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피레터 2.0 - 귀를 기울이면 연결될 수 있다

귀를 기울이면 연결될 수 있다

분야를 가리지 않고 세상 모든 창작물에는 창작자의 노력이 담겨 있다. 하지만 그걸 잘 알고 있으면서도 때떄로 어떤 창작물은 무의식적으로 그저 대수롭지 않게 넘길 때도 있다.

수많은 사람이 늦게까지 머리를 맞대고, 적지 않은 금액을 들여 만든 영상 광고는 딱 5초만 보고 넘겨버리고, 수십 시간의 연습을 통해 만들어졌을 게 뻔한 노래는 매분 매초를 온전히 집중해서 듣기보다는 그저 심심풀이로 대충 흘러들을 때가 훨씬 많으니까.

특히 언젠가부터 공부할 때 배경 음악처럼 듣기 좋은 로파이 음악이 유행한 이후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오로지 음악에만 온전히 집중하는 순간이 내 삶에서 점차 사라지기 시작했다. 따지고 보면 음악도 예술 작품인데 그걸 깜빡 잊고 그저 일을 하거나, 산책하거나, 운동을 하거나, 취미 생활을 할 때 곁들이기 좋은 고명처럼 여긴 것이다.

그러나 때로는 음악이 무언가를 돋보이게 하는 고명이나 배경이 아니라, 오히려 그곳에 있는 다른 모든 것보다 돋보이는 작품이 되는 경우도 있다. 나는 그런 식으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가수를 처음으로 만났다.

이전까지는 오직 BJ라고만 불렸던 개인 방송인들이 유튜브의 등장으로 인해 스트리머, 유튜버, 크리에이터 같은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했던 무렵, 나는 그런 창작자들의 실시간 방송을 챙겨보는 걸 좋아했다.

그 당시 유튜브에서 인지도를 막 쌓아가고 있었던 어느 유튜버는 방송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에 앞서 꼭 시청자들과 30분 정도 수다를 떠는 시간을 가졌는데, 그때마다 항상 멜론에서 무작위 플레이리스트를 재생하곤 했다.

대부분의 경우에는 그 유튜버의 입담에 집중하느라 현재 어떤 노래가 재생되고 있는지 잘 들리지도 않았다. 배경음악은 그저 이 대화의 배경일 뿐이니 집중하지 않아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느 가수의 노래가 재생되자마자 유독 그 음악만이 귀에 들어왔다. 가사는 평범한 사랑 노래 같았지만 연륜 있는 흑인 가수처럼 허스키한 목소리로 온 힘을 다해 부르는 노래를 듣고 있자니 왠지 심상치 않았다. 이런 목소리는 어디에서도 들은 적이 없고, 이런 발성은 그저 흘려들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화면에 언뜻 보이는 그 가수의 이름과 노래를 검색해 보았는데, 그 뒤로 알게 된 정보는 하나같이 놀라웠다. 알고 보니 내가 처음으로 들은 그 노래는 그 가수의 데뷔 앨범에 수록된 곡이었고, 그때 그 가수의 나이는 18살이었다.

어린 나이치고 성숙한 목소리로 인기를 끌었던 그 가수는 두 번째 앨범을 발표한 뒤 무려 5년 가까이 다음 앨범을 내지 않고 조용히 살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그 가수의 이름을 검색했던 그날은 그가 긴 공백을 뒤로하고 세 번째 앨범을 발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기였다.

새로 발표한 앨범은 데뷔 앨범을 장식했던 사랑 노래 대신 진지하고 소울풀한 노래가 가득했지만 자신만의 스타일을 찾기 위해 과감한 변화를 시도하는 모습이 멋져 보였다. 그래서 새 앨범을 발표한 기념으로 한국과 일본을 포함한 아시아 지역의 음악 페스티벌에도 참여한다는 소식을 접하자마자 별로 큰 고민 없이 표를 결제했다.

그 가수는 가장 마지막 순서로 무대에 오르는 헤드라이너였다. 하지만 나는 이전까지 페스티벌에 와본 적 없었기 때문에 별다른 짐 없이 그저 가벼운 마음으로 공연장을 찾아갔다. 그 덕분에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하고, 간식 하나 먹지 못한 채 몇 시간이고 서 있었다. 

오랜 기다림은 힘들기만 했지만 그 가수의 공연이 시작된 이후에는 기쁨과 설렘 외에 다른 감정은 찾아오지 않았다. 다리가 아픈 줄도 몰랐고, 목이 아픈 줄도 몰랐다. 가수의 열정을 눈앞에서 또렷하게 볼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기뻤다.

5년의 공백을 멋지게 메운 공연이 끝난 이후 그 가수는 또다시 아무런 소식 없이 공백의 시간을 가졌다. 이번에는 8년이었다. 아무런 기약 없이 8년이라는 시간을 보내는 동안 나는 새로운 가수의 노래를 찾아 듣기도 하고, 다른 장르의 노래에 빠지기도 했다.

그래도 누군가가 나에게 좋아하는 가수를 물을 때면 항상 그의 이름을 댔다. 그저 무심코 흘려들을 수도 있었던 배경음악에 잠시 귀를 기울이는 것만으로도 소중한 경험과 연결될 수 있음을 알려준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때때로 그의 음악을 들을 때마다 처음 그 음악을 들었던 순간이 떠오르기도 하고, 오랜 기간 동안 그의 노래와 함께하며 스쳐 보낸 내 감정의 변화들도 떠오르곤 한다. 만약 그때 그 배경음악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면 지금의 나는 어떤 가수의 팬으로 살고 있을지, 아니면 다른 우연한 기회로 그 가수의 노래를 또다시 접하게 되는 순간이 찾아왔을지 궁금하다.

하지만 아무리 상황이 달라지더라도 이것만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무엇이든 일단 귀를 기울이고 관심을 기울여야만 비로소 연결될 수 있다는 사실.

귀를 잘 기울이면 어제의 배경이 오늘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 우리 삶에서 무심코 지나칠 뻔했던 작은 순간들, 마치 배경처럼 흩어져 있던 소리와 장면들도 사실 깊이 연결될 준비가 되어 있다.

어쩌면 우리가 찾고 있던 위로, 공감, 애정 또한 늘 우리 주변에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것을 알아차릴 수 있는 길은 아주 잠시라도 발걸음을 멈추고 귀를 기울이는 것에서부터 시작될지도 모른다.

그러니 작은 관심을 통해 오랫동안 그 가수의 음악과 연결될 수 있었던 것처럼, 앞으로도 무엇이든 조금이라도 흥미로운 걸 발견했다면 그저 스쳐 보내지 말고 조금이라도 관심을 두어야겠다. 그저 조금 귀기울여 듣기만 한다면 우리는 무엇과도 오랫동안 연결될 수 있을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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