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피레터 2.0 - 내가 선택해야 할 기억은

내가 선택해야 할 기억은

어릴 때는 상대가 직설적으로 말하지 않으면 그 말의 진짜 의도가 무엇인지 잘 몰랐다. 애초에 원하는 것을 은근히 돌려서 말하는 화법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미처 몰랐던 것 같다. 그래서 상대의 진짜 의도가 아닌 내 생각을 믿었다.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그때 그 말들이 사실은 무엇을 뜻하는지 눈치채고 뒤늦게 상대에게 화가 나거나, 미안해하거나, 고마워하곤 했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면 내 마음대로 편집하고 해석할 수 있는 건 말뿐만 아니라 기억도 마찬가지였다. 과거에 대한 인식은 역사책처럼 객관적이지 않고 오히려 감정, 경험,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선택적으로 기억될 수 있으니 말이다.

저번 주에는 천변에서 한 시간이 넘도록 기분 좋은 산책을 했다. 조용한 환경, 평화로운 사람들, 귀여운 오리들과 산책 나온 강아지들을 보니 마음이 금세 편안해졌다. 하지만 돌아오는 길에 맞은편에서 걸어오던 한 남성이 갑자기 소리를 질러 나를 놀라게 한 뒤 금새 자리를 떠나버린 이후로 그날 하루는 엉망이 되었다.

그날 이후로 내가 산책하러 가는 길에 꼭 거쳐야 하는 고가도로 아래는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 인적 드문 장소라는 것을 처음으로 인식하게 되었고, 그 근처에서 CCTV를 본 기억이 여태까지 한 번도 없었다는 걸 깨달았다. 만약 상대방이 그저 나를 놀라게 하는 게 아니라 다른 짓을 벌일 마음을 품었다면, 나는 그런 갑작스러운 상황이 닥쳐도 어떻게 해야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결국, 그날의 기억 하나 때문에 나는 예전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산책할 기회를 영영 놓치게 되었다. 그동안 산책을 하러 나설 때마다 얼마나 마음이 평온해졌는지, 얼마나 즐거운 일이 많이 벌어졌는지, 얼마나 그 순간을 진심으로 사랑했는지에 대한 기억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일상에서 사소하게 겪은 사건은 대부분 금방 잊혀지지만 커다란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사건은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수밖에 없다. 이렇듯 무수하게 많은 좋은 기억이 단 하나의 기분 나쁜 사건 때문에 순식간에 사라지는 경험을 한두 번 겪은 것도 아니었다. 오늘 하루 동안 얼마나 많이 웃었든, 잠들기 전 우연히 핸드폰에서 본 심란한 뉴스는 하루의 기분을 완전히 망친다. 과거에 얼마나 친절한 말을 건넸든 단 한 번의 실수가 그동안의 관계를 끊는 결정적인 원인이 될 수도 있다. 우리는 모든 걸 기억할 수 없어 대체로 가장 격정적인 것만을 선택적으로 받아들이니 말이다.

어젯밤에는 기후 위기와 관련한 뉴스를 보다가 마음이 복잡해지고 불안해졌다. 생각이 더 극단적으로 뻗어가기 전에 나도 모르게 지금 내 옆에 있는 것으로 눈을 돌렸다. 점점 차가워지는 온도에 알맞은 두꺼운 이불의 감촉, 무거운 눈꺼풀, 시어서커 원단의 잠옷에서 느껴지는 올록볼록한 감촉들. 단 하나의 나쁜 기억이 하루 동안 있었던 모든 기억을 사라지지 않도록 조처를 하는 데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과거도 현재도 아닌 지금 내 옆에 있는 나의 현실에 집중하는 것.

어쩌면 기억이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현실일지도 모른다. 지금 느끼는 이 감각, 이 순간의 작은 기쁨들이 시간이 지나면 어느새 사라져 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을 생생하게 인지하고 기억하는 그 순간만큼은 분명한 현실이 된다. 앞으로도 이전의 모든 기억을 지울 정도로 강렬한 기억이 현실을 엉망으로 만드는 순간은 언제든 오겠지만, 그래도 그 순간에서도 내가 무엇을 기억할 것인지는 선택할 수 있다는 걸 염두에 두고 싶다. 그 기억이 현재의 내게도, 미래의 내게도 힘이 되어줄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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