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피레터 2.0 - 이 순간을 오랫동안 기억하게 될 거라는 예감

매달 새로운 주제의 에세이를 보내드리는 에피레터의 이번 달 주제는 “기억”입니다.

이 순간을 오랫동안 기억하게 될 거라는 예감

올해 만난 책 중에서 가장 신기하고 독창적인 책을 꼽자면 <슬픔에 이름 붙이기> 이다. 이 책에는 살면서 일상적으로 경험할 수 있지만 명확한 단어로 표현하기는 어려운 섬세한 감정을 소개하는 신조어로만 가득 채워져 있다.

나도 누군가의 인생에서는 엑스트라임을 깨닫는 순간. 뻔하고 식상한 것에 큰 감동을 받는 순간. 나의 말이나 행동이 타인의 삶을 어떻게 바꾸었을지 궁금해하는 마음. 이러한 상황이나 감정은 그저 흘려보내도 괜찮은 사소한 것들이지만 저자는 각각의 상황에 알맞은 단어를 새롭게 만들어냄으로써 우리의 감정을 세심하게 돌아볼 수 있도록 이끌어주었다.

두꺼운 사전처럼 수많은 단어가 빽빽하게 소개되어 있는 책이라서 대부분의 단어는 잘 생각나지 않았지만 유독 기억에 남는 단어 하나가 있었다. ‘지금 이 순간이 오랫동안 기억되리라는 걸 깨닫는다’는 뜻을 가진 데뷔(dès vu)이다.

현재에 머무르고 있으면서도, 마치 미래를 엿보고 온 것처럼 현재를 그리워하게 될 거라는 깨달음이 들었던 순간이 나에게는 참 많았다. 이러한 ‘데뷔’의 순간은 함께 있으면 편안한 사람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주로 겪었다.

완벽한 봄날의 날씨에 가족들과 함께 장을 보기 위해 조용한 주택가를 지나쳐 동네 마트를 걸어갈 때, 강아지를 산책시키거나 자전거를 타거나 운동을 하는 사람들 틈에서 좋아하는 노래를 들으며 산책로를 천천히 걸을 때, 바보 같은 모습도 솔직하게 보여줄 수 있는 오랜 친구들과 둘러 앉아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눌 때, 조용한 카페에서 향이 좋은 드립 커피와 치즈 케익을 앞에 두고 언제 만나든 마음이 편안해지는 사람과 농담을 주고 받을 때, 좋아하는 가수의 야외 콘서트를 볼 때. 너무 평온하고 즐거워서 벌써부터 헤어질 생각을 하니 아쉬운 마음만 들었던 모든 순간에 ‘데뷔’를 느꼈다.

신기하게도 ‘이 순간은 기억에 오래 남을 것 같다’는 예감은 대개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찾아온다. 그동안 경험한 수많은 ‘데뷔’의 순간들이 그러했다. 바쁜 하루의 틈새뿐만 아니라 어떤 특별한 일도 벌어지지 않은 심심하고 평범한 하루 속에서도 얼마든지 데뷔를 찾을 수 있었다.

늘 남들과는 다른 사람처럼 살아가고 싶었고, 그래서 나를 특별하게 만들어줄 경험을 찾아나섰는데 정작 내 마음에 오랫동안 남을 기억은 의도적으로 찾아나설 필요도 없는 소소한 순간들이라는 점이 신기하다. 어쩌면 지금 순간을 그저 흘러보내지 않고, 현재의 내가 얼마나 평온하고 즐거운지 좀 더 자주 의식한다면 더 많은 데뷔를 일상 속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다만 데뷔라는 신조어는 <슬픔에 이름 붙이기>라는 책에 수록된 단어라는 점을 고려해보면 데뷔는 약간의 슬픔과 그리움, 아쉬움도 포함하는 복합적인 감정일 것이다. 그래도 과거를 돌이켜보며 마냥 슬퍼할 이유도 없지 않을까? 이 모든 순간이 영원하지 않다는 걸 깨닫는다면 우리는 훨씬 더 열심히 최선을 다해 현재의 즐거움을 추구할 수 있으니 말이다.

어쩌면 모든 것이 영원하지 않는다는 깨달음을 발판으로 조금 더 용기를 낼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더 자주 이렇게 모이자, 다음에 한 번 더 놀러가자, 오늘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어서 좋았으니까. 평소라면 부끄러워서 숨겼을지도 모를 이러한 솔직한 마음을 훨씬 더 자주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용기들이 하나둘씩 모인다면 나중에 돌아봤을 때 얼마나 많은 '데뷔'의 순간이 만들어졌을까? 결국엔 모두 지나갈 것임을 알면서도 지금 이 순간을 더욱 온전히 마음속에 담아두려는 모든 노력이 담겨있기에 이 수많은 데뷔의 순간들은 장기적으로 보면 슬픔보다는 용기를 크게 길러주지 않을까 싶다. 그러니 이번 가을에는 조금 더 용기내서 나의 평범한 하루 속에 숨어 있는 ‘데뷔’를 잔뜩 수확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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