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기식의 계절 표기법↑
2025. 8. 14. (목)
제주도, 삼양해변에서
"소중한.
(인간 말고)(물이) 소중합니다, 여러분!"
8월
↓임유청의 유청문장분리기↓
「 스즈가 어떻게 알겠나.
그 아이는 늘 어른스러워야 했는데. 그래서 술기운을 빌렸을 수도 있지. 조금 취했지만 많이 취한 척했을 수도 있겠지.
속마음 드러내는 방법을 몰라 술의 힘을 빌리는 건 창피한 일이다. 다음날 돌이켜보면 창피하고 10년 후에 돌이켜봐도 창피하고 앞으로도 계속계속 창피하겠지만, 창피한 건 괜찮다. 해로운 상황과 감정에서 벗어나기 위해 어설픈 뭐라도 해야 했던 시절. 그 시간을 떠나와서야 얻을 수 있는 마음이니까.
너무 빨리 어른이 되어야 했던 아이들이 있다. 그들은 대체로 성숙하지만 실은 자기 머릿속의 자신보다 훨씬 어설퍼서 취약함을 들켜버리기 일쑤다. 삶에는 충분히 시간을 들여야만 익숙해지고 능숙해지는 일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바닷마을 다이어리>는 돌봄을 받아야 할 나이에 누군가를 돌봐야 했던 아이, 보호자들의 불화와 불행을 감내해야 했던 아이, 가난과 불안정한 환경에 시달리던 아이라면 한번쯤 꿈꾸어 봤을 삶을 첫째 사치를 통해 스즈에게 준다. 나한테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데다 큰 집과 남는 방까지 있는 사람들이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 ‘넷이서 같이 살자’며 날 데려가선 사랑해주고 보살펴 주는 일 말이다. 」
『테크니컬러 드링킹: 까마귀의 모음 2집』
- 창피한 정도면 다행인 일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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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달 마지막 레터, [ㅊ과 ㅇㅎ에 관한 ㅇㅇㅊ 일지]에서는 이달의 책과 다양하게 연결된 추천 도서를 소개합니다. 두 개의 미니 코너가 있습니다. [표기식의 계절 표기법]. 사진가 표기식의 카메라가 채집한 이달의 계절을 연재합니다. 그는 어디로든 떠나는 사진가입니다. 따로 사진에 코멘트를 붙이지 않아서, 사진에 붙은 꼬리말은 ㅇㅇㅊ의 것입니다. 모바일로 보시는 것도 나쁘지 않지만, 될 수 있으면 PC의 큰 화면으로 감상하시길 추천합니다. 왜냐고 물으신다면? 가능하니까요. [임유청의 유청문장분리기]는 ㅇㅇㅊ 에세이의 일부를 잘라 소개하는 코너입니다. 종이와 화면에 놓여 있던 글을 자르고 분해해서 레터에 씁니다.
이번 레터를 읽으시고 구독자 님께 떠오른 책과 영화가 있기를. 추천은 언제나 궁금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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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영화가 데려다준 곳』
과
이어
지는
책
『녹색 광선』
에릭 로메르 감독의 <녹색 광선>에서 주인공 델핀이 ‘녹색 광선을 보러 가야겠다’고 결심하는 계기가 된 소설로, ‘딴짓의 세상’의 출판 임프린트 ‘frame/page(프레임 퍼 페이지)’에서 정식 출간한 쥘 베른의 1882년 작 로맨틱 모험 소설입니다. 헬레나 캠벨 양은 진정한 사랑을 알아보게 해준다는 ‘녹색 광선’을 찾아 쌍둥이처럼 꼭 붙어 다니는 두 다정한 삼촌과 함께 스코틀랜드의 하이랜드 해안가로 여행을 떠납니다. 그들의 모험에는 서로 상반된 두 젊은 남자가 등장합니다. 요즘 식으로 극T와 극F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아무도 안 물어봤지만 저는 INTP) 한 사람은 상대가 묻지도 않은 지식을 늘어놓는 ‘아리스토불러스 어시클로스’입니다. 게다가 그는 본인의 분석이‘과학적’이라 굳게 믿고 있습니다. 다른 한 사람은 거친 파도도 두려워하지 않고 낭만적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화가 ‘올리비에 싱클레어’입니다. 게다가 굉장히 잘생겼습니다.
두 젊은이 중 헬레나 캠벨 양의 마음을 사로잡을 사람이 누군일지 어렵지 않게 예측할 수 있습니다만, 사랑이 이루어지기까지의 과정만은 예측불허의 연속입니다. 모험 소설의 대가다운 쥘 베른의 스코틀랜드 풍광 묘사도 이 작품의 묘미입니다. 하이랜드의 거친 절벽과 바다 동굴, 무자비한 파도가 로맨스의 배경으로 얼마나 손색없는지 이 소설을 통해 확인하시게 될 거예요. 위스키를 좋아하시는 분들도 반갑겠습니다. 소설의 주요 배경지인 휴양지 오반(Oban)과 싱클레어 씨를 처음 만나게 되는 주라(Jura)섬 장면을 읽고 나면, 바 진열장에 놓인 오반과 주라 위스키 보틀에서 잿빛 하이랜드의 낭만적 바다 내음을 단번에 알아차리게 될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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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쥘 베른
번역: 박아르마
감교 및 교정: 마리
표지 디자인: 최지웅(프로파간다)
면지 사진: 표기식
출판사: frame/page
초판 1쇄 발행일: 2024년 11월 15일
『Moved by Movie』
‘Moved by Movie’는 영화와 함께 글과 시간을 쌓아가는 작가 이미화(미화리) 평생의 프로젝트입니다. 방식은 이렇습니다. 1) 영화 속 배경이 된 장소로 여행을 떠난다. 2) 미리 준비해 간 영화 스틸컷을 꺼낸다. 3) 스틸컷을 손에 들고 거리 풍경에 요리조리 잘 맞춘 후 사진을 찍는다. 그렇게 이 거리는 다시 영화가 됩니다.
한때 영화 속 주인공처럼 살고 싶었던 이미화 작가는 이 책 서문에 이렇게 씁니다. “나는 이제 주인공 따위는 되고 싶지 않았다. 대신 다른 게 되고 싶었다. 비중은 주인공 못지 않게 높지만 늘 뽀송하게 등장하는 주인공의 가장 친한 친구. 주인공이 온갖 시련을 겪을 동안에는 코빼기도 안보이다가 동네 호프집에서 만나 강 건너 불구경 하듯 리액션이나 하며 맥주를 마시는 주인공의 친구란 얼마나 산뜻한지!” 『Moved by Movie』는 이미화 작가가 <바닷마을 다이어리>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걸어도 걸어도> <거북이는 의외로 빨리 헤엄친다> <러브레터> 의 공간을 ‘영화라는 주인공의 친구’로서 찾아간 기록입니다. 그 기록이 담긴 책장을 넘겨보며 독자는 잊었던 영화를 기억하게 됩니다. 그러고보면 영화의 입장에서도 관객이란 작품의 인생에 없어선 안될 중요하고 ‘뽀송한’ 친구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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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글: 이미화
펴낸곳: 아인스튜디오
초판 1쇄 발행일: 2024년 1월 22일
『모든 소란을 무지개라고 바꿔 적는다』(PA CAT BOOKS 002)
[인터뷰&레터] 6월의 책으로 소개했던 차한비 작가의 『모든 소란을 무지개라고 바꿔 적는다』에도 영화 여행기가 실려 있습니다. 차한비 작가는 때때로 <경주> <후쿠오카> <군산>으로 향합니다. 지명을 제목으로 삼은 장률 감독의 영화들을 따라 나선 여행입니다. 그는 이 여행을 ‘나들이’라 부릅니다. “여행이라고 하면 기간을 더 길게 잡고 내용도 번듯하게 채워야 할 것 같은데, 나들이라고 부르자 마음이 한결 산뜻해졌”기 때문입니다. 차한비 작가의 영화 여행기를 읽노라면 어쩐지 고속버스 터미널이 아니라 어두운 극장이 떠올리게 됩니다. 한창 상영 중인 극장, 무심히 객석에서 일어나 스크린 속으로 또박또박 걸어 들어가는 여자의 뒷모습을 그려보게 되는 것입니다. 경주의 찻집, 군산의 칼국수집, 후쿠오카의 작은 술집. 이 여름, 영화를 빌미로 낯선 곳을 실컷 걷는 차한비식 여행의 시간을 만끽합니다. 책장을 덮을 때 극장 상영시간표를 검색해보게 되는 건 영화야말로 우리에게 가장 가깝고 확실한 여행지이기 때문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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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차한비
출판사: 플레인아카이브
초판 1쇄 발행일: 2024년 11월 15일
[번외편] 『우리 이제 그만 걸을까』
여기 작고 귀여운 것을 주워 모으려 떠나는 세 여자친구가 있습니다. 각자의 직장에선 멀쩡히 1인분을 하는데, 다같이 모이기만 하면 셋이 합쳐 0.9인분이 되는 (얼간이) 친구들입니다. 태어난 지 40년, 친구 된 지 25년, 함께 여행한 지 20년이 되어도 여전합니다. 이번 여행지는 아일랜드 더블린과 아란 섬, 영국 레이크 디스트릭트입니다. 어렵게 휴가를 맞춰 여행을 떠났지만, 이번 여행도 허술하고 어수룩합니다. 유명 관광지에도 숨은 힙플레이스에도 별 관심을 안 줍니다. 그저 우리가 함께 이 풍경 속에 함께 있다는 사실에 만족하며 어디론가 걸을 뿐입니다. 길 가다 만난 강아지, 풀밭, 친절한 사람들과의 에피소드를 수집하면서 말입니다.
사실 영화 여행책도 아닌 이 책을 떠올린 건 스코틀랜드 하이랜드 여행기이기도 한『녹색 광선』때문이었는데요, 다시 읽다보니 아차차, 스코틀랜드가 아니라 아일랜드랑 영국이었던 것. 어쩐지 저까지 0.9인분으로 만들어 버린 마력의 여행기입니다. 친구의 실수가 나의 실수로 상쇄되는 편안한 우정의 여행기, 귀여운 걸 좋아하고 친구들과 잘 지내는 법이 궁금하다면 틀림없이 좋아하실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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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MCI (이윤희, 김주희, 유현경)
디자인: 이윤희
표지 사진: 김연제
출판사: 주로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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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의 [인터뷰&레터]
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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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인터뷰&레터]에서는 8월 30일에 출간되는 신간을 소개합니다.
<고양이를 부탁해> <말하는 건축가>의 정재은 감독 첫 번째 에세이
『같이 그리는 초상화처럼』입니다.
건축 다큐멘터리 <말하는 건축가>를 중심으로
영화와 건축, 삶과 예술에 관한 영화감독 정재은의 사유와 공부의 기록입니다.
9월 레터에서는 저도 편집자로서 함께 한 이 아름다운 책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정재은 감독님과의 만남을 준비합니다.
“픽션과 논픽션 사이에서 서성이는 이들이
서로의 얼굴을 확인하게 되는 계기가 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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