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생활을 포함해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주위 사람들이 누군가에 대해 가지고 있는 평가의 교집합, 소위 평판(reputation)이 자연스레 따라 붙는다. 성격에서부터 취미, 업무 능력, 대인 관계, 출신 학교, 심지어 가족에 대한 신상까지 함께 언급되고 평가된다.
회사에서 매년 인사 시즌이 되면 누구를 받을 것인가에 대해 인사권자들 간에 치열한 다툼이 벌어진다. 이 싸움에서 이긴 승자는 1년을 큰 트러블 없이 잘 보낼 수 있고, 실적도 평균 이상은 보장 되지만, 패자는 쉽지 않은 1년을 보낼 수 밖에 없다.
팀장 생활을 돌아 보면, 첫 해는 운이 좋게도 아주 좋은 팀원 분들을 만나 잘 지낼 수 있었던 것 같다. 초임 팀장임에도 불구하고, 전임 팀장이 승진을 앞둔 고참이었다 보니 좋은 팀원들로만 팀을 잘 꾸려 놓았던 것이다. 나는 거기 공짜로 올라타 코로나 시국임에도 불구하고 큰 트러블 없이 재미있게 회사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주변 동료 팀장들이 팀장 못해 먹겠다고 불평하고 특히 MZ 팀원들 때문에 힘들다고 할 때도, 다른 팀장들은 리더쉽이 부족해서 그런 것 아닐까 교만한 마음을 먹기도 했다.
3년전 이사장님의 배려로 모 본부 제도팀장으로 발령 받고, 승진도 바라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찾아왔다. 정기 인사 시즌이면 좋았겠지만, 7월이라 좀 갑작스러웠지만 승진을 노려볼 만한 자리이고, 이사장님이 밀어준 상황이라 몇 달만 고생하면 되겠다 싶었다.
팀에 가보니, 예전부터 세평이 좋지 않은 직원이 있었고 주변에서도 경고와 우려를 전해왔다. 설상가상 그 문제의 팀원이 편 가르기를 시전 하는 바람에 팀 분위기도 엉망이라 팀원끼리 인사도 안하고 지내고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 때까지만 해도 나는 오만했고, 나 정도면 어떤 직원이라도 에이스로 거듭나게 할 수 있다고 믿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 얼마나 모자란 생각인가? 미치지 않고서야...)
결과는 참담했다. 새로운 팀으로 발령 받고 불과 5개월여 만이다. 억울한 마음에 핑게를 대보자면, 그 직원은 성과나 근태가 좋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인사 발령을 받은 첫 날부터 자기는 승진과 연수를 해야 하니 무조건 평가 S를 달라고 끊임없이 요구를 해왔고, 나는 그러기 위해서는 주변 동료들이 인정할 수 있는 근태와 실적을 보여주라고 하며 즉답을 거부했다. 이후 이 직원은 사소한 내 말 한마디 한마디를 걸고 넘어가 '직장내 괴롭힘' 프레임을 덧씌워 협박하기 시작했고, 창피한 얘기지만 결국 나는 그 직원에게 굴복해 S를 줄 수 밖에 없었다. 그 과정에서 내가 치른 대가는 참혹했다. 그 직원이 5개월 내내 하도 내 험담을 온오프라인 상에서 하고 다니다 보니 내 리더쉽 평가(상향식 평가)는 박살이 났고 승진도 물 건너 갔다. 심지어 노조에서 실시하는 워스트 보스에도 선정되었고, 회사 익명 게시판에서는 말도 안되는 유언비어로 조리돌림 당했다.
올 해 정기인사에서 어쩌다 보니 평판이 좋지 않은 직원을 2명이나 받아야 하는 일이 발생했다. 내가 힘 있는 자리였다면 모를까 이제 저물어 가는 팀장이다 보니 회사에서도 큰 성과를 기대하지 않는다는 차원에서 여기저기 배치 후 평판 때문에 거부 당한 인력을 떠 넘긴 모양새였다. 임원에게 찾아가 그냥 혼자 일해도 좋으니 안받겠다고 거부도 해봤지만 소용 없었다.
같이 일해 보니 평판은 과연 평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다독여가며, 업무 시간 중 휴게실 가서 몇 시간씩 잠을 자고 와도, 기분에 따라 행동하고 매일 지각해도 다 그러려니 하며 하루하루 지냈다. 심지어 한 직원은 승진이 하도 간절하다고 하면서, 과거에 평판이 안 좋았던 것은 자기를 시기질투 했던 여직원들 때문이라고 하기에 그 말을 믿었고, 그 다음부터 성과가 바로 날 수 있는 업무를 밀어주고, 평가도 S 주고, 대표이사 표창까지 추천해줬다. 짧은 기간에 나름의 성과가 나오고, 그 결과가 신문에 발표되고, 평가 시즌에 표창까지 상신 해 주니 이 직원도 나름 잘 따라오는 것처럼 보였다.
역시 나는 리더쉽이 있어, 난 틀리지 않았어라는 착각도 잠시. 사람의 본질은 바뀌지 않는데 내가 뭐라고 사람을 바꿀 수 있다는 말인가?
바뀌었다고 믿었던 직원은 평가 시즌이 끝나고 평가 결과 본인이 원하던 S가 나오지 않자 바로 옛날 버릇이 나오기 시작했다. 평가 결과가 나오던 날 본인 S 못 받은 게 혹시 내가 S를 안줘서 그런 것은 아닌지 나를 회의실로 끌고가 취조하더니, 기분 나쁜 티를 팍팍 내면서 근무시간도 끝나지 않았는데 바로 퇴근해 버렸다. 다음 주 위원회 안건을 정리 발송해야 하는데 다음날 휴가 내버리고, 결국 안건은 다른 사람과 내가 작성해야 했다. 어디에선가 본 것만 같은 뻔한 전개, 뻔한 결말.
S를 나한테 맡겨 놨나? S를 받으려면 동료 평가에서도 S를 받아야 하는데, 그건 본인의 몫이지 어찌 내 책임이란 말인가? 나는 우리팀 에이스 직원에게 양해를 구하고 미안하다고 사과까지 해가며 본인 S를 챙겨 줬건만. 윗 사람에 대한 예의도 동료에 대한 미안함도 없다. 그저 본인의 사리사욕만 앞설 뿐.
사람은 고쳐 쓰는 것이 아님을 다시 한 번 깨닫는다. 평판이 왜 중요한지 다시 한 번 깨닫는다. 평가와 상관 없이 1년 내내 성실하고 일관된 태도를 유지 할 수 있어야 하는데, 평가 전과 평가 후가 이렇게 다를 수 있다니. 본인을 걱정해 주고 하나라도 더 챙겨 주려 노력한 상대방의 마음을 서운하게 하고 오히려 적으로 돌리다니. 회사 다니며 자기를 응원해 주는 상사 하나 만나는 게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도 모르다니. 그 직원도 참 어리석다. 회사가 학교나 교정 시설도 아닌데, 인간이 되기를 기대하고 인간적인 모습을 기대한 나 역시 어리석었다. 사람은 고쳐 쓰는 거 아니다. 평판을 이기는 평가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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