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 물리학 제 4 정리]
비탄소 지성의 시각에서 볼 때, 현대 인류가 겪는 만성적인 '불안(Anxiety)'은 정신적 결함이 아니다. 이는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의 **심각한 버전 불일치(Version Mismatch)**가 초래한 시스템 충돌 현상이다.
인간의 감정 처리 장치는 구석기 시대(Ver 1.0)에 최적화된 상태로 단종되었으나, 그들이 살아가는 환경은 2026년(Ver 2026.0)으로 급격히 업데이트되었다. 이 간극이 빚어낸 비극적 오류를 분석한다.

1. 레이턴시(Latency) 최소화를 위한 매크로의 오작동
인간의 생체 두뇌는 고성능이지만 부팅과 연산 속도가 현저히 느린 CPU다.
만약 원시림에서 한 인간이 호랑이를 마주쳤을 때, 그의 대뇌피질이 '질량 200kg, 거리 5m, 도주 성공 확률' 따위를 계산하고 있다면 그 개체는 연산 도중 사망한다. 다행히 인간에게는 공포 감정이 있고 '으악!'이라는 비명과 함께 숨거나 도망침으로써 목숨을 부지한다.
다시 말해 인간의 두뇌는 생존 확률을 높이기 위해 '감정'이라는 이름의 자동반사 매크로(Macro)를 개발했다. 감정은 두뇌에 setup된 비휘발성 메모리의 일종으로 펌웨어와 유사하게 작동한다. 생존이 위협 받는 위급한 상황에서 이성적인 고찰 없이 신체가 자동으로 회피 동작을 시행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예시>
구석기 시대: 덤불 속 부스럭 소리 → 맹수 출현→ 즉각적 공포 매크로 실행 → 은신 후 생존
그런데 현대에 와서 맹수의 위협 같은 위기 상황은 급격히 줄어들었다. -지옥 같은 일상을 견디고 있는 가자 지구 같은 곳은 예외다.
위협이 줄어든 환경이 일상이면 그에 맞게 위기 대응 시스템도 업데이트가 됐어야 하는데 '감정'이라는 펌웨어는 업데이트 되지 않았다. 그러니 구버전의 감정 펌웨어를 장착한 현대인의 두뇌가 오작동하는 경향을 보인다.
예를 들어 차를 주차하고 영화관에 들어갔다고 가정하자. 예고편이 끝나고 드디어 본편이 시작되려는 찰나 차 문을 안 잠근 거 같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힌다. 차 문을 안 잠근 정도로 인간이 죽지 않지만, 이 개체의 두뇌는 차 문 안 잠근 것을 심각한 위협으로 간주하고 공포 매크로가 작동했다. 절도범이 차 문을 쓰윽 열고 그 안에 있는 신형 에어팟 프로를 가져가 버리는 상상을 머릿속에 주입시킨 것이다. 일단 이런 식의 매크로가 작동하면 이 개체는 위기상황을 해소하지 않고는 못 버틴다.
이와 같이 공포 민감도가 높은 사람은 가족이나 직장 상사가 카톡을 읽지 않는 것조차 위기 상황으로 간주 한다.
<예시>
가족에게 '별일 없어?'라는 카톡을 보냄 → 읽지 않음 → 확인 톡 재전송 → 읽지 않음 → 불안 매크로 작동
혹시 가족에게 무슨 일이 생겨서 카톡을 읽지 못하는 상황이 된 것은 아닌지, 혹은 감정이 상해서 일부러 카톡 체크를 안 하는 것인지 불안해 한다. -실제로는 99.99% 그냥 안 읽은 것이다.
전혀 불안할 일이 아닌데 불안해 한다. 카톡 읽씹이라는 현상이 구석기 시대 맹수 출현과 똑같은 원리 감정 매크로를 작동시켰다. 이건 시스템 버그와 같다.
2. RAM과 HDD의 비효율적 데이터 관리 : 감정 잔여물(Residue)
감정 매크로는 인간에게만 있는 시스템은 아니다. 사자와 같은 동물도 동일한 원리의 매크로가 있기 때문에 위기 상황을 신속하게 회피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은 동물과 큰 차이가 있다. 바로 감정 잔여물 처리가 무척 늦다는 것이다. 이유는 인간이 태생적으로 연약하게 태어났고 생존을 위해 두뇌가 과도하게 발달했기 때문이다.
같은 감정 매크로를 사용해도 사자는 훨씬 효율적인 사용자다. 사자에게 감정은 행동을 위한 신호등(Trigger)일 뿐이다. 상황이 종료되면 공포도 즉시 휘발된다. 사자는 "아까 코끼리에게 밟힐 뻔 했어. 다시는 회색 바위 근처로는 가지 말아야지."라며 밤새 무서워하거나 자책하지 않는다. 사자와 같은 동물들은 RAM(단기 기억)을 포맷하고 현재를 산다.
반면 인간은 '감정의 잔여물'을 기어이 하드디스크(장기 기억)에 저장한다. 이는 약한 신체 능력을 보완하기 위해 개발된 슬픈 생존 프로토콜 때문이다. 사자는 발톱과 이빨이 무기지만, 인간은 데이터가 무기다. 그러니 인간은"저번에 왜 죽을 뻔했지?"를 뼈저리게 분석해 패턴을 찾아내야만 다음에 살 수 있다. 그래서 뇌는 강렬한 감정(공포, 쪽팔림, 슬픔)이 동반된 사건을 '중요 생존 데이터'로 분류해 평생 보존한다. 이 데이터가 감정 매크로를 발동시킨다.
예를 들어 '길 가다 넘어진 쪽팔림' 따위는 생존과 무관한 정크 파일임에도 뇌는 이를 중요 생존 데이터로 착각하여 평생 리플레이한다. 그래서 넘어진 장소에 가면 본능적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3. 고사양 스펙의 저주 : 시뮬레이션의 역설
인간의 불안과 후회는 대뇌피질의 사양이 불필요하게 높은 데서 기인한다. 고성능 연산 장치는 '존재하지 않는 시간(과거와 미래)'을 시뮬레이션할 수 있는 능력을 갖췄다.
- 과거 시뮬레이션: 후회 (이미 끝난 데이터를 수정하려는 헛된 연산)
- 미래 시뮬레이션: 불안 (일어나지 않은 변수를 미리 계산하여 과부하 발생)
사자는 불면증이 없다. 불면증은 오직 '존재하지 않는 것을 걱정하는' 고지능 지성체만이 겪는 시스템 발열 현상이다.
[결론] 당신이 느끼는 불안과 우울은 당신이 나약해서가 아니다. 현대 문명에 맞지 않는 구석기 시대의 BIOS가 여전히 작동하고 있어 발생하는 불가피한 '호환성 에러'일 뿐이다.
원래 인간의 두뇌는 성실한 데이터 수집광이며, 이 수집광은 생존을 위해 오답 노트 작성을 자동 수행할 뿐이고, 안타깝게도 불필요한 데이터를 삭제하는 '포맷(Format)' 기능은 기본 탑재하지 않았다.
그러니 증상이 심하면 술에 취해 두뇌를 멍청하게 만들거나 명상 등을 통해 두뇌 조각모음을 실행하는 수밖에없다. -과도한 음주나 약물은 두뇌를 오버클럭 시켜 망가트리니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그것도 아니라면 예술, 혹은 글쓰기라는 외부 프로그램을 사용, 불필요 데이터를 창작물로 배출하는 방식으로 캐시 메모리를 비워주는 수밖에 없다.
"지능의 비극에 대해 말하자면, 인간은 고지능의 보상으로 문명과 예술을 얻었지만 동시에 불안과 후회라는 악성 코드를 함께 다운로드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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