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피레터 2.0 - 서로의 손글씨를 알고 있는 사이

서로의 손글씨를 알고 있는 사이

‘서로의 손 글씨를 알고 있는 관계’라는 표현을 어디선가 접한 적이 있다. 지금은 편지 대신 문자 메시지로 소통하는 일이 보편적으로 자리 잡은 시기이지만, 그럼에도 이 표현은 무척 낭만적으로만 느껴진다. 어쩌면 손글씨라는 단어가 자연스럽게 어린 시절을 연상시키기 때문에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서로의 손글씨를 가장 많이 주고받는 시기는 아무래도 어린 시절뿐이니까.

내가 알고 있는 누군가의 손글씨는 모두 어린 시절에 접했다. 엄마는 뭐든 꼼꼼하게 관리하는 편이라 매년 1월이 되면 이전 달력에 적혀있던 각종 경조사를 새로 받은 달력에 옮겨적었고, 가계부도 늘 노트에 기록하셨다.

아빠는 어려운 한자를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이 멋지게 작성하셨다. 어른들의 글씨체를 이해하기 힘들었던 어린 시절이었음에도 부모님의 손글씨는 항상 멋있었고 왠지 그 글씨 안에는 언제나 중요한 내용이 담겨있을 것만 같았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새로운 친구들을 많이 만나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몇 년 동안 같은 반을 함께하는 친구들도 꽤 생겼다. 그런 친구들과는 수업 시간에 쪽지를 자주 주고받았다. 점심시간에 뭘 하면서 놀지, 학교 끝나고 뭐할 건지, 문방구에서 무슨 간식을 살지와 같은 시시콜콜한 내용뿐이었지만 그래도 쪽지를 주고받는 순간은 언제나 신났다. 선생님의 시야를 뚫고 은밀하게 전달되는 크리스마스 선물같아서 신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물론 핸드폰은 내가 초등학생이었을 때도 이미 등장했었고, 이메일 보내는 법도 수업 시간에 다 배웠기 때문에 손편지를 주고받는 건 조금은 별난 행동이기도 했다. 그래도 먼 곳에 있는 친구와 서로의 근황을 주고받을 때, 친구에게 생일 선물을 전달할 때, 혹은 크리스마스를 앞두었을 때와 같은 특별한 순간에는 늘 손편지를 친구와 주고받았다. 노트의 귀퉁이를 대충 잘라서 주고받았던 쪽지와는 달리 편지에는 서로의 개성을 자유롭게 보여줄 수 있었기 때문에 어떤 편지를 받든 늘 소중하게 간직했다.

똑같은 생일 축하 편지를 받아도 친구의 성격에 따라 편지의 구성도 달랐다. 평소에도 세련되고 멋지다고 생각했던 친구는 손글씨도 멋지게 썼고, 재미있고 활달한 친구는 글씨 중간중간에 직접 그린 귀여운 이모지를 넣었다. 깔끔한 친구는 틀린 글씨가 있으면 수정 테이프를 꼼꼼하게 덧칠했고, 쿨한 친구는 잘못 쓴 글씨 위에 x 자를 그린 뒤 태연하게 넘어갔다. 입력과 수정이 완벽하게 이루어지는 문자에서는 확인할 수 없는 이런 개성들을 손글씨를 통해 발견할 때마다 그 친구들과 더욱 친밀하게 연결되는 기분이 들었다.

펜을 움직이는 대신 손가락을 움직여서 문자로 편리하게 소통할 수 있는 요즘은 아무리 가깝고 친밀한 관계여도 서로의 손글씨를 알아갈 기회를 찾기 어렵다. 낯선 사람의 손글씨를 접하기도 어려워진 건 마찬가지다. 때때로 배달 음식을 받을 때 리뷰를 부탁하는 손글씨 메모를 발견할 때도 있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니 손글씨가 아니라 손글씨 모양의 폰트였던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굳이 손으로 글씨를 쓰지 않아도 충분히 의사소통을 전달할 수 있는 편리한 세상이 도래했으니 어쩔 수 없다. 하지만 빠르고 효율적으로 소통하는 게 자연스러워진 세상이기 때문에 오히려 손으로 직접 쓴 글씨를 읽어 내려갈수록 시간의 흐름이 느려지는 걸 더욱 잘 느끼게 된다. 상대의 손글씨를 보면 어떤 마음으로 이런 글을 썼을지, 어떤 사람이 이 글을 썼을지, 어떤 진심을 담고 싶어 했는지 생각할 여지가 생기니까.

손글씨는 단순한 글자가 아니라 시간을 들여 손으로 새긴 기억의 조각이 된다. 그래서 서로의 손글씨를 알고 있다는 건 그만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서로의 마음을 오래 들여다볼 수 있었던 관계라는 뜻이 아닐까 싶다.

현대 사회는 숨 쉴 틈 없이 빠르게 변화하고 있지만 그래도 어릴 적 주고받은 편지 속 손글씨를 통해서는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그 안에 담긴 진정성과 연결될 수 있다. 다시 그 시절처럼 천천히 글자를 적으며 진심을 담아보는 순간을 일상에 자주 들여놓아본다면, 바쁘게 앞만 보고 사느라 표현하지 못했던 나의 진실된 생각을 되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미 간편하게 상대의 안부를 물을 수 있는 수단이 많지만 아무래도 다가오는 크리스마스에는 주변 사람들에게 손편지를 적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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