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피레터 2.0 - 올해의 영수증을 만들어볼까? (도서편)

올해의 영수증을 만들어볼까? (도서편)

작년부터 남몰래 진행했던 작은 기록 프로젝트가 있다. 도서관에서 책을 빌릴 때마다 이 책의 가격, 종류, 완독 여부를 엑셀로 정리해서 모아두는 프로젝트로, 이 기록의 맨 첫번째 칸에는 ‘기록 영수증’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어느샌가부터 책의 가격은 무척 비싸졌고, 큰 맘 먹고 책을 구매하더라도 좁은 방 안에는 더 이상 이를 보관할 공간이 없어서 작년부터 도서관을 줄기차게 이용했다. 그러다보니 우리 동네 도서관에 대한 데이터도 덩달아 쌓이기 시작했다.

도보로 30분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도서관은 정말 작고 낡았지만 독특한 비문학 서적을 신간으로 자주 들여오고, 배차 시간이 20분 간격인 버스를 타고 20분 정도 달려야 도착하는 도서관에는 종류를 막론하고 흥미로운 신간 서적이 대량으로 들어온다.

도보로 50분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도서관은 가장 크고 멀끔하며 어디서도 이름을 들어본 적 없는 특이한 예술 서적이 정말 많다. 그 근처에 있는 또 다른 도서관은 최근에 리모델링을 마쳐서 책을 읽기 좋은 편안하고 독립된 좌석과 더불어 공부하기 좋은 넓직한 자리도 많다.

이런 식으로 각각의 도서관에 대한 데이터가 쌓이니 그날그날의 기분에 따라서 가고 싶은 도서관을 선별하는 재미도 생겼다. 다양한 분야의 신간 서적을 구경하고 싶다면 20분 동안 버스를 타고 가야하는 도서관에 가고, 오랜 산책을 하고 싶다면 약 50분 정도 걸어가야 도착할 수 있는 도서관에 방문하고, 조금 피곤한 날에는 걸어서 30분이면 도착하는 도서관에 가면서 말이다.

하지만 도서관을 방문하는 과정만큼이나 재밌고 흥미로웠던 건 신간 서적 코너를 돌아보며 새로운 책을 발견하는 여정이었다. 나의 관심사를 기반으로 하는 알고리즘 추천과는 달리, 내 관심사는 전혀 고려하지 않고 오로지 순간의 호기심과 직감만으로 새로운 책을 탐구할 수 있었으니까. 그저 책 제목이 독특하다는 이유, 이 선반에 꽂힌 책 중 가장 크기가 크다는 이유, 가장 작고 얇다는 이유만으로 이런저런 책들을 살펴보다보면 꼭 계획에는 없었던 새로운 책을 몇 권 씩 싸들고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이처럼 다양한 이유로 도서관을 자주 들락날락하며 여러 가지 책을 읽다보니 어느 날부터 문득 호기심이 생겼다. 도서관에서 빌린 책을 내가 실제로 전부 다 구매했다면 대략 얼마를 지출했을까?

도서관 홈페이지를 살펴보니 그동안의 대출 목록을 엑셀 파일로 다운받을 수 있는 기능이 있길래 한번 계산을 해보았다. 지난 1년치의 대출 이력을 다운받은 뒤, 한 권의 책을 여러 번 대출해서 생긴 중복값은 제외한 후, 책 제목을 하나씩 온라인 서점에 검색해서 그 가격을 찾아보았다.

그렇게 해서 작년의 첫 도서 영수증 내역은 다음과 같았다. 1년간 대출한 도서의 총합은 49권, 대출한 도서의 총 가격은 765,700원. 도서관이 없었더라면 이 돈은 더 이상 나의 것이 아니었을거란 생각에 매우 놀랐다.

도서 영수증 내역을 통해 도서관이 나의 문화 생활을 얼마나 풍요롭게 해주는지, 그리고 얼마나 나의 자산을 아껴주는지 알게된 이후로는 도서관을 더욱 자주 방문하게 되었다. 다음 도서 영수증을 작성하기 위해 도서관에서 빌린 책도 매달 잊지 않고 다이어리 한켠에 기록해두었다.

12월의 첫 주에는 그 노력의 결실을 먼저 확인해볼겸 올해의 도서 영수증 내역을 미리 적어보았다. 올해 도서관에서 빌린 책은 67권, 이 중 실제로 구매했거나 끝까지 않고 도로 반납한 책들을 제외하면 도서관에서 빌려서 완독한 책의 가격은 총 891,800원이었다.

예상보다 훨씬 큰 금액이 나와서 여러 번 목록을 다시 살펴보고 엑셀 수식도 다시 확인해보았다. 아무래도 이 금액이 맞는 것 같았다. 생각보다 너무 큰 금액이 나온 나머지, 책값을 많이 아꼈다는 뿌듯함보다는 안도감이 훨씬 더 크게 마음에 남았다. 도서관이 없었다면 지금쯤 내 통장 잔고는 얼마가 되었을지를 생각하니 조금 아찔하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이런 의문도 들었다. 약 90만원에 달하는 지식이나 지혜가 지금 내 안에 온전히 남아있을까? 책을 아무리 많이 읽었든 책 속 내용을 현실로 옮기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는 일인데, 과연 책에서 배운 것을 올해의 나는 얼마나 실천으로 옮길 수 있었는지도 궁금했다.

이는 숫자로 표현하기 어렵다는 점 때문에 아쉽기는 하지만, 그래도 우선은 67권의 책을 인내심 있게 읽어내려간 올해의 나를 응원하는데 초점을 두고 싶다. 책을 통해 얻은 지식으로 무엇을 실천했는가도 중요하지만, 그래도 재미있는 콘텐츠가 워낙 많은 세상에서 한 자리에서 꼼짝 않고 책을 한 권씩 읽는 시간을 자주 내었다는 것도 중요하니까.

지난 한 해를 돌이켜보니, 책을 읽는 시간은 내 마음을 돌보는 시간이나 다름 없었다. 가끔은 책 속 문장을 통해 위로를 받기도 했고, 어떤 날에는 한 문장을 여러 번 곱씹어보며 이 문장과 내 삶은 어떤 공통점이 있는지를 생각해보기도 했다. 그러니 도서 영수증을 통해 단지 ‘책값을 아꼈다’라는 감상만 남기기 보다는 ‘나를 알아가는 시간을 저축했다’라는 깨달음도 추가로 덧붙여봐도 좋을 것 같다.

내년에는 올해보다 더 많은 책을 읽는데 전념하기보다는, 한 권의 책이라도 제대로 읽고 이를 행동으로 옮기는 내가 되어보고 싶다. 문장들이 나를 잠깐 스쳐 지나가도록 두지 않고 나의 하루하루에 조금씩이라도 스며들 수 있도록. 그렇게 한 권 한 권의 책을 나의 삶과 연결해 나가다 보면 내년 이맘때쯤에는 올해보다 조금 더 성장한 나를 마주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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