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피레터 2.0 - 상상했던 만큼 최악의 일은 일어나지 않아

상상했던 만큼 최악의 일은 일어나지 않아

미용실에 방문하는 건 언제나 내게 작은 도전거리였다. 평소에 잘 보지도 않는 거울을 못해도 20분은 마주 보고 있어야 한다는 점, 어떻게든 대화거리를 찾아내 스몰토크를 하면서 어색함을 떨쳐내야 한다는 점, 때로는 어떤 결과가 나올지 아무것도 예상할 수 없는 채로 그저 가만히 앉아서 인내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는 점 등 어색한 순간이 한둘이 아녔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긴 머리에 주기적으로 매직을 했던 어린 시절부터 미용실을 어려워했던 것 같다. 어린 시절의 나에게 미용실이란 내가 썩 원하지도 않았던 시술을 단지 ‘머리가 반곱슬이면 다 해야 하는 거다’라는 주변의 압박에 못 이겨 방문해야 했던 곳이었다. 그리고 본격적인 시술을 하기 전에 대체로 소파에서 30분 정도 대기해야 했던 곳이었고, 그 이후에는 또 몇 시간 동안 의자 위에 앉아 모든 것이 끝나기만을 잠자코 기다려야 했던 곳이기도 했다.

너무나도 잘 펼쳐져서 머리에 딱 달라붙을 정도의 생머리를 하고 돌아올 때면 언제나 진이 빠졌다. 미용실에서 벌어지는 오랜 기다림에 자꾸만 지쳐버린 탓에 미용실은 어느 순간부터 내게 ‘할 수만 있다면 최대한 방문을 미루고 싶은 곳’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마치 치과처럼 말이다.

성인이 되어 예약제로 운영되는 1인 미용실에 방문하면서부터 미용실에서의 기다림에 대한 부담은 상당히 줄어들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나는 미용실이 어색하다. 하지만 지난주에는 아무리 어색하고 어렵더라도 미용실을 꼭 방문하고 싶었는데, 미용실에서의 시간을 견디는 것보다 지금의 내 머리를 견디기가 훨씬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난 주말, 미용실에 예약하면서 마음을 먹었다. 이번에는 꼭 귀 뒤로 옆머리를 넘길 수 있는 동그란 짧은 머리에서 벗어나자고. 그 대신 귀 뒤쪽으로 넘길 머리가 없을 정도로 옆머리를 짧게 잘라보자고 결심했다.

미용실 실장님은 나의 요구사항을 듣고 곧바로 과감하게 옆머리를 잘라주었다. 그런데 단 한 번의 가위질로 생각보다 많은 양의 머리가 잘려 나가는 걸 보니 어쩐지 불안해졌다. 그리고 딱 한 가지 생각만 들었다. ‘결과물이 나랑 전혀 안 어울리면 어쩌지?’

짧은 머리를 유지한 지 몇 년 되었지만, 그래도 옆머리까지 짧게 올려서 투블럭에 가까운 머리를 한 적은 살면서 딱 한 번뿐이었다. 한때 호기심에 해보았던 투블럭은 썩 마음에 들지도 않았고 내 취향과도 별로 맞지 않았다.

그런데 사람은 언제나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는 말이 있지 않나. 요즘의 나는 옆머리가 자꾸만 걷잡을 수 없이 붕 뜨는 모습을 견디기 힘들었고, 그래서 나와 썩 어울리지 않을 거란 어렴풋한 직감이 들었음에도 다시 투블럭에 가까운 짧은 머리를 하고 싶었다. 덥수룩한 옆머리가 안겨주는 불편함에서 하루빨리 벗어나고 싶었으니까.

그래서 짧은 머리가 정말 안 어울릴 수도 있겠다는 직감이 들어도 그냥 그 순간을 인내하기로 선택했다. 어차피 이미 잘린 머리를 다시 붙일 수도 없었다.

약 20분에 걸쳐 머리를 다 잘라낸 결과, 나의 요구사항과 완벽히 일치한 헤어 스타일이 나왔다. 나와 잘 어울리는지는 딱히 모르겠지만, 오히려 내 얼굴형의 단점이 부각되는 것 같기도 하지만, 그래도 내가 원했던 시원함과 깔끔함만은 아무런 의심의 여지 없이 정확하게 얻어냈다.

집에 돌아와서 다시 거울을 보아도 새로운 헤어 스타일은 역시나 내가 상상했던 대로 나와는 썩 어울리는 것 같지도 않고 그저 어색하기만 했다. 하지만 어차피 머리카락은 아무런 노력을 들이지 않아도 알아서 잘 자라지 않나. 그래서 지금의 어색함을 너무 의식하지 않으려 했다.

그런데 새로운 머리를 의식할 수밖에 없는 순간이 일상 곳곳에서 순식간에 찾아왔다. 머리를 자르고 나니 일상에는 놀라운 일투성이라는 걸 새삼스럽게 다시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바람이 많이, 거세게 불어도 머리가 전혀 거추장스럽지 않고 오히려 개운하기만 하다니. 밥을 먹을 때 머리를 의식하지 않아도 괜찮다니. 세수를 할 때 앞머리와 옆머리가 이렇게 덜 적셔질 수도 있다니. 머리를 감을 때 이토록 적은 양의 샴푸만 써도 된다니. 머리를 감고 말리는 모든 과정에서 이렇게 놀라울 정도로 시간과 노력을 덜 쏟을 수 있다니!

어떤 일을 하든 그동안 소소하게 거추장스러웠던 일상이 얼마나 편리해졌는지 실감이 되었고, 이쯤 되니 새로운 헤어스타일이 나와 어울리든 말든 그건 크게 염려할 일이 아니라는 생각만 들었다. 삶이 놀랍도록 가벼워지고, 갖가지 불편함이 개선되었는데 어떻게 불만만 입에 올릴 수 있을까.

머리에 대한 걱정이 웬만큼 사라지고 나니, 어쩌면 그동안 다른 방면에서도 괜히 지나치게 최악의 상황을 생각하느라 머뭇거리기만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로운 스타일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아도 짧은 머리만이 주는 장점에 100% 만족할 수는 있는 것처럼, 인생에서 마주하는 다른 일들도 오직 상상했던 최악의 시나리오만이 일어나는 경우는 드물고 어느 한쪽이 100% 마음에 안들더라도 다른 한쪽에서는 썩 괜찮은 면을 발견할 수도 있지 않을까.

걱정과 상상이 현실을 방해하는 상황은 인생에서 자주 마주친다. 막상 시도해 보면 최악의 일은 일어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왜 그동안 그렇게도 두려워했을까? 사소한 용기가 일상을 놀라울 정도로 더욱 가볍고 만족스럽게 만들어줄 수도 있는데.

‘생각만큼 최악으로 흐르지는 않을지도 몰라.’ 거울을 통해 새로운 헤어스타일을 볼 때마다 당분간은 이 문장이 머릿속에 떠오를 것 같다. 이미 가볍고 개운해진 머리에 긍정적인 문장을 하나 더 넣는다고 해서 또다시 머리가 무거워질 일은 없겠지. 머리를 짧게 자르는데 큰 역할을 했던 내면의 용기를 바탕으로 앞으로 또 다른 놀랍고 재밌는 행동과 도전하는 순간과도 마주하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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