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피레터 2.0 - 향수에 기억 담아두기

향수에 기억 담아두기

일 년 중 아주 짧은 특정 시기에만 입어야 하는 옷이 있다. 트렌치코트나 가죽 재킷처럼, 정말 멋스럽지만 여름에도 겨울에도 입기 어려운 옷들이 그렇다.

그래서 요즘에는 외출할 때마다 무조건 가죽 재킷을 챙겨 입는데, 그러다 보면 전날 뿌렸던 향수의 존재감이 그대로 느껴질 때가 있다. 한쪽 팔을 거쳐 목덜미를 지나 반대편으로 건너간 옷소매에 팔을 넣는 바로 그 시점에.

그 전날 가죽 재킷을 입고 나가기 전에 뿌렸던 향수는 드럭스토어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저렴한 제품이었지만 가격과는 상관없이 내가 무척 사랑하는 향수였다. 분홍색의 매끄럽고 단단한 비누에서 맡을 수 있을 법한 은은하고 자연스러운 꽃향기가 마음에 들기도 했지만 해외에서 여러 가지 선택지를 앞두고 고민 끝에 구매한 첫 향수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짧기도, 길기도 한 1년간의 해외 생활을 하던 도중, 외롭고 막막한 마음을 달래주었던 건 다름 아닌 향수였다. 외출할 때 딱 한두 번만 사용해도 바로 기분이 좋아지는데, 아주 소량이라도 수시로 덧뿌려줄수록 행복은 더 오래갔으니까.

그리고 도통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의 속과는 달리 향수는 설명란에 적힌 대로 있는 그대로의 향을 솔직하게 내게 전해준다는 점도 어쩐지 위로가 되었다.

하지만 향수는 사치품이고, 그 당시의 나는 생계를 유지하는 것 외에 다른 곳에 많은 돈을 투자할 여유는 별로 없었기 때문에 내가 선택한 대부분의 향수는 한입에 꿀꺽 삼킬 수도 있는 아주 작은 10ml 향수뿐이었다.

하지만 아주 소량만 사용하더라도 내 취향에 꼭 맞는 향수 한 방울이 하루 동안의 기분을 좌우한다는 걸 알게 된 이후로는 굳이 큰 용량의 향수를 구매하지 않게 되었다. 오히려 각기 다른 향수를 눈앞에 두고, 그 향수에 얽힌 각기 다른 기억을 떠올리는 편이 좋기도 했다.

함께 일했던 언니의 추천으로 산, 플로럴 향수는 몇 년 후 어느 친구와 친해지는 계기가 되어주었다. 그 제품을 통해 우리 둘 다 향수에 관심이 있는 데다가, 해당 브랜드의 제품을 좋아한다는 공통점도 있다는 걸 알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 이후로는 꽃향기가 나는 향수를 볼 때마다 그 친구의 얼굴부터 떠오른다.

누군가로부터 선물 받은 향수는 사용할 때마다 고마움과 더불어 작은 애틋함이 떠오르곤 한다. 선물로 받은 상큼한 과일 향 향수는 다른 어느 때보다 무더웠던 올여름 내내 아주 살짝 뿌리면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깔끔한 비누 향의 향수는 짧은 외출을 할 때 사용하기 좋았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라임과 바질 향의 향수는 어떤 외출을 하든 더 특별한 기분을 느끼게 해주었다.

이들 모두 확연히 다른 향이긴 하지만, 나를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나의 취향에 맞추어 선물해 준 것이라는 점에서 어느 하나 우열을 가릴 것 없이 특별하기만 하다.

향수와 함께 보관하는 기억이 얼마나 특별한지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지금도 내 주변에는 향기가 많다. 향수보다 지속력은 약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부담 없이 산뜻하게 사용하기 좋은 바디스프레이, 신체를 제외한 모든 용도에 뿌리기 좋은 멀티 스프레이, 향수만큼 강렬한 향의 바디로션, 딱 한 번씩만 사용해 본 인센스 스틱, 캔들, 에센셜 오일 등등. 시선이 닿는 곳마다 향기가 있다. 

이렇게 많은 향이 늘 주변에 있으니, 앞으로도 내가 가는 곳마다 내가 좋아하는 향과 함께한다면 어쩌면 향수와 함께 쌓아갈 기억은 앞으로 끝도 없이 이어질 것 같다.

그러다 보면 특정한 향수를 통해 독특한 기억을 불러올 수도 있지 않을까? 어떤 행복한 순간에는 내가 좋아하는 시트러스 향을, 위로가 필요한 시기에는 산뜻한 비누 향을, 누군가를 추억하고 싶을 때는 플로럴 향으로 곁을 감싸면 향기는 일종의 시간이자 장소, 기록이 되어 내 삶을 더욱 다채롭게 만들어주지 않을까 싶다.

오늘도 내 곁에 가볍게 스며든 향은 그저 기분전환에서만 끝나는 게 아니라 언젠가 다시 그 향을 맡았을 때 오늘을 생생하게 기억하도록 이끌어줄 것이다. 향기와 기억이 만들어내는 이 은은한 연결고리 덕분에 앞으로 다가올 내 하루하루가 조금은 더 특별해질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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