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력주의의 위험성! 취약한 민주주의의 해법?

샌델 “시민이 한국 민주주의 지켜냈지만, 아직 행복한 결말 아냐”

2025.09.24 | 조회 8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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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중도좌파 정당들의 능력주의 우선 정책들이, 지금의 극단주의자들이 득세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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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주주의는 늘 위험에 노출되어 있고 불만이 가득한 소외된 이들의 목소리를 제대로 수렴하지 않는다면 위기는 언제든 다시 반복될 수 있다고 조언했다. 

- 위기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선 정치적 양극화를 부추기고 불평등을 증폭하는 ‘능력주의 폭정’을 끝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 소수 집단이지만 민주주의에서 권위주의로 전환하려는 움직임에 동조하는 세력이 존재한다. 권위주의 통치 열망이 분노와 좌절감, 소외감, 무시당하고 있다는 감정과 얽혀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 주류 정당이 그러한 불만을 제대로 다루지 않으면 트럼프가 미국에서 대표하고 있는 것처럼 분노의 정치로 흐르게 된다.

- 정치가 모욕, 불만에 좌우될 때 주류 정치인과 기성세력에 대한 반발이 일어나고 그 분노를 대변해주는 듯한 극단주의자들에게 표가 쏠리는 경향이 나타난다. 트럼프는 그런 식으로 성공했다.

-  문제는 불평등과 배제, 발언권의 부재에 대한 ‘정당한 불만’을 표출하는 방식이민자 공격과 외국인 혐오, 인종 차별, 여성 혐오적 감정을 드러내는 경우가 많다는 데 있다. 

- 주류 정당들, 특히 중도 좌파 정당들은 청년들 가운데 특히 대학 학위가 없는 젊은 남성들이 느끼는 불평등과 소외감을 잘 해결해야 하는 과제에 직면해 있다.

- 이들은 경제에 정작 자신들을 위한 자리는 없고, 사회가 자신들의 노동을 존중하거나 인정하지 않는다고 느끼는 경우가 있다. 

- 따라서 주류 정당과 중도 좌파 정당은 권위주의적 포퓰리스트 지도자들이 악용하는 이들의 ‘정당한 불만’을 해결하는 데 더 노력하는 게 필요하다.

- 능력주의가 일종의 ‘폭정’이 될 수 있다는 말이 역설적으로 들릴 수 있다. 보통 능력과 능력주의를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능력주의가 부패나 정실주의, 족벌이나 귀족주의보다는 낫다. 그러나 어두운 면이 존재한다. 

- 능력주의의 어두운 면은 승자의 성공이 자신의 노력 덕분이며 그로부터 나오는 모든 혜택을 누릴 자격이 있다고 믿게 만든다는 점이다. 

- 자신보다 덜 성공한 사람을 무시하며 ‘나는 해냈지만 너는 못했으니, 너는 능력이 부족하고 경제에 기여하는 가치도 더 적을 거야’라고 말하도록 부추긴다. 

- 능력주의의 위험성은 승자들에게 일종의 오만함과 교만을 갖도록 하고 사회적 분열을 심화시키는 데 있다. 또 고학력 엘리트들이 소외된 이들에게 자신들을 얕잡아보거나 자신들의 노동을 존중하지 않는다고 느끼게 한다. 

- 경쟁은 고등교육을 단순히 승리의 수단으로 도구화한다. 그건 상위 계층에 오르는 방법이자 좋은 직업을 얻는 방법과 돈을 많이 버는 방법에 불과할 뿐이다. 고등교육을 받은 이들에게조차 고등교육의 의미와 목적을 타락시킨다는 뜻이다.

- 공동선은 정의와 평등, 권리의 개념들과 시민으로서 우리가 서로에게 무엇을 빚졌는지를 놓고서 공개적으로 경쟁하고 토론하는 과정을 거쳐 민주적 시민들에 의해 정의되어야 한다. 

- 즉 다양한 계층적 배경을 지닌 시민들이 일상에서 함께 모일 수 있는 공공장소와 공통의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

- 우리는 서로 분리된 삶을 살고 있다. 부유한 사람들과 보통 사람들은 점점 더 분리된 채 살고 있다. 우리는 아이들을 각기 다른 학교로 보낸다. 또 각자 다른 장소에서 살고 일하면서 쇼핑하고 여가를 즐긴다. 이는 민주주의에 해롭다. 

- 시민들이 모이는 시청과 같은 공동 공간, 공원, 공공 도서관, 공공 문화센터, 대중교통 그리고 부유층과 서민 모두가 자녀를 보내고 싶어하는 공립학교와 같은 공동의 공간들을 더 많이 마련해야 한다는 뜻이다. 

- 한때 권력에 맞서 대중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대학 학위나 사회적 이점이 없는 이들을 대변했던 중도좌파 정당들이 지난 40~50년간 노동자 계층을 대체로 외면해온 것이 문제다.

- 그런데 2000년대 초반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이유는 미국과 영국, 유럽에서 중도좌파 정당들이 198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적인 세계화 정책을 수용했기 때문이다. 

- 경제 성장은 이뤘지만 그 혜택은 거의 모두 상위 20%에게 돌아갔고 하위 50%의 몫은 거의 없었다. 미국에서 중위 소득(전체 소득자를 줄 세웠을 때 가운데 위치) 근로자의 실질임금(물가 반영)은 50년 동안 정체되었다. 일자리가 저임금 국가로 빠져나가면서 산업 도시와 마을들은 텅 비었다.

- 대신 중도좌파 정당들은 임금 정체와 불평등의 해법으로 교육을 강조했다. 글로벌 경제에서 경쟁하고 승자가 되려면 학위를 따라고 유권자들에게 말했다. 소득이 학력에 좌우됐기 때문이다.

- 모욕은 이랬다. ‘새로운 경제 체제에서 바둥거리면서 학위도 따지 못했다면, 네 실패는 네 탓이다. 우리가 독려했는데도 네가 하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학위가 없는 노동자 계층이 중도좌파 정당에 등을 돌린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 나는 전통적으로 중도좌파 정당들이 제시해온 것, 즉 저소득층을 위한 사회 안전망을 지탱하기 위해 부유층에 더 많은 세금을 매기는 ‘분배적 정의’(distributive)와 정의의 또 다른 차원인 ‘기여적 정의’(contributive justice)를 구분한다. 

- 기여적 정의는 사회적 명예와 인정 그리고 존엄과 존중을 얻는 방식으로 경제와 공동선에 기여하고자 하는 열망이다. 중도좌파 정당들은 기여적 정의보다 분배적 정의에 더 능숙했다.

- 그들은 노동의 존엄성에 필요한 만큼 효과적으로 주목하지 못했다. 이는 중도좌파 정당들이 재분배에 대한 강조를 넘어설 필요가 있음을 시사한다. 재분배를 포기해선 안 되지만 노동의 존엄성에 대한 강조로 이를 보완하는 것이 중요하다.

- 내가 제안하는 바는 정치적 담론의 초점을 능력주의적 경쟁을 위해 사람들을 무장시키는 것에서 벗어나 노동의 존엄성을 재확인하고 회복하는 데 더 집중하도록 전환해야 한다는 점이다.

- 민주주의는 한 번에 완성돼 영속성을 갖는 프로젝트가 아니다. 우리는 민주주의가 얼마나 취약한지 목격해왔다. 

- 민주주의가 취약하고 국민의 지지와 확신이 있을 때만 보호될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 이제 한국과 미국 그리고 전 세계 민주주의 국가들이 직면한 과제는 선거일에 단지 투표하는 것만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심화시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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