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를 오래 다니면서 참 많은 것들을 배웠을 것이라고, 사람들은 기대합니다. 그러나 빠른 사람들은 더 빠른 사람들에 의해 느린 사람이 되고, 잘난 사람은 더 잘난 사람 앞에서 못난 사람이 되는 세상인지라, 내가 가진 지식은 오만이 되고 능력은 무능력이 되고 맙니다. 혁신이라는 녀석은 얼마나 잽싼지 그 단어가 무슨 뜻인지 헤아리기도 전에 수많은 사람을 뒤처지게 만듭니다. 세상엔 차갑게 시린, 날카로운 변화의 바람이 불고 눈을 뜨고 있는 게 고작인 우리는 과연 무엇을 알고 있어야 할까요. 정말로 많은 사람이 우울하지 않은 법조차 잃어버렸습니다.
어린 양들을 생각합니다. 나는 이렇다 할 명함이 없어서, 착한 성품을 인정받아 <어린양>이라고 불릴 수 있는 그들에게 질투심이 듭니다. 그런데 어린양을 뜻하는 agnus는 어린양이 agnoscit(안다)는 말에서 유래했습니다. 어린 양들은 무리 속의 제 어미의 목소리를 알아볼 수 있습니다. 어미 또한, 수많은 양 속에서 제 새끼의 울음소리를 따라가 젖을 물려줄 수 있습니다. 어린 양들은 제 어미 말고는 알지 못합니다. 새끼가 어미의 품에 안길 줄 알고 어미는 새끼를 품을 수 있다면 그 외의 일은 알아서 무엇하겠습니까.
우리는 필연적으로 무리 속에 존재하면서 외치거나 울지 않고서는 존재를 인정받지 못합니다. 외로움은 땅과 같아서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딛고 사는 것입니다. 그래도 다행입니다. 도시에는 사람이 가득한데도 전원을 끄는 손짓만으로도 세상과 분리될 수 있어서 늘 불안에 떠는 우리가, 조급하게 고쳐 쓰지 않아도 되는 진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몸을 뉘이고 싶은 따스한 사람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본래는 따뜻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입니다. 오늘 어린 양들이 떠오른 것은 울음을 전하고 싶은 우리 어머니가 생각나서 그런 것 같습니다. 기억은 나지 않지만, 본능적으로 그를 향해 울음소리를 내는 법은 날 때부터 알았거든요. 대학원생이라는 이름표만 떼면 세상의 유령 같은 내가 실재한다는 것은, 내 울음의 방향이 변하지 않고 있다는 것일까요.
내가 아닌 누군가는 어떤 어린 양이었을지 헤아리다가, 이렇게 짧은 편지를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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