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피레터 2.0 - 삶에는 지도가 없지만 상상하는 만큼 길을 만들어갈 수 있을 거야

삶에는 지도가 없지만 상상하는 만큼 길을 만들어갈 수 있을 거야

가장 마지막으로 종이 지도를 유심히 들여다보았던 순간은 언제였을까? 아마도 학생 때 항상 사물함 한쪽 구석을 차지하고 있었던 사회과부도를 펼쳤을 때가 마지막이었던 것 같다.

사회과부도는 반들거리는 종이에 모든 지도를 컬러로 출력해 무겁고 뻣뻣한 교과서였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실제 수업 시간에는 별로 볼 일이 없었고, 그래서 언제나 지도는 내게 낯설고 어렵고 흥미롭지 않은 존재였다.

어쩌면 그때 지도를 좀 더 잘 살펴보면 좋았을 것 같다. 지도를 탐구하며 스스로 나의 현재 위치를 가늠하고, 앞으로 어느 방향으로 나아갈지 주체적으로 파악하는 연습을 했다면 어른이 된 후에는 삶을 여행할 때 조금 덜 헤매지 않았을까?

성인이 된 지금 나의 손에는 지도보다 편리한 스마트폰이 있다. 나의 현재 위치를 실시간으로 정확히 알려주고 모든 가게의 영업 정보까지 알려주니 길을 헤맬 일도 없다. 하지만 며칠 전, 스마트폰 음악 앱 대신 CD를 재생해서 음악을 듣다가 디지털 기기가 절대로 대체할 수 없는 아날로그 기술의 장점을 알게 되었는데, 바로 아날로그 기기는 중간 광고를 재생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종이 지도 또한 스마트폰 속 지도 앱과는 달리 광고로부터 매우 자유롭다. 지금 할인 행사를 하는 가게, 리뷰가 300건이 넘는 가게, 유명 TV 프로그램에 출연한 가게, 새로 생긴 가게, 주말에 방문하기 좋은 가게 등등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된다고 소리치는 소음을 종이 지도에서는 발견할 수 없으니 말이다. 종이 지도는 그저 눈앞에 어떤 길이 있는지, 그 길의 근처에는 무엇이 있는지 간략한 정보만을 알려줄 뿐, 그 길에서 구체적으로 무엇을 발견할 수 있는지는 사람들의 상상에 맡긴다.

모든 것이 간편한 디지털 기술로 대체되고 있는 요즘에는 아주 간단한 일을 하더라도 일단 광고 하나쯤은 스쳐 보내야 한다. 그러다 보니 내가 원한 적도 없는 메시지를 삶에 들여놓는 상황에 점차 무감각해진다.

그래서 ‘~하면 절대 안 돼요’, ’~모르면 손해 봐요’, ‘~를 알아야 남들보다 뒤처지지 않아요’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인터넷 속 소음은 그저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위한 전략이라는 걸 알면서도 무심결에 손이 간다. 어차피 나를 해치는 정보는 아닐 테고, 오히려 내가 지금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놓치며 시간을 보냈는지 알려줄 거라는 생각에 말이다.

하지만 며칠 전, 종이로 된 케이스가 구겨지지 않게 조심조심 CD를 꺼내고, CD에 지문이 묻지 않게 가장자리만 살짝 집어서 기기 안에 밀어 넣고, 버튼을 눌러 CD를 재생시키는 아날로그 방식으로 음악을 들었던 경험은 내가 미처 잊고 살았던 것을 알려주었다. 많은 걸 한 번에 해낼 수 없는 조금 불편한 방식을 선택하면 오히려 자유로워진다는 사실을 말이다.

CD로 음악을 들으면 음악 3곡을 재생할 때마다 꼭 한 번쯤은 등장하는 스트리밍 서비스 광고를 듣지 않아도 된다. CD를 소장하면 각각의 음악 스트리밍 서비스를 돌아다니며 내 취향에 맞는 노래들을 플레이리스트에 담아두는 수고를 들이지 않아도 된다. CD 케이스 속에 동봉된 종이에는 수많은 사람의 개별적인 감상 대신 이번 앨범 속 노래의 가사, 혹은 이 앨범을 만든 사람들이 앨범을 제작하면서 벌어진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다.

아날로그 기기의 불편함은 오히려 삶의 단순한 면을 일깨운다. 많은 것을 한꺼번에 탐욕스러울 정도로 알아두지 않아도 괜찮고, 일단은 하나의 정보에만 집중하도록 유도한다.

그 점을 깨닫고 나니, 더 나은 삶을 살고자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를 자꾸 찾아 들으려고 했던 순간들이 진정으로 내가 길을 찾는 데 큰 도움이 되었을지 돌아보게 됐다. 이제는 타인은 어떻게 성공했는지, 어떤 습관을 지녔는지, 어떤 제품으로 무슨 라이프 스타일을 구축했는지, 무엇을 보고 듣는지에 대한 정보를 끊임없이 들여다보지 않아도 괜찮지 않을까.

막막할 정도로 단순한 내 삶의 여정을 돌아보고, 지금 내 옆에는 무엇이 있는지 주의 깊게 살펴보고, 눈앞에는 어떤 길이 있을지 더듬어보며 그곳을 향해 걷다 보면 무엇이 있을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내게는 충분할지도 모르겠다.

매끈한 종이에 프린팅된 화보와 함께 내 삶에 대해 말하는 유명인의 삶은 멋있긴 하다. 하지만 그들은 자기 삶에 관해서만 이야기할 수 있을 뿐 나의 삶은 어떤 길을 어디까지 걸어갈 수 있을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어떤 사람의 말은 내 삶의 지도가 아닌, 나의 주의를 끌고 집중력을 흐리는 지도 속 광고가 될 수도 있다. 지금껏 많은 광고를 보고 듣고 겪었으니, 이제는 상상력을 키워볼 때가 된 것 같다. 남이 아닌 나는 어느 길을 걸을 수 있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무엇을 보고 들을 수 있는지에 대한 상상력을.

삶을 성공적으로 이끄는 완벽한 가이드란 어디에도 없겠지만 그래도 내가 가고 싶은 길은 내가 상상하는 만큼 얼마든지 만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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