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피레터 2.0 - 내친김에 하다보면 뭐든 계속 하고 싶어져

내친김에 하다 보면 뭐든 계속하고 싶어져

요즘에는 ‘내친김에’ 하는 게 좋다. 산책하러 나간 김에 돌아오는 길에 다이소에 들러서 계획에도 없었던 소소한 물건들을 구매하는 순간이 좋다. 커피를 마시는 김에 커피의 향도 음미하는 게 좋고, 밥을 다 먹은 김에 곧바로 설거지까지 끝내서 귀찮은 일을 단숨에 덜어버리는 것도 좋다.

하지만 연초가 되기 전까지만 해도 상황은 달랐다. 지난 연말에는 모든 것이 정반대였다. 그때 내 머릿속에 가장 많이 떠오른 단어는 ‘그래봤자’였다. 그래봤자 이 일을 하는 게 대체 무슨 소용일까? 그래봤자 돈이 되지도 않는 일에 왜 매달렸을까? 그래봤자 지금보다 상황이 더 나아질 것 같지 않은데 무엇을 계속 해야 할까?

‘그래봤자’가 남기는 거라곤 냉소와 무기력뿐이었다. ‘그래봤자’를 머릿속에 담을수록 세상에는 기대할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고, 그러니 희망과 기대를 품는 건 바보 같은 일이라는 생각을 떨치기 어려웠다.

그런데 그렇게 무지막지한 영향력을 가진 ‘그래봤자’를 싹 지울 수 있었던 계기가 몇 가지 생겼다. 첫째, 지난날은 다 잊고 무엇이든 새로운 시작을 할 의욕이 샘솟는 1월이 되었다. 둘째, 불치병을 겪고 있는 어느 히키코모리가 독학으로 루마니아어를 공부하여 루마니아 소설가가 된 과정을 담은 에세이를 우연히 읽게 되었다.

실화라고 믿기 어려운 이야기를 담은 그 책의 제목은 <뭐든 하다 보면 뭐가 되긴 해>. 젊은 감각의 제목이 눈에 띄어서, 천을 뒤집어쓴 귀여운 유령이 노트북을 두드리는 겉표지가 무척 귀여워서 호기심에 읽게 된 책이었다.

무엇을 하든 좀처럼 의욕이 나지 않았던 상황에서, 순전히 루마니아어에 대한 호기심만으로 치열하게 외국어 공부를 하는 저자의 이야기는 너무 인상 깊었다. 어떤 목적, 결과물, 점수를 위한 공부가 아니라 순전히 호기심과 애정만으로도 이토록 치열하게 외국어를 공부할 수 있다는 사실은 충격적이기도 했다.

책의 후반부에서 저자는 솔직한 심정을 실토한다. 다른 사람들은 외국어를 공부하고 나면 자연스럽게 해당 국가로 여행을 떠나는데, 불치병 때문에 집 밖을 나서기 어려운 본인으로서는 그 모습이 너무 부러웠다고 한다. 한편으로는 루마니아에 방문하거나 루마니아 현지인과 대화를 나눌 기회가 거의 없는데도 왜 이렇게까지 루마니아어를 공부하는지 자신도 의문이었다고 적었다.

다행히 저자는 이 책을 쓰기 위해 과거를 돌이켜보다 보니 자신이 왜 루마니아어를 공부하고 싶었는지, 자신에게 루마니아어 공부는 어떤 의미인지 스스로 알아갈 수 있었다고 한다. 한편, 지난 연말의 나는 무언가를 하면 결과로 무엇을 얻을 수 있을지에만 골몰했다. 그러다 보니 그럴듯한 이유를 찾기 전까지는 좀처럼 의욕을 내지 못하고, 확실한 희망이 보이지 않으면 ‘그래봤자’라는 말로 먼저 선을 그었다.

어떤 성과 때문이 아니라, 그저 즐거움 때문에 무언가에 진심으로 몰입해도 인생은 멋지게 흘러간다는 걸 알지 못했다면 아마 연초를 맞이한 지금까지도 계속 ‘그래봤자’의 늪에 빠져있지 않았을까.

다행스럽게도 책을 읽고 난 이후로는 어떤 결과를 보장받지 못해도, 별 의미가 없어 보이더라도 ‘내친김에’ 새로운 무언가를 시도하는 날이 이어졌다. 어학 공부와 관련한 책을 읽고 내친김에 나도 미뤄두었던 영어 공부를 시작했고, 영어 공부를 시작하기로 마음먹은 김에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서 공부하는 시간을 갖고, 영어 공부를 시작한 김에 평소에 관심 있었던 분야의 온라인 강의를 결제했다.

그럴듯한 결과를 기대하기보다 그저 할 수 있으니까 하기. 간단해 보여도 쉽지만은 않은 행동이지만 이렇게 어려워 보이는 일도 ‘내친김에’ 가벼운 마음으로 해도 괜찮다고 마음먹으면 어쩐지 첫걸음을 내딛기 쉬워지는 것 같다.

‘내친김에’의 위력이 연말까지 계속 이어질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내친김에, 가벼운 마음으로, 결과와는 상관없이 그저 가볍지만 기운차게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향해 나아가고 싶다.

비록 첫 시작은 작고 가벼울지는 몰라도, 일단 시작하다보면 그 일에 몰입하는 건 시간 문제이고, 그 몰입의 끝에는 우리가 기대할만한 결과가 기다리고 있을테니까. 좋아하는 것에 자발적으로 몰입하는 것에 대한 즐거움이든, 오랜 시간을 투자해야만 이룰 수 있는 결과물이든 정말 기대할만한 보람이 있는 결과 말이다. 그러니 오늘도 작고 가볍게, 일단 내친김에 시작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