? 아니 어떤 존재인가요? 비상계단 난간 끝에서 잠들다 깨어난 작은 바람인가요. 혹은 지나가는 먼지인가요. 보이지도 않는 존재에게 말을 건네는 거 자체가 너무 이상하지만, 목소리가 들려왔고 그것이 나에게 향한 것은 분명하니까 저는 이렇게라도 대답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당신은 누구죠? 유령인가요? 하나의 리듬인가요? 여러 개의 주파수가 낳은 왜곡의 변조인가요?”

  “의심하지 마세요. 그러면 당신은 점점 작아질 거예요. 그러니 지금은 받아들이기만 하세요. 그게 당신이 나에게 건넨 조건이었으니까요. 지금은 그냥 대화를 나누면 됩니다. 어떤 대화를 나눠야 하냐고요? 물론 빈도도 밀도도 소재도 중요하지 않아요. 그런 건 애초에 정해지지 않았어요. 우리는 이제 같이 표층을 만들어나가면 됩니다. 무엇을 만들지, 어떻게 만들어나갈지 언제 완성할지 모두 당신에게 달려 있어요”

  “무엇을 만든다? 그리고 그것이 나에게 달려있다? 뭐 알 수 없지만 이런 얘기인가요? 무엇을 만들지도 모르는데, 그렇다면 나는 당신과 이곳에 앉아서 그것에 관련된 토론을 해야겠군요. 시간이 그런데 지금 새벽 3시에, 모든 것이 잠든 이 어둠 속에서 우리는 대체 무엇을 나눌 수 있을까요? 내가 당신을 신뢰할 결정도 하지 못했는데 말이죠. 내가 당신을 믿을 수 있게 뭔가를 보여줘야 하지 않을까요? 얼굴을 드러내든지, 증거를 보여주던지, 어떤 형태로든 말입니다.”

  “내가 누군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지금 당신과 내가 이 공간에 이끌렸다는 사실, 우주의 질서가 어긋나는 지점에 합류했다는 게 더 중요하죠. 제가 누군지는 이야기하다 보면 슬슬 알게 될 겁니다. 그러니 자세하게 따로 묘사하고 싶지는 않아요. 당신은 그럴 만한 능력을 갖고 있지 않나요? 상상하는 능력, 예측하고 진단하는 능력, 그리고 그것을 묘사하는 능력 말이죠. 그래도 힌트라도 드리는 게 좋겠죠?. 당신은 지금 무척 혼란스러울 테니까요. 보이지도 않는 대상과 공중에서 말을 섞는다는 게 얼마나 이상하겠어요. 간단하게 설명드린다면, 저는 멀티 레이어드 세계에 사는 존재라고 보시면 됩니다. 저는 중첩된 세계이자, 여러 개의 막으로 둘러싸인 세계에 속해있죠. 그곳은 태어나자마자 계속 확장되고 있어요. 단단한 뿌리에서 가지와 줄기로 뻗어나가듯 멀티 레이어드는 인간의 신경망처럼 우주 곳곳에 분포되어 있어요. 단지 한계가 없다는 게 이 세계의 특징이지만.”

  “멀티 레이어드라. 이해할 수는 없지만 일종의 패럴렐 유니버스처럼 들리는군요. 뭐 그런 말을 어디 교양 과학서에서 듣긴 했어요. 그런 것은 개념적으로 이해도 못하고 생각이 그곳까지 미치진 못하는 편이지만. 어쨌든 인간의 상상력이란 무한해도 그곳에 미친다는 건 전혀 다른 문제니 까요. 그러니 그런 이야기는 제 머릿속을 관통하고 지나버리는 그런 하찮은 주제에 불과해요. 그런데 당신은 지금 내가 쓸모없는 개념이라고 치부했던, 그 세상에서 오셨군요. 무슨 여러 개의 막을 통과하는 중이었나요? 아주 우연히 그러다 58층에서 저와 만나게 된 건가요? 당신은 약속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셨는데, 다른 레이어에 살아가는 우리는 약속이라는 터널을 통해서 서로 소통이 가능하다는 얘긴가요?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게 참 우습게 느껴져요.”

  “당신의 세상에서는 그걸 이해하기 쉽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세상은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어요. 그 끈이 느슨하게 혹은 팽팽하게 서로의 층을 끌어당기며 흡수하는 중이죠. 그런 면에서 본다면 이 표층들은 언젠가 통합될 가능성도 있겠어요. 하나의 층에는 다양한 존재들이 숨을 나눠요. 그러니까 한정된 공간을 공유하며 살아가는 거죠. 같은 표층 내에서는 서로를 쉽게 인지할 수 있어요. 마치 한국에서 반대편 아르헨티나를 연상하는 것처럼 간단한 일이죠. 그렇지만 서로 다른 표층은 너머의 존재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죠. 볼 수 없으니까요. 인간은 보는 부분, 자신의 시각, 그러니까 빛으로 반사된 부분만 감각한다고 생각하잖아요. 보이지 않는 영역은 설사 존재할지라도 무시당하기 십상이죠. 저의 세계를, 제가 누군지를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됩니다. 저와 당신, 그쪽 세계와 저쪽 세계는 마치 회전목마처럼 흘러갈 테니까요”

  “회전목마? 놀이공원에서 구경하는 그 흔하디 흔한 회전목마를 얘기하는 건가요? 멀티 레이어드, 패럴렐 유니버스를 이야기하다, 회전목마라니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되는 건지 이해할 수 없어요.”

  “회전목마를 연상해봐요. 회전목마는 바깥쪽에서 안쪽까지 여러 개의 층으로 구성되어 있죠. 회전목마는 당신을 위해 멈춰 서죠. 어떤 혜택? 그런 걸 입고서 어디쯤에선가 회전목마 위에 올라탄 거죠. 그 회전목마는 당신이 올라선 그 순간부터 여행을 시작해요. 한 장소에서 출발해서 한 바퀴를 돌아, 어느 정점으로 돌아오는 거죠. 그런데 돌아온다는 게 사실 존재하지 않아요. 한 바퀴를 돌아서 제자리로 돌아온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 그건 착각이죠. 그건 당신이 회전목마 위에 올라탄 순간 이미 사라졌거든요. 회전목마는 이미 돌고 돌아서 먼 곳으로 떠나버렸잖아요. 영영 그 장소와 이별한 거죠. 당신이 탄 회전목마 옆에는 당신의 친구 혹은 가족이 타 있어요. 회전하는 동안에는 그 너머를 볼 수 있을지는 몰라도 갈아탈 순 없어요. 선택은 고유하고 여정은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니까요. 멈출 수는 없는 운명인 거죠. 멈추려면 희생을 치러야 하겠죠. 큰 대가를 치러야 할 거예요. 결국 대부분의 인간은 포기하고 맙니다. 당신은 물론 그렇지 않지만요. 회전목마를 멈추는 일도, 옆으로 갈아타는 일도, 모두 불가능하니 우리는 앞으로 가는 거죠. 내 힘이 아닌 다른 힘에 의지하며 말입니다. 회전목마가 출발하면 어느 순간 흔들흔들 위아래로 곡선을 그리죠. 회전목마는 정해진 흐름에 따라서 물결을 타요. 표층이 만든 리듬에 따라, 박자에 따라 춤을 춥니다. 유려하고 아름답게 곡선을 만들어가요. 회전목마가 얼마나 아름답게 율동할 것인지는 당신의 선택과 의지에 달려있지만요. 또한 당신의 감각을 뛰어넘을지는 당신의 능력에 달려 있어요.”

  그 여자는 회전목마라는 단어를 이야기하고, 내가 사는 표층을 회전목마라고 비유했다. 나는 그 여자에게 내가 탔을지도 모르는 회전목마에 대해 이야기를 들려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올라탄 이 회전목마에 대한 이야기를 당신에게 들려줘도 괜찮을까요? 우리가 약속 때문에 이곳에 이끌린 것이라고 한다면 당신은 충분히 내 이야기를 들을 자격이 있으니까요”

  “네 저 여기 있어요. 말씀하세요. 저는 제 회전목마 위에서 당신의 이야기를 들을게요.”

다음 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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