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피레터 2.0 - 흘러가지 않는 과거의 기억들

흘러가지 않는 과거의 기억들

기억은 강물처럼 흘러간다. 제한된 메모리를 유지하기 위해 과거의 기억부터 시간 순서대로 나의 뇌를 떠나간다. 하지만 어떤 기억들은 흘러가지 않고 계속 내 머릿속에 남아 있기도 한다. 또 어떤 기억들은 떠내려가면서도 옅은 흔적들을 남기고 간다. 오늘 내 머릿속에 남아있는 과거의 기억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 

온천과 할머니의 둥근 배

우리가족은 나와 동생들이 어렸을 시절 할머니, 할아버지, 고모, 사촌오빠를 포함한 대가족의 형태로 전국 곳곳을 누볐다. 그래서 옛날 기억을 떠올리면 조부모님과 함께 했던 기억들이 많이 남아있다. 그 중에서도 나의 기억에 이상하리만치 오래 남아있는 것은 할머니와의 기억이다. 어느 지역에서의 한 온천에서 할머니의 둥근 배 위에 얹어진 어린 내가 떠오른다. 할머니 배 위에 누워서 할머니를 끌어안으며 눈이 마주쳤던 순간이 기억난다. 그 때 내가 몇 살이었는지, 어떤 상황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그 때의 따뜻했던 온도와 포근했던 할머니의 품만이 기억 속에 남아있다. 

캠핑장에서 아빠가 구워준 닭

어릴적 우리는 캠핑을 자주 다녔다. 요즘같이 모든 것이 구비되어있는 캠핑장에서의 캠핑이 아니라 '노지캠핑'. 지금은 그렇게 못하지만, 그때는 가능했다. 솔밭에 자리를 잡고 텐트를 친다. 우리엄마는 텐트를 잘친다. 아빠와 엄마가 합심해서 텐트를 칠 동안 나와 동생은 주변을 돌아다니며 구경을 한다. 순식간에 텐트가 완성되고 저녁을 먹기 위해 땔감을 주워 불을 피운다. 활활 불이 타오르면 하나로마트에서 구매한 한 마리의 닭을 꺼낸다. 약간의 소금간을 한 닭을 호일로 칭칭 감은 후 불길 속으로 던진다. 그러면 저녁 준비 끝. 캠프파이어로 구운 닭의 맛은 경험한 사람이 아니면 절대 알 수 없다. 얼마나 맛있는지! 통구이로 구운 닭과는 또 다른 맛이다. 호일로 칭칭 감쌌기에 닭의 육즙이 그대로 유지되어 있어서 짭조름한 닭한마리를 먹는 느낌이다. 그래서 이 메뉴를 치킨으로 기억하기 보다는 '닭'이라는 단어로 기억하고 있다. 

잠이 들기 직전 떠오르는 부끄러운 기억들

어지간히 흘러갔으면 좋겠는 기억들은 오히려 쉽게 흘러가지 않는다. '빨리 잊어버리자' 생각한 기억은 잠이 들기 직전 내 머릿속을 강타한다. 술자리에서 오바했던 그 순간, 어쩌다 얼굴이 빨개졌던 그 순간, 오기로 되도 않는 말을 막 내뱉었던 순간. 그리고 누군가를 질투했던 나, 누군가를 미워했던 나, 누군가를 믿었지만 배신당했던 바보같던 나의 모습이 떠오르면 그 날 밤 잠은 다 잤다. 부끄러운 기억은 왜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걸까? 오래오래 기억하고 싶은 좋은 기억들은 쉽게 풍화되지만 싫어하는 기억은 오히려 자주 생각나는 아이러니가 신기하기만 하다. 

시간이 흐르면서 내게 남아있는 기억들도 하나 둘씩 바톤터치를 하게 될 날이 올 것이다. 10년 뒤에는 이 자리에 어떤 기억들이 남아있을까? 내가 이 세상을 떠나기 전, 내 마음에 남을 하나의 기억은 과연 어떤 기억이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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