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5월, 강남구의 한 복지관에서 진행하는 여성 장애인 글쓰기 수업에서 허성현 님을 처음 만났다. 폭염으로 힘들었던 날도, 장마로 지친 날도 한결같이 일찍 강의실에 도착했고, 글쓰기 과제를 빠짐없이 해왔다. 그렇게 삶의 조각을 모아 자신의 인생을 기록으로 남겼다. 글을 낭독하는 시간, 상기된 표정과 반짝이는 눈빛이 기억에 오래 남았다.
허성현님은 사회복지학을 전공하고, 장애인 인권 단체에서 16년간 활동가로 일을 한 경험이 있다. 현재는 서울디지털대학교의 문예창작과에 입학해서 새로운 꿈을 꾸고 있다. 깊어지는 가을날, 글쓰기 수업을 마무리하고 인터뷰를 진행했다.
#1. 외딴섬에 갇힌 학창시절
초등학교 5학년 때까지는 삼육재활원에서 물리치료와 수영을 하면서 보냈어요. 어머니께서 공부보다는 재활 운동에 중점을 두셨지요. 5학년 말에 삼육재활원이 경기도 광주로 이전을 하고, 저희 집도 수서로 이사를 하면서 일반 학교로 전학했어요.
1992년 당시 수서초등학교에서 장애를 이유로 전학서류를 받아주지 않아 힘들었어요. 삼육재활원 교장 선생님과 수서초등학교 교장 선생님과 큰 갈등이 생겼거든요. 이 문제를 언론에 알리겠다고 하자 수서초에서 받아주셨지요. 입학이 결정되고 나서는 교실을 1층으로 옮겨서 큰 어려움 없이 학교에 다닐 수 있었어요,
남자아이들의 놀림과 장난이 심했고, 다른 친구들이 상대해주지 않아 힘들었어요. 여자아이들의 경우 처음에는 호기심으로 다가왔다가 결국 멀어졌고요. 중,고등학교 다닐 때는 놀리거나 괴롭히는 아이들은 없었지만 외롭기는 마찬가지였지요. 외딴섬에 갇혔다고 할까요? 할 수 있는 건 공부밖에 없었어요. 말이 없고 소심한 학생으로 지냈습니다. 당시는 전동휠체어가 없으니 밖으로 자유롭게 다닐 수도 없었지요.
운동장에서 뛰어놀고, 친구들과 놀러 다니는 평범한 아이들의 일상이 허성현 님에게는 불가능했다. 자신이 당장 할 수 있는 것을 찾아 책을 읽고 공부하는 것으로 그 시절을 버텼다. 외딴섬에서 그렇게 그는 자기 내면을 채워갔다. 하지만 누군가가 내민 따스한 손길과 마음을 만나기도 했다.
#2. 타인의 배려와 온기를 느끼다.
중학교 때 혜정이라는 친구랑 짝이 되었어요. 선생님께서는 이동 수업할 때 제 책을 들어주라고 했는데, 정말 매일 책을 들어다 주었어요. 처음에는 몇 번 하다 그만둘 거로 생각했어요. 만약 그 친구가 더 이상 안 하겠다고 하면 누구에게 부탁할지 걱정이 많았거든요. 그런데 혜정이는 선생님이 시켜서 마지 못해 하는 태도가 아니었어요. 짝이 바뀐 후에도 늘 이동수업 할 때마다 책을 들어다 줘서 마음 편히 도움받고 수업에 참여할 수 있었지요.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헤어지게 되면서 그 친구에 대한 고마움은 그리움으로 바뀌었어요
고등학교 1학년 담임 선생님도 기억에 남아요. 일반 학교에 전학한 후로는 조회, 체육 시간, 소풍, 수학여행 등에 참여하는 것은 꿈도 못 꾸었어요. 당연히 그 시간에는 빠진다고 생각했죠. 그러다 고1 때 이동세 선생님을 만나고 새로운 문이 열렸어요. 선생님께서는 운동장에서 열리는 조회시간에 의자에 앉아서라도 참여하라고 하셨어요. 당시 조금 충격이었죠. 담임 선생님께서 그렇게 말씀하니까 반 아이들이 조회시간에 의자를 들고 나가기 시작했어요.
선생님께서는 소풍이나 수학여행도 함께 가자고 하셨어요. 저는 다른 친구들에게 피해를 줄까 봐 안 가려고 했거든요. 하지만 선생님께서 거듭 요청하시는 바람에 소풍이랑 수학여행에 모두 참여했어요. 소풍 갈 때 선생님께서는 다른 아이들의 인솔을 부담임 선생님께 부탁하고 저하고 개별적으로 함께 다니셨어요. 고등학교 1학년 첫 소풍 때 선생님이랑 둘이서 동물 구경 다녔던 일을 잊을 수가 없어요. 수학여행 때도 마찬가지로 부담임 선생님께 인솔을 맡기고 저와 둘이서 바다 구경을 하고 문화재 관람을 했지요.
그 당시는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몰랐어요. 시간이 지나고 장애인단체에서 일하다 보니 저를 대했던 선생님의 마음과 생각이 보였어요. 정말 감사했고 함께 했던 순간이 행복했어요. 꼭 한번 뵙고 싶어요. 계단이 나올 때마다 휠체어를 들어줬던 반 친구들한테도 고맙다고 말하고 싶어요.
‘소중한 인연’이라는 글쓰기 주제를 통해 허성현 님은 고마웠던 사람들에 대해 이렇게 추억했다. 친구와 선생님과 맺은 관계의 경험은 시간이 흐르고 더 크게 다가왔다. 늘 타인에게 민폐와 짐이 될까 두려웠던 마음에 용기가 생긴 것은 자신을 수용해주는 타인의 시선과 태도일 것이다.
#3. 장애를 삶으로 수용하기까지
장애에 대해서 몰랐기 때문에 물리치료와 운동을 하면 낫는다고 생각했어요. 삼육재활원이 치료와 공부를 병행할 수 있는 곳이라 다니게 되었어요. 일반 학교로 전학하기 전까지는 수업이 끝나면 물리치료와 수영, 보행훈련 하기 바빴어요. 그런 노력이 헛되지 않았는지 뒤뚱거리면서도 조금씩 걸을 수 있었어요.
등받이 없는 의자나 바닥에 앉을 때는 중심을 못 잡아 뒤로 넘어지곤 했는데, 원인을 알지 못했어요. 걸을 때마다 균형을 잡기 위해 팔을 크게 흔드는 이유도 몰랐고요. 그저 하체 기능상의 장애라고만 생각했죠. 다리의 힘을 기른다고 손잡이를 잡은 상태에서 아파트 계단을 오르내리곤 했지만 도움이 안 되었어요.
어느 날 어머니는 목발을 짚고 걷는 연습을 하자고 제안하셨어요. 저는 이러자고 어린 시절 물리치료하고 훈련한 게 아니라고 울며 반항했죠. 나중에는 목발을 짚는 것조차 부러운 일이 될 줄은 몰랐어요. 중심을 못 잡는 저에게는 목발도 소용이 없었거든요. 결국 목발도 포기하고 전동휠체어를 타야만 했어요. 치료와 훈련을 통해 보행 기능을 살릴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정말 원망스러웠어요.
제가 가진 장애에 대해 불평불만 하는 사이 제대로 관리를 하지 않아 남아있는 기능마저 퇴화하고 나서야 깨달았죠. 부족한 기능을 원망만 하지 않고 남아있는 기능에 감사하며 열심히 지켜야 한다는 것을 말이죠. 퇴화한 기능을 재활 훈련으로 찾고 싶어 수서동 보건소 분소에서 치료사의 지도로 꾸준히 운동을 한 후에는 조금 회복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남아있는 기능이 감사하고 소중해요.
그밖에도 허성현 님은 장애인을 위한 프로그램이 있으면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장애인들이 주로 만나는 사람들 사회복지사, 치료사, 다른 장애인이다. 특히 학창 시절부터 복지관을 이용하면서 만난 사회복지사의 모습이 크게 다가왔다. 따뜻하게 품어주는 복지사 선생님을 보고 허성현 님 역시 다른 사람들을 돕고 싶다고 생각했다. 사회복지학을 전공하기로 마음먹었다. 장애인 공단에서 장애인이 연구원으로 근무하는 것을 본 부모님도 적극적으로 추천했다.
#4. 장애인권에 대해 눈을 뜨다.
대학에서 사회복지를 전공했는데 4학년 때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로 실습을 나갔어요. 장애인 인권을 위해 열정적으로 활동하시는 비장애인 활동가들을 만났는데요. 그분들은 장애인도 아니면서 당사자 이상으로 장애인 문제에 대한 공감 능력이 뛰어났어요. 자기 생존과 직접적으로 연관이 없는 비장애인이 활동가였던 게 신기했어요.
장애는 본인의 잘못이 아니라 사회 환경에 있고 이를 바꿔나가야 한다는 활동가들의 말에 열광할 수밖에 없었어요. 마치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났을 때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열렬히 환영했던 것처럼요. 그분들이 꿈꾸는 이상에 동조했고 당시 같은 꿈을 꾸는 것만으로도 너무 행복했어요. 이를 계기로 장애인 인권 활동을 시작했고, 이 일에 내 인생을 걸어도 좋다고 생각했지요. 그때부터 16년간 장애 인권 활동가로 일을 했습니다.
* 장애 인권(障礙人權)은 장애인이 비장애인과 동등한 대우를 받기 위한, 인권의 확장된 개념이다. 장애인도 인간의 존엄성을 지니고 있으므로 기본적인 권리를 주장하고 대우받을 수 있어야 한다. 장애인의 인권을 증진하기 위한 사회 운동을 장애인 운동, 장애인 인권 운동이라고 한다. (출처 : 위키백과)
#5.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를 깨닫다.
실습 첫날 장애인 이동권 집회에 가게 되었어요. 지하철역마다 열차를 타고 내리면서 모든 역사에 엘리베이터 설치의 중요성을 알리는 집회였는데 승객들에게 원망을 많이 들었어요. 어떤 어르신들은 욕설하시면서 왜 다른 승객들의 발을 묶냐고 하셨지요. 그때 저는 뭐가 뭔지도 모르고 상황 하나하나가 충격이었어요. 당시 권리의식이 없었던 저로서는 다른 사람에게 미안한 마음만 앞섰거든요. 그래서 실습 슈퍼바이저 선생님한테 다른 분들한테 피해를 줘서 너무 미안했다고 했더니 왜 그렇게 권리의식이 없냐는 말을 들었어요.
그 이후로 연구소 간사님들은 집회가 있을 때마다 저를 데리고 나가셨어요. 권리의식을 갖길 바라셨고 활동가로서 정신 무장이 되길 바라셨던 거 같아요. 연구소의 실습은 간사님들이 바라셨던 대로 집회 현장 다니면서 정신 무장을 했던 기간이었어요. 연구소를 오기 전엔 사회복지사는 마음씨 착하고 따뜻하기만 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누구보다 강인해야 하고 투사적인 기질이 필수라는 걸 알았어요.
시위 도중 전경들한테 방패로 맞아서 얼굴이 퉁퉁 붓고 안경이 깨져도 무서운 줄 몰랐고 힘든 줄 몰랐어요. 무슨 영웅이라도 된 양 들떠 있었죠. 이런 점이 어머니한테 죄송한 마음이 커요. 어머니는 대학교 다닐 때부터 공무원 시험을 보기 원했는데 저는 활동가의 길을 가겠다고 우겼어요.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의 영향 때문이죠. 항상 집회 도중 다치진 않을지 걱정이 많으셨을 거 같아요. 이 기회에 어머니께 죄송했다고 전하고 싶어요.
#6. 당당한 사회의 일원으로 나아가다.
대학 졸업을 하고 ‘경기장애인인권포럼&일산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서 인턴으로 근무했어요. 주로 업무일지 작성법이나 성명서와 보도자료 쓰는 법을 배웠지요. 주말에는 ‘경기도 장애인 이동권 실태’를 조사해 소논문을 완성했고요.
두 달 후에는 강북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 정식으로 입사했어요. 5개월 동안은 ‘장애인활동 지원팀’에서 근무하다가 ‘서울시 센터 지원사업팀’으로 부서 이동을 했어요. 얼마 지나지 않아 서울시 중증장애인인턴제 사업을 통과시킨 공을 인정받아 팀장이 되었고 서울시 사업을 총괄하게 되었어요.
기존 조직에서 진행해 왔던 사업들과 새로 생각해 낸 사업들을 사업계획서로 정리하고 문서의 체계를 잡는 일을 했지요. 인턴을 지도하고 ‘강북구 중증장애인 자립생활지원 조례제정’을 비롯해 동료 상담과 한일세미나 등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업을 계획하고 진행했습니다.
허성현님은 장애인 권익 문제에 인생을 걸어도 좋다고 생각할 만큼 열정적이었다. 현장에서 각종 사업계획과 실무를 담당했고 ‘장애인 자립 생활 조례’ 제정을 위해 온 힘을 다했다. 주말도 없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에 매진한 결과 업무적으로는 큰 성과를 얻었지만, 몸과 마음은 많이 상해있었다.
#7. 번아웃이 오다.
준비가 덜 되고 미숙한 상태에서 지도해 주는 사람 없이 스스로 길을 찾아야 해서 너무 힘들었어요. 근무 시간이 끝나고 사회복지 프로포절 작성 관련 책을 읽고 공부해 가며 사업계획서 및 기타 관련 문서들을 완성해야 했어요. 거의 잠을 자지 못하고 머리 감을 시간조차 없었습니다. 파트별로 직원들이 각자 자기 몫을 하는 구조가 아니었기에 더욱 힘들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떻게 그 많은 일을 감당했는지 신기하기만 합니다.
그나마 문서 작업은 혼자 하는 일이라 쉬웠습니다. 사람을 상대하는 일에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어요. 인턴을 지도하는 일, 사업 진행 과정에서 사람을 상대하는 일, 장소를 섭외하는 일은 훨씬 더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이 과정을 통해 사람을 품는 법과 관계를 지혜롭게 맺는 법을 배웠습니다
조례제정이 되고 난 후 몸 이곳저곳이 아프기 시작했어요. 몸과 마음이 지쳐있는 상태였지요. 건물 엘리베이터 앞으로 전동휠체어를 운전해 갈 힘조차 없을 정도였지요. 애정을 갖고 열과 성을 다한 곳이라 그만두고 싶지 않았지만, 일하기 힘든 몸 상태가 되었어요.
번아웃( Burn out), 몸이 보내는 신호였다.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해서 해내겠다는 열정을 가지고 뛰어들다 어느 순간 피로가 누적되고 심신이 고장 난 상태에 이른 것이다. 그때야 허성현 님은 힘들어하는 자신을 돌볼 수 있었다.
#8. 인생의 후반전, 새로운 시작
16년간의 직장 생활을 마무리한 후에는 다른 경험을 해보고 싶었어요. 영어 공부를 할 필요성을 느껴 태화복지관에 영어를 배웠습니다. 수서복지관에서 ‘장애인권리단’ 활동도 하고, 하모니카를 배워 거리공연도 했어요.
강남세움복지관이 생긴 이후로는 ‘우리 마을을 소개해 주세요’, ‘휠링 강남’ 같은 권익 옹호 활동을 하고 뉴 스포츠, 탁구 등의 생활 체육활동도 했습니다. 학창 시절, 체육 시간에 소외되었던 저에게는 이런 생활 체육 활동이 새롭게 다가왔고 즐거웠습니다.
탁구의 경우 뇌성마비로 인한 경직 때문에 안 될 것 같았는데 담당 선생님, 강사님, 회원들의 지도와 지원으로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를 소재로 글을 써서 작년에 체육박물관에서 주관하는 ‘생활체육수기공모전’에 입상도 했습니다. 이 자리를 통해 탁구를 칠 수 있도록 도와주신 분들에게 감사의 마음 전합니다.
퇴사 후에야 비로소 자신을 돌볼 수 있었다. 격무에 시달리다 시선을 돌리니 새로운 세계가 있었다. 어떤 활동이든 적극적으로 도전하고 열심히 했다. 장애인을 위한 생활 체육 활동은 삶의 윤활유가 되었다. 특히 ‘글쓰기’라는 세계를 만난 후 허성현 님에게 새로운 꿈과 희망이 생겼다.
#9. 글쓰기를 통해 새로운 길을 찾다.
글쓰기에 자신이 없었고 가끔 일기를 쓰는 것이 전부였어요. 작년에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생활체육수기 공모전’에 입상한 이후 자신감이 생겼거든요. 그래서 서울디지털대학의 문예창작과에 입학했어요. 다양한 장르의 글을 쓰고 싶은 욕구가 강했지요. 조직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일 중에 글쓰기가 최고라는 생각을 했어요. 글을 쓰면서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고 희열을 느낍니다.
글쓰기는 나 자신과의 대화이고 다른 사람과 소통의 도구라고 생각해요. 글은 다른 사람의 마음과 생각을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을 알았어요. 지금까지 해왔던 장애 인권운동을 잘하기 위해서도 글을 잘 쓰고 싶습니다. 지금까지 논리적이고 딱딱한 글에 익숙했는데 앞으로의 제 글에는 표정과 생기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이번에 참여했던 강남세움복지관의 글쓰기 과정을 통해 지금까지의 인생을 되돌아보니 스스로 칭찬을 해주고 싶을 만큼 열심히 산 것 같아 뿌듯했습니다. 삶의 어떤 경험과 만남이 헛된 것이 없이 다 의미가 있었어요. 저를 성장, 발전시켜 주어 감사할 따름입니다. 저를 힘들게 했던 사람에게도요. 앞으로의 삶과 비전에 대한 글을 쓰면서 꿈꾸고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했습니다.
자신을 돌보는 과정에서 특히 글쓰기가 큰 도움이 되었다. 현재는 서울디지털대학교의 문예창작과에 입학해서 새로운 꿈을 꾸고 있다.
#10. 피아노 치는 할머니가 되고 싶어요.
서울디지털대학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하면 제 인생 이야기를 담은 자서전을 출간하고 싶고요. 제 이름으로 된 시집, 소설 등 다양한 장르의 글을 써서 독자들에게 울림을 줄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사회복지대학원에도 진학해 석,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프리랜서 연구원의 길을 걸으면서 지금까지의 현장 경험을 바탕으로 사회복지 관련 책을 저술하고 싶어요.
60세가 넘어서는 어린 시절 피아노 의자에 앉는 것을 못 해 배우지 못했던 피아노를 등받이 의자에 앉아서라도 배우고 싶어요. 70세쯤에는 작은 연주회를 여는 것이 꿈입니다.
[인터뷰어 – 유희재]
교육 출판 기업에서 14년간 교육과 연구 개발을 담당하다 독서와 진로 교육을 하는 강사로 전직했다. 초·중·고에서는 진로 강의를 하고, 도서관과 복지관 등의 공공기관에서 독서토론, 문해력, 글쓰기 수업을 한다.
매일 눈뜨자마자 무엇인가를 읽는다. 글쓰기 플랫폼에 인터뷰 글을 쓰고, 인스타그램에 독서 기록을 남긴다. 이렇게 쌓인 기록을 콘텐츠로 만들고 싶다. 저서로는 인터뷰집 ‘좋아하는 일을 해도 괜찮을까?'(2023, 지식과감성)가 있으며 메일리에 ‘당신을 인터뷰해드립니다.’ 뉴스레터를 발행한다. 타인을 통해 나를 발견하고 세계가 확장되는 경험을 소중하게 여긴다. 타인에게 ‘말 걸기’로서의 글쓰기를 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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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기록자_우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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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인터뷰해 드립니다
저도 쓰면서 좌절하고 아쉽고 그런데 이렇게 계속 쓸 수 있는 용기를 주셔서 감사해요! 우리 같이 1%씩만 앞으로 나아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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