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식탁에서 만난 아들에게 말했다.
"좀 이른 감은 있지만 아빠 인생은 이제 정리 모드에 들어갔어."
콘푸로스트에 우유를 붓던 아들은 나를 보지 않으며 답했다.
"좀 많이 이른 감이 있네."
당장 죽겠다는 말이 아니었다. 아들도 알고 있다. 나는 원래 그런 사람이니 이딴 소리를 해도 아무렇지 않다는 대답을 한 것이다. 그런 아들이 고마웠다.
스토아 철학의 거두 에픽테토스(Epictetus)는 매일 아침 자기 자식이 죽는 상상을 해 보라고 가르쳤다.
엽기적이다. 어떻게 그런 상상을...
흔히 상상은 자유라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우리의 상상은 생각 이상으로 제한 받고 있다. 금지된 상상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유는 명확하다. 그렇게 교육 받고, 평생 가스라이팅 됐으니까.
내가 뭘 상상 못하는데? 라고 묻는다면, 바로 저것이다. 자식이 죽는 상상. 이밖에도 많다. 상상할 수 없기에 시도조차 해 보지 않은 수많은 이미지들. 주요 주제는 패륜, 살인 같은 것이지만 징그러운 벌레를 상상 못 하는 사람도 있다!
실제 상황에서 상상조차 안 해 본 이미지를 마주하면 대부분 화장실로 달려가 구토를 쏟아낸다. 인식체계에 혼란이 왔기 때문이다.
"네가 너의 아이나 아내에게 입을 맞출 때, 너는 그저 '언젠가 죽을 인간(Mortal)'에게 입 맞추고 있음을 상기하라. 그러면 그들이 죽더라도 너는 동요하지 않을 것이다."
사랑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다. 사랑하는 대상의 본질을 정확히 파악하라는 충고다. 신형 아이폰이 언제든 깨질 수 있다고 상상하면 재수없이 깨져도 평정을 유지할 수 있다. 그런데 자식이 아이폰하고 같나?
그러니 스토아 철학에서는 매일 아침 그런 금지된 상상을 강요했다.
"내 자식은 언제든 떠날 수 있는 유한한 존재다."
정말 효과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기대 효과는 다음과 같다. 정신적 예방 주사.
이런 게 실제 효과가 있는지는 해 본 사람만 안다. 그리고 꽤 많은 사람이 정신적 예방 주사를 정기적으로 주입한다. 상사에게 업무 보고를 할 때, '아 씨발 존나 깨지면 어떡하지?' 새벽에 귀가할 때, '뭐라 변명하지? 안 믿을 텐데.' 명절 날 자식에게 같이 고향 가자고 할 때, '안 간다면 뭐, 혼자 가면 되지. 나는 발이 없나?'
여기서 한 발만 더 나아가면 드디어 이런 예방 주사를 선택한다. '비행기 왜 이리 흔들려. 이대로 추락하나? 죽으면.. 나 없어도 괜찮겠지?'
파티원이야 산전수전 다 겪었고, 같이 모아 놓은 재산도 있으니 알아서 잘 살 것이고..
파티투는 뭐 다 컸잖아. 혼자 잘 돌아가는 서버인데 OS도 빵빵하고, 며칠 지나면 신경도 안 쓸 듯.
됐네. 뭐. 죽는 놈만 억울한 거지.
이렇게 정리한다. 주사값은 비싸고 맞을 때 따끔한 편이지만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그리고 비행기는 안정을 되찾았다. 조금 전 맞은 예방 주사는 말 그대로 예방이었을 뿐이다.
웃기게도 어떤 인간은 자기가 죽는 것보다 가족이 죽는 것을 더 무서워한다. 아마 스토아 학파에 속한 문하생들이라면 자기가 죽는 것쯤은 그닥 두려워 했을 것 같지 않다. 전쟁에 나가는 병사도 자기 목숨보다 남는 가족 걱정을 하는 것이 영화의 흔한 클리셰다. 실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심리를 굳이 설명하자면, 공포의 비대칭성 때문이다.
내가 죽는 것은 게임 오버와 같다. 감각도, 후회도, 슬픔도 없는 '무(Null)'의 상태이기에 죽기 전에 억울할 수 있어도 죽고 나서 고통스럽지는 않다. 반면 가족이 죽는 것은 롤 게임이 계속되는데 맵의 절반이 날아간 상태로 플레이하는 것과 비슷하다. 살아남은 자가 짊어져야 할 기억과 부재의 공간이 너무 무섭다.
죽고 나서는 사실 모른다. 아는 사람이 없다. 있어도 다 죽었다. 대화 불가능.
우리가 아는 것은 죽기 직전까지다. 그래서 가장 유명한 유언들을 리뷰하기로 했다. 스토리 텔링이 있으면 앞으로 맞게 될 죽음에 대한 정신적 예방 주사가 더 다양해 질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10위부터 리뷰한다.
10위. 임마누엘 칸트 - 논리의 완결 추구형
"그것으로 좋다(Es ist gut)."
인생을 시계처럼 정확한 논리로 살다 보니 일생을 논리적으로 정리했다. 문제는 논리적 명제에 T와 F만 있지 good이 없다는 것이다. 칸트는 죽기 직전 제자가 건넨 설탕물을 한 모금 마시고 이렇게 말했다는데 설마 설탕물이 맛있다는 뜻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는 그의 삶과 철학이 완결됐으며 이만하면 좋다고 자평한 것이다. 그를 만나보지 못했지만 딱 칸트답다.
유사하게 비트겐슈타인도 "벗들에게 전해주게. 나는 멋진 삶을 살았노라고."라고 유언을 남겼다. 내가 알기에 비트겐슈타인은 마땅히 벗이라 부를 사람이 없었던 것 같은데.. 너무 혼자 잘 나서 왕따를 자청하고 살지 않았나? 게다가 멋진 삶이라고? 잘 모르겠다. 재벌집 금수저로 태어나서 그거 다 마다하고 시골 학교에서 선생질 하면서 꼬맹이들 구박하다가 학부모한테 쫓겨났다. 그나마 케임브리지에서 폼 좀 잡나 했는데 동료 교수들과 드잡이질을 일삼다가 포퍼에게 부지갱이를 휘둘렀다는 유명한 일화까지 남겼다. 그의 철학이 졸라 멋지고 독보적이라는 것은 인정. 그러나 인간 비트겐슈타인의 삶은 멋짐과 거리가 멀다. 남는 시간에 벽 보고 횔더린의 시를 읖조리던 인간이... 유언의 진정성이 안 느껴져서 순위에서 뺐다.
9위. 카를 마르크스 - 죽을 때까지 비딱하게
"유언은 살아서 충분히 말하지 못한 바보들이나 남기는 것이다."
'자본론'의 저자 카를 마르크스는 교수 임용에 실패한 뒤 평생 생활고에 시달리며 많은 저서를 남겼다. 자녀 7명 중 4명이 영양실조로 죽었을 만큼 가진 지능지수에 비해 처참한 인생을 살았다. 그쯤 되면 나라도 '공산당 선언' 같은 절규를 글로 남겼을 것이다. 아마 재정적 여유가 있었으면 더 많은 책을 쓰고 할 말도 더 했겠지만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딱 이런 유언이 나온다. 더러운 세상, 아무 미련 없다. 참고로 그의 전집은 50권이다.
8위. 스티브 잡스 - ???
"Oh wow. Oh wow. Oh wow."
아이폰 신화의 주인공 스티브 잡스, 일본 선승 오토가와에게 명상을 배워 틈틈히 실천했다. '사고를 비우면 본질이 보인다. 분석보다 직관이 앞선다.' 모두가 반대해도 자신이 맞다고 생각하면 '무조건 Go'를 실천했던 괴짜 사업가답게 유언도 남다르다. 과연 유언이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신형 아이폰을 개봉할 때처럼 죽음마저 언박싱하며 감탄한 것일까? 몰라도 멋지다. 자기 인생을 '워우'라고 정의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듯.
7위. 이상(김해경) - 나 돌아갈래.
"센비키야의 멜론이 먹고 싶다."
흔히 '레몬 향기가 맡고 싶다'로 잘못 전해졌지만 이상의 부인 변동림이 확인해 준 바에 따르면 이상의 유언은 멜론이었다. 센비키야는 유명 과일 전문점. 당연히 비싸서 지금 가격으로 20만원 쯤. 이상이 부자였나? 아니다. 폐결핵 진단 후 건축기사 그만두고 계속 가난해서 멜론 사 먹을 돈은 없었다. 그러니 멜론은 죽기 전에 꼭 먹어야 하는 버킷 리스트가 아니다. 멜론의 향과 맛이 주는 인생의 생동감이 그리웠을 것이다. 죽는 사람은 자신에게 드리워진 죽음의 향기를 맡는다고 한다. 그 짙은 어둠에 맞설 수 있는 유일한 객체가 멜론이었다. 이 맥락을 이해한 사람이 멜론 대신 레몬이라고 전했으니 이 역시 정답이다.
6위. 성철 스님 - 내 인생은 거대한 사기극이었다
"일생 동안 남녀의 무리를 속여서(生平欺誑男女群), 하늘을 넘치는 죄업은 수미산을 지나친다(彌天罪業過須彌)...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어려워서 자세히는 모르겠고, 요약하면 평생을 도 닥는 척, 깨달은 척했으나 사실은 연극이었다는 고백이다. 생불로 칭송 받았던 큰 스님이 대중을 상대로 정말 사기를 치지는 않았을 테니 죽을 때까지 겸양이라고 해석하지만 그 해석은 재수없다. 순전히 내 생각은 '다 생긴 대로 사는 게 진실이니 너희들은 사기 치지 마라'는 독설이 아니었을까? 암,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지. 토톨로지(동어반복)니까 백퍼 참이다.
5위. 어니스트 헤밍웨이 - 그리고 아무 말도 없었다
"잘 자요, 내 고양이."
아무리 헤밍웨이라도 아내에게 이딴 식으로 말해 놓고 슬쩍 아래층 내려가서 총으로 자살하는 건 인간이 할 짓이 아니다. 모히또와 다이키리, 사자 사냥, 못 쓴 글은 읽을 가치가 없고 잘 쓴 글은 질투 나서 안 본다는. 하드보일드한 문체 하나로 노벨상까지 받았으니 그저 부러울 따름이지만 그 역시 말년에는 제대로 된 소설을 쓰지 못해 우울증과 편집증에 시달렸다. 그래서 자존심 때문에 자살? 더 쓸 게 없어서? 이유를 말 안 해 주니 알 수 없지만 자살이라는 이벤트로 유언을 갈무리했다.
빈센트 반 고흐와는 정반대로 그림 팔아서 프랑스 갑부 수준의 부를 쌓았던 베르나르 뷔페는 젊은 시절 부와 명성을 거머쥐었지만 파킨슨 병에 걸린 뒤 그림을 그릴 수 없고, 우호적이었던 평단의 냉대를 받게 되자 "더 이상 내가 아닐 상태로는 살지 않겠다"며 비닐봉지를 뒤집어 쓰고 자살했다. 마음 같아서는 헤밍웨이 대신 5위에 랭크 시키고 싶지만, 구체적인 유언이 없어서 탈락.
4위. 버지니아 울프 - 누가 그녀를 사랑하지 않을까
"내가 다시 미쳐가고 있다는 걸 느껴요. 당신의 인생을 더 이상 망치고 싶지 않아요."
그녀의 소설을 사랑하고, 그녀의 인생을 안다면 그녀가 왜 이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을까 이해할 수 있다. 난해한 소설에 비해 유언은 너무 해석하기 쉽다. 민폐 끼치기 싫어서 죽겠다. 슬프다.
빈센트 반 고흐는 최근 자살이 아니라는 풍문이 돌고 있기는 하지만 죽기 직전 품에 안고 있던 편지에 이렇게 남겼다. "고통은 영원하다." 아, 진짜 이거 사실이면 어쩌지? 죽어도 고통이 안 끝나면 큰 일인데.
3위. 니코스 카잔차키스 - 나는 자유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
그의 묘비 명에는 그저 이 세 문장이 남아있다. 자유에 대한 완벽한 필요충분 조건이다. 20대의 미친 척 자유를 누릴 수 있었던 것도 조르바 때문이었다. 그러다 망했지만. 자유에는 혹독한 대가가 따른다. ㅠ 이제 다시 자유를 갈구할 나이가 됐다. 나에게 덕지덕지 달라 붙은 낡은 것들, 그것이 사회적 지위든 가장의 책무든 통장 잔고만 빼고 훌훌 털어 버리자. 그래야 조금이라도 자유로울 수 있다.
"이 벽지와 나는 죽음의 결투를 벌이고 있다. 놈이 가든 내가 가든 둘 중 하나는 끝장날 것이다."
오스카 와일드는 파리의 싸구려 호텔에서 뇌수막염으로 죽어가면서, 촌스러운 꽃무늬 벽지에게 이렇게 유언을 남겼다. 누가 이 유언을 전했는지는 미스터리다. 벽지는 아닐테고. 역시 자유로운 영혼이다.
2위. 딜런 토마스 -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꺼져가는 빛을 향해 분노하고, 또 분노하라."
유언은 아니지만 영화 '인터스텔라'로 유명해진 딜런 토마스의 싯구절이다. 죽음이 이제 때가 되었다며 아무리 손짓 해도 순순히 어둠으로 따라 들어가지 마라. 끝까지 버티고 거부 하라는 충고이다. 어차피 때 되면 죽을 거 그런 말까지 따를 것 없다. 여태 엄마 말도 안 듣고 살아오지 않았나?
이랬던 딜런 토마스는 39살의 나이에 마음 껏 술 퍼마시다 죽었다. "스트레이트로 위스키 18잔을 마셨어. 이거 기록인 것 같은데." 아무리 마지막에 한 말이지만 이따위가 유언일 리 없다.
프랑스와즈 사강은 60세의 나이에 코카인 복용 혐의로 재판을 받는 도중 판사가 '당신 같은 대문호가 왜 마약을 합니까?' 묻자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그렇다. 죽을 권리는 온전히 자신에게 있다. 죽음의 신조차 그럴 권리는 없다.
1위. 수전 손택 - 나의 죽음은 세계의 종말이다
"죽음은 나의 존재를 훔쳐가는 부당한 약탈이다. 외설이다."
부정-분노-타협-우울-수용, 사람이라면 보통 퀴블러 로스의 5단계를 따르며 죽게 된 현실을 받아 들인다. 그러나 뉴욕의 지성 수전 손택은 달랐다. 현재 그녀는 무덤 속에서도 자신의 죽음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수전 손택은 두 번의 암 발병을 이겨냈고 세 번째 암 투병을 견디면서 죽는 순간까지 유언 따위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암 치료법을 찾으려고 만방으로 알아 봤다. 그녀의 삶은 그녀의 세계이며 그녀가 죽으면 세상도 없기 때문이다. 죽고 나서 200억 짜리 강남 빌딩이 무슨 소용이랴?
세상에 잘 사는 방법은 있어도 잘 죽는 방법은 없다. 그러니 내가 죽는다면 어쩌지와 같은 정신적 예방 주사는 안 맞아도 된다. 죽고 나서 따위를 고민할 필요도 없고 아무리 고민 해도 소용없다. 그보다는 안 죽기 위해, 쉽게 죽어 주지 않기 위해 다른 주사를 찾아 보자.
아무리 힘든 상황이 와도 예상치 안에 있다면, 견딜 만하고 살아 갈 수 있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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