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레터]는 책과 영화를 아끼는 구독자 님께 띄우는 텍스트 기획자 임유청의 ‘읽고 쓰고 공유하기’ 활동 일지입니다. 온라인 레터 서비스를 통해 텍스트 사이에서 건져 올린 문장과 생각을 소개하고, 모임으로 작가와 독자가 서로 알아가는 시간을 조직합니다. 질문에서 이해로 나아가는 대화를, 멈춤 없는 글쓰기를 시작할 당신 작은 용기의 모티브가 되고 싶습니다.
구독자 님,
올여름 어떻게 보내셨나요? 저는 이번 여름은 책을 만들며 보냈습니다. 그래서 9월의 책은 [인터뷰&레터]에서 처음으로 소개하는 !신간!입니다. 레터 서비스를 만든 데에는 제가 편집한 책을 좀 더 깊이 소개하고 싶다는 이유가 있었는데요, 드디어 신간이 나온 것입니다! 지난 8월 30일, 말 그대로 이제 막 세상에 나온 희고 작은 책입니다. [인터뷰&레터]를 구독하시는 분들 중 영화와 건축에 관심있는 분들도 많으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구독자 님께 특히 반가울 책으로 믿고, 기쁜 마음으로 이번 달 레터를 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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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먼 곳에서부터 시작해보겠습니다.
꽃 핀 모습 한번 본 적 없어도 무주등나무운동장의 싱그러운 환대는 변함없이 고맙습니다. 고맙다고 쓰고, 왜 고맙다는 마음이 생기는 걸까 생각해 봅니다. 덕유산 맑은 바람도 고맙고 운동장의 쨍한 잔디밭도 고맙고 이미 먹었거나 곧 먹게 될 무주 읍내 어죽도 고맙고, 무엇보다 등나무운동장이 아직 여기 있다는 사실, 그저 놓여있지 않고 자랐다는 사실에, 등나무의 잎이 무성해지고 나무줄기가 두꺼워지는 만큼 운동장도 자라고 있다는 사실이 고맙습니다.
정기용 건축가의 등나무운동장을 처음 본 때를 2006년 여름으로 기억합니다. 무주 안성면으로 환경현장활동을 떠났던 대학 시절 여름 방학이었습니다. 당시 대부분이 고령의 농부였던 안성면 두문마을, 덕곡마을 주민들은 ‘기업도시’ 명목으로 골프장을 지으려는 정부, 기업에 맞서 골프장 반대 투쟁을 하고 있었습니다. 연대 활동도 하고 농사일도 도우며 몇 번의 여름에 무주를 찾았습니다. 전세 버스 타고 도청으로 어디로 집회를 가기도 했는데, 그때 모이던 장소가 등나무운동장이었습니다. 안성면사무소(현 안성면 행정복지센터)도 그때 아마 항의 방문 비슷한 일로 갔던 것 같습니다. 같이 간 주민들께 목욕탕 있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에 기억합니다. 면사무소에 목욕탕이라고? 진짜 똑똑하다! 생각했던 거 같아요. 등나무운동장에서는 아 덥다, 일도 투쟁도 힘들다, 그냥 저 나무 그늘 밑에 드러눕고 싶다, 이런 마음뿐이었고요.
삶을 걸고 싸운 주민들의 투쟁으로 골프장을 만들겠다던 회사는 물러났습니다. 마을에 큰 상처를 남기고요. 종종 멀리서 슬픈 소식이 들려오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무주는 제게 처음으로 반딧불을 본 곳이고 낙화놀이를 구경한 곳이고 짧은 기간이나마 평등한 공동체를 구성하려 노력해 본 곳이며, 내 미약한 힘이 얼마나 미약한지 확인한 곳으로 남아있습니다.
한 편의 영화가 된 건축가
그로부터 몇 년 후, 극장에서 <말하는 건축가>를 보게 됩니다. 똑바른 선과 명확한 단어가 경쾌한 음악을 배경으로 등장하는 오프닝부터 좋았습니다. 그러더니 곧 반가운 장소가 나왔습니다. 등나무운동장이었습니다. 정기용 건축가를 보고 저분이 여길 설계한 분이구나, 건축가가 이런 걸 할 수 있는 사람이구나. 가슴이 뛰었습니다. 그곳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고 있었으니까요. 영화가 흘렀습니다. 한 사람 인생의 문이 닫히는 순간을 보았습니다. 눈물을 흘렸습니다. 다행히 그 사람이 다시 등장했습니다. 그런데 반가운 얼굴들이 또 있었습니다. 제각각 다른 핑크색 웃옷을 입고 목욕탕이 열리기를 기다리는 할머니들. 몇 년 전 여름에 뵈었던 두문/덕곡마을 주민분들이었습니다. 정기용 건축가는 까만 슈트를 입고 동그란 안경을 낀 채 그들 곁을 서성이고 있습니다. 마치 이 장면을 보기 위해 그 많은 일을 했다는 듯, 온화한 기쁨을 얼굴에 띄운 채로.
이 순간은 책에서 아주 중요하게 묘사됩니다. <말하는 건축가>를 찍은 영화감독 정재은의 첫 번째 에세이집『같이 그리는 초상화처럼』에서입니다. 『같이 그리는 초상화처럼』은 <말하는 건축가>를 주인공으로 다큐멘터리 영화 만들기에 관해 영화감독의 시선에서 사유하고 고민한 기록과 기억을 담은 예술 에세이입니다. 영화의 마지막, 검은 옷의 건축가와 분홍 웃옷의 주민이 한 프레임에 담긴 아무렇지 않도록 편안하고 따뜻한 이 장면은 감독이 편집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고뇌하고 분투한 끝에 삽입을 결정한 장면입니다. <고양이를 부탁해> <태풍태양> 두 편의 극영화를 만든 후 처음으로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들며 픽션과 논픽션 사이를 서성이던 감독이 그 경계 자체를 다시금 바라보게 되는 중요한 순간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책으로 영화를 기록한 영화감독
<말하는 건축가>는 정기용 건축가의 건축 철학과 자취를 담은 동시에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인간 삶의 마지막 시간을 가까이서 지켰다는 점에서도 화제가 된 영화입니다. 그러나 영화와 마찬가지로 이 책에도 ‘위대한/건축가/죽음/극적/드라마’ 같은 키워드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오히려 자기도 모르게 그러한 선택을 하게 될까봐 영화감독으로서 끊임없이 자문하고 성찰하며 자기 예술의 길을 찾아가는 과정이 담겨 있습니다. 그럼에도 책을 읽으며 코끝이 찡해지고 눈물을 흘리게 되는 건 아무리 거리를 두려 해도 둘 수 없는 인생이라는 서사가 여기 담겨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같이 그리는 초상화처럼』은 정재은 감독이 원래 자신의 지난 다큐멘터리 영화 전반을 돌아보는 글을 써보려 시작한 작업입니다. 그런데 저자는 “<말하는 건축가>에서 걸음을 멈추어야 했”습니다. 이는 책 속 표현대로 정기용 건축가가 “주인공의 삶을 선택한 사람”, 그러니까 “주인공이란 스스로 주인공으로서의 삶을 사는 사람”이어서일 수도 있겠습니다. 한편으로는 ‘논픽션의 하얀 성’ 첫 관문의 기억이 작가에게 여전히 생생한 영화적 화두로 남아 있기 때문일 수도 있겠습니다.
두 예술가 이야기
그러니 이 책이 한 편의 영화라면 주연은 <말하는 건축가>입니다. 카메라를 사이에 두고 마주 선 두 예술가 정기용 건축가와 정재은 영화감독입니다. 두 예술가가 자신의 생을 바쳐 사랑한 건축과 영화라는 두 예술이 『같이 그리는 초상화처럼』의 주인공입니다. 책장을 넘기는 동안 독자는 건축에 인간을 담으려 헌신한 건축가의 마지막 시간을 함께 하게 됩니다. 그 시간을 단순한 기록으로 끝내지 않으려 끊임없이 자문하고 집요하게 답을 찾아가는 다큐멘터리스트의 분투를 목격하게 됩니다. 타인의 삶을 재료로 창작하는 일의 무게, 예술가로서의 윤리, 한편으론 감정적 거리를 유지함으로써까지 지키고자 했던 예술적 가치에 관한 고민에 함께 몰입하게 됩니다.
『같이 그리는 초상화처럼』은 정기용 선생의 건축을 존경하고 사랑했던 이들에게는 선생의 마지막 시간과 "말"을 그리움으로 기록한 회고록이 될 것입니다. 한편 영화와 창작을 고민하는 독자에게 이 책은 영화와 예술 창작에 관한 사유가 담긴 흥미로운 교과서이자 '다큐멘터리 워크북’으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책에 수록된 15편의 에세이는 <말하는 건축가>의 기획부터 개봉까지의 전 과정이 영화감독의 시선에서 펼쳐집니다. 주제와 주인공 선정, 촬영과 플롯, 인터뷰와 대사, 편집, 아카이브 활용, 이야기라는 목적지를 향한 통찰과 함께 피칭, 개봉 후 관객과의 에피소드 등도 생생하게 옮겼습니다. 책 속에 기록된 정기용 선생을 비롯 다양한 인물들의 "말"은 정재은 감독이 노트, 녹취, 필사와 인용 등을 통해 당시 영화의 재료로서 채집하고 수집한 원재료의 형태로 담겨있습니다. 그 원재료들은 때때로 길고, 거칠고, 그래서 더욱 영화 속 대사처럼 생생하게 그 인물을 묘사합니다. '말'로 이루어지는 것이 영화이고 '문장'으로 쓰여진 것이 책이라면, 책 속 "말"은 '글자'라는 도구를 통해 종이 위에 영화를 옮기려 한 작가의 시도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번 레터는 이 책의 편집자로서,
<말하는 건축가>를 사랑한 관객으로, 건축과 다큐멘터리 영화가 담지하고자 하는 공공성에 주목하는 시민으로, 건축과 영화를 아끼는 예술애호가로서 썼습니다. 또한 여전히 무주를 찾는 무주산골영화제 방문객이자 여행객으로서 썼습니다.
처음으로 돌아갑니다. ‘고맙다’라고 쓴 마음을 들여다봅니다. 이 책을 읽으며 지켜본 정재은 감독님의 영화, 영화를 만드는 예술가로서의 태도, 그 영화에 담긴 정기용 선생님의 삶과 건축 그리고 “말”에 감응한 시간에서 배운 마음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같이 그리는 초상화처럼』는 종이 위에 옮긴 한 편의 영화입니다. 이 특별한 상영에 함께해주시길 진심으로 바라며 9월의 첫날을 엽니다.
[인터뷰&레터] 시리즈: 시즌1 🎬영화와 책✍️
이번 달에도 어김없이 작가와 독자가 함께 하는 소규모 [인터뷰&레터 모임]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서울 평창동의 ‘미뗌 바우하우스’ 쇼룸에서 정재은 감독님을 직접 만나 『같이 그리는 초상화처럼』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건축과 영화, 그리고 삶이라는 예술에 관해 대화하고 싶으신 분들은 아래 링크를 클릭해서 구글폼으로 신청해주세요.
INFO!
모임은 이렇게 진행됩니다.
🕵️♀️1부: 인터뷰
모임의 1부는 ‘인터뷰’라는 타이틀의 북토크입니다. 사전에 제출한 참가자들의 질문이 그날 북토크의 방향을 결정합니다. 독자와 책, 독자와 작가의 드물고 귀한 만남을 인터뷰라는 형식을 통해 보다 적극적으로 연결하는 기획입니다.
👩💻2부: 레터
모임의 2부는 ‘레터’라는 타이틀로 진행됩니다. 가볍게 기록하는 정리의 시간, 작가와 독자가 서로를 알아가는 공유의 시간을 갖습니다.
🧵모든 참여자께 레터북을 증정합니다.
[인터뷰&레터] 월별 주제에 따라 제작되는 워크북입니다. 사전에 취합된 질문을 키워드별로 묶고, ‘인터뷰’ 시간에 오간 이야기를 마인드맵처럼 자유롭게 기록할 수 있도록 구성했습니다. ‘레터’ 시간을 위한 빈 페이지도 포함됩니다. 이날 함께 나눈 시간과 통찰, 영감을 한 권으로 묶어 보관할 수 있는 책입니다.
『같이 그리는 초상화처럼』의 이야기는 다음 레터에서도 이어집니다.
가을의 초입에서 금방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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