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의 주간, 첫번째 편지, 에세이.

2021.01.23 | 조회 1.7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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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우 작가가 매달 '한 권'의 책을 추천합니다.

눈이라는 글자 앞에서는, 가장 먼저 일본이 떠오른다. 내 삶에서는 일본 만큼 눈에 대해 강한 기억을 남긴 장소가 없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나는 처음으로 '눈의 세계'가 있다면 바로 이곳일 거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어느 풍경 앞에서, 눈이 끝없이 펼쳐진 세계를 상상할 수 있었던 것은 일본이 처음이었다.

생애 처음으로 일본에 갔던 것은 만 스무살 무렵, 첫 배낭여행의 목적지였기 때문이다. 당시 한 살 어렸던 친한 동생과 함께 우리는 거의 아무런 준비도 없이, 무작정 여행을 떠났다. 비용을 한 푼이라도 아끼려고 부산까지 가서 배를 탔는데, 얼마나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는지, 당장 배에서 내린 다음 무엇을 타고 어디로 가야할지도 알 수 없었다. 그저 후쿠오카에서 출발해서 훗카이도까지 전국일주를 하고 다시 돌아오자는 '거대한 로드맵' 외에는 아무것도 정해둔 게 없었던 것이다.

애초에 그 여행은 그 동생과 나의 '눈 덮인 훗카이도'를 보고오자, 라는 단 하나의 합의에서 시작한 것과 다름없었다. 둘 다 배낭여행이 처음이었기 때문에, 그 외에 다른 중요한 무엇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야말로 '여행'에 대한 무지의 극치였다고 할 만 했던 것이, 여행에 필요한 과정 같은 것들은 전혀 알지도 못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간단하게나 꽤나 근사하게 먹기 좋은 곳들, 싸게 묵을 수 있는 숙소라든지, 세계의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게스트하우스, 훗카이도에 가기까지 거쳐가는 도시들에서 볼 만한 장소들, 교통편들, 같은 것이 여행 속에 '존재'한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어찌보면, 지극히 청춘다운 데가 있는 무모함이었고, 여행이었던 셈이다. 청춘을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인생과 세상에 대한 '막연함'에 취하는 시기라고 할 수 있을테니 말이다. 여행에서 가장 당황한 순간은 어찌하여 후쿠오카역까지는 가서 내렸는데, 당장 역에서 내려서 어디로 가야할지 전혀 알 수가 없었던 순간이었다. 우리는 어디로 가야하는가? 버스를 타야하는가? 어쨌든 오사카에 가서 첫날 밤을 보내기로 했는데, 오사카는 어떻게 가는 것인가? 그런 구름 같은 의문들을 품은 채로 무작정 도로 위를 걸었다. 그런데 당연히 무작정 걷는다고 오사카나 도쿄가 나타날 리는 없었다. 정신차리고 다시 오사카역에 돌아와서, 다시 역무원에게 물어보고, 지나가는 사람에게 물어물어 간신히 '오사카로 가는 길'에 들어섰던 기억이 난다.

아무튼, 그렇게 말도 안되게 시작한 여행이었지만, 어쨌든 우리는 오사카와 도쿄 등을 거쳐 며칠 뒤에 훗카이도에 들어섰다. 훗카이도로 가는 기차에서는 그야말로 '설국'에의 입장이라고 할 법한 순간이 있었다. 기차가 어느 긴 터널을 통과하고 났더니, 갑자기 온 세상이 눈으로 뒤덮여 있었던 것이다. 마치 소설 <설국>의 첫 장면처럼, 혹은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의 토끼굴의 출구처럼 그렇게 '눈의 세계'를 만난 순간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삿포로에서부터 다시 삿포로로 돌아올 때까지, 우리는 훗카이도 전역에서 매일 눈 위를 걸었다.

그곳에서 눈에 관한 클리셰라고 할 만한 것들은 닥치는대로 누려보려고 애썼던 기억이 난다. 노보리베츠에서 눈 내리는 노천 온천을 즐겨보자면서, 물어물어 어느 호텔을 찾아갔다. 어쨌든 호텔에서는 당시 5천원쯤 하는 돈을 내면 '온천'을 할 수 있다고 했기 때문에 간 것이었는데, 로비에서부터 안내원들이 당황하고 웃던 기억이 난다. 아무튼 그들은 남루한 두 청년을 위해 손바닥만한 노촌 탕이 하나 딸린 목욕탕을 내주었다. 그리고 눈덮인 골목의 오래된 라멘집을 찾아 무턱대고 들어가기도 하고, 가이드북에 소개조차 되어있지 않은 길을 무작정 걸어 기이한 폐가 같은 언덕의 민가에서 노을을 맞이하기도 했다. 여름이 성수기인 후라노에 내려 끝도 없는 눈밭에 들어갔다가 못 빠져나올 뻔도 하고 말이다.

그 여행은 일본 전국을 여행한 것이었지만, 누구에게 무어라 이야기하기 다소 애매한 것으로 남아버린 데가 있었다. 남들이 다 갈법한 곳들 보다는, 대부분 눈이나 종일 보는 날들을 위주로 보내고 돌아왔으니 말이다. 인생에 그런 바보같은 여행은 다시 없을 것이다. 그러나 거의 눈밖에 없었던 여행이었기 때문에,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떠난 여행이었기 때문에, 참으로 바보같은 여행이었기 때문에, 그 여행은 내 삶에서 가장 특별한 여행 중 하나로 남아있게 되었다. 다시 돌아갈 수 없을 것 같은 '눈의 세계'에 대한 기억과 함께 말이다.

나는 종종 생각한다. 삶에서는 무모함만이 주는 무언가가 있는 것 같다고 말이다. 지평선 끝까지 덮인 눈을 보고 싶다는 열망 하나로 떠나는 일 같은 게 인생에 한번쯤 있다는 사실이, 삶에 무언가를 준다고 말이다. 

 

*

모처럼 아내와 아이랑 함께 야외로 나섰다가, 늦게 돌아와 아보카도랑 숙성된 연여와 함께 호가든 반잔을 마시고, 아이를 욕조에 넣어두고, 중간중간 아이와 물놀이를 하면서, 그렇게 써낸 오래 전 여행에 대한 글. 이제 샤워를 하고 아이 곁으로 들어가야겠다. 오늘 밤은 왠지 깊이 잠들 수 있을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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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음나무의 프로필 이미지

    마음나무

    0
    almost 5 years 전

    이 글을 읽으면서 나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눈은 뭘까 생각했어요. 첫사랑인 남자친구가 제가 사는 곳 근처 눈 쌓인 개천에 엄청 큰 하트를 그리고 저를 불렀었지요. 잠깐 나오라고~~ 나가보니 큰 하트가 개천 바닥에 그려져 있었고, 감동했던 일이 떠오르네요. 지금은 그 사람이 저의 남편이 되어 세 아들 낳고 알콩달콩 살고 있어요. 작가님의 글이 제 추억을 떠오르게 하네요. 감사한 글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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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채윤지의 프로필 이미지

    채윤지

    0
    almost 5 years 전

    잠시 새벽을 깨웠는데 멋진 여행을 하고 가네요. 감사합니다. 작가님~

    ㄴ 답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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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구인

    0
    almost 5 years 전

    눈.. 에 대한 기억이 분명 많을 텐데.. 꺼내자니 봉인된 무엇인가를 열어야 할 거 같아서.. 현재의 ‘눈’에 모든 걸 걸고 삽니다. 문제는 눈이 아니라 비가 너무 많이 오는 나라에 산다는 거... ㅡㅡ. 무모함. 그 찬란함. 그리운 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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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so의 프로필 이미지

    Sso

    0
    almost 5 years 전

    새하얀 눈만 있는 일본여행은 경험해보지 않았지만 그동안 본 모든 눈이 머리속에 차오르는 것 같습니다 ㅎㅎ 무엇 하나에 푸욱 빠져 훌쩍 떠나버린 것이 언제였던가 생각해봅니다. 생각해보니 그리 멀지않은 과거예요! 감사합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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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슬콩의 프로필 이미지

    지슬콩

    0
    almost 5 years 전

    저는 가족들이랑 홋카이도로 스키를 타러 간 적이 있는데, 정말 그렇게 광활하게 펼쳐진 눈 덮인 희고 높은 산은 처음 봤네요 ㅎㅎㅎ 글을 읽으며 추억을 다시금 불러일으킬 수 있어 좋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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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피네마리의 프로필 이미지

    피네마리

    0
    almost 5 years 전

    정갈한 작가님의 글을 보고 페친이 요청을 해 친구가 된후 뭔지 잘 모르지만 작가님의 글을 받아보려고 신청했었습니다. 주말의 게으름을 만끽하며 이제야 메일을 열었습니다. 메일을 클릭하며 설레는 기분이 드는건 처음 메일을 만들고 받아보던 그 때의 그 기분마져 소환하게 해 주시네요^^ 언제 올지 모를 뜻밖의 편지들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겠습니다(하트하트하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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