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로역에서 9(구)시에 만나!
지하철 1호선 구로역은 경인선과 수원선이 만나는 분기점이다. 거기서 그녀와 만나기로 했다.
1989년 무덥던 여름. 난 부천에 살았고, 그녀는 수원에 살았다. 중학교 동창이었던 그녀는 이름도 얼굴도 무척이나 예뻤다.
우리의 인연은 1987년 중학교 3학년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나는 전교 회장을 맡고 있었는데, 어쩌다 보니 전교 조례 시간에 저소득층 가정에 물품을 나눠주는 일에 참여하게 되었다.
당시 우리 반에 얼굴도 이름도 예쁜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가 저소득층으로 선정되어 전교생이 지켜보는 가운데 호명되는 불상사가 발생했다. 당시 10대 초반 사춘기 예민한 시기에 가정 형편이 전교생 앞에서 적나라하게 공개되자 그녀는 당황했고, 울면서 뛰쳐나가서는 수업이 마칠 때까지 결국 돌아오지 않았다. 다행히 그날이 아마 토요일이었던 것 같다. 다들 집에 갔지만, 나는 그 친구가 걱정이 되어 혼자 학교에 남아 그 친구의 가방을 지키고 있었다.
늦은 오후 그 친구는 퉁퉁 부은 눈으로 가방을 찾으러 학교에 돌아왔다. 그러다 나를 마주치고는 이런저런 말을 하며 울다가 결국은 고맙다고 했다. 그 친구의 가녀린 모습이 지금도 짠하다.
고등학교 2학년 봄 갑자기 꽃무늬 편지 한 통을 받았다. 수원에 사는 친척 집으로 전학을 간 그녀가 나에게 편지를 보낸 것이었다.
경인선과 수원선이 처음으로 만나는 구로에서 9시에 만나자고 답장을 보냈다.
무더운 8월 어느 날 구로역에서 만난 우리는 대방역에 내려 여의도 한강을 갔다. 당시 서울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던 나는 그냥 TV에서 들어본 63빌딩이 있는 여의도를 택했다.
가는 길에 인도네시아 대사관 맞은 편에 있는 베스킨라빈스에 들러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그리고, 로빈윌리암스 주연 '죽은 시인의 사회'를 함께 관람했다.
이메일이 없던 시절, 그 이후에도 그녀와의 편지는 고등학교 내내 계속 되었다. 그러나 인연은 거기까지. 대학교 합격 후 만난 자리에서 그녀는 앞으로 만나지 말자고 했다. 처지가 너무 차이 난다고...말로는 이럴 수 없다고 했지만, 속으로는 나도 그 상황을 수긍했다.
오늘 아침 어머니 집에서 인천 지하철을 타고 여의도로 출근 하다 구로역을 지나쳤다.
문득 잔잔한 꽃무늬 편지에 담긴 그녀의 진심. 그 덥던 8월의 여의도...그리고 수원 장안동에 살았던 그녀의 우편 주소지가 잠시나마 나를 추억 짓게 한다. 어디선가 잘 살고 있을 그 친구를 마음으로 응원하며, 행복하길 그리고 씩씩하길 빌어본다. 보고 싶다, 친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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