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피레터 2.0 - 열정이 사라진 자리에는 무엇이 남을까?

열정이 사라진 자리에는 무엇이 남을까?

내 방에는 4단짜리 책장이 있는데, 책장의 가장 위 칸은 똑같은 작가의 책으로만 가득 차 있다. 어린 시절 소꿉친구의 추천으로 알게 된 작가인데, 예측할 수 없는 이야기 전개와 깜짝 놀랄만한 반전으로 가득한 특유의 세계관이 마음에 들어서 매년 신간이 나올 때마다 소장하곤 했다.

해가 지날수록 그 친구와는 점점 연락이 뜸해졌지만 그 작가는 지칠 줄 모르고 매년 신작을 발표했다. 너무 많은 책을 집필하는 바람에 결국에는 나도 그 작가의 모든 책을 소장하겠다는 야심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는 오랫동안 연락을 주고받았던 친구의 연락처도 찾을 길이 없고, 그 작가를 예전만큼 좋아하지도 않기 때문에 굳이 책장의 맨 위 칸에서 보란듯이 그 작가의 책을 모아놓을 이유는 없어졌다. 내게 그 작가의 책을 추천해주었던 오랜 친구와 주고받았던 손 편지도 언젠가는 버려야 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책장에 새 책을 꽂을 자리를 도무지 찾을 수 없을 때도 내 방에서 버려지는 건 몇 년 동안 들춰본 적 없는 오래된 책이나 편지가 아니라 다른 것들이었다. 빛바랜 책이나 편지 대신 언제나 새것이나 다름없는 증정본, 더 이상 읽지 않는 빳빳한 잡지가 먼저 버려졌다.

매주 문방구를 들락거리며 우표와 편지지를 구매하고, 몇 시간 동안 책상 앞에 앉아 편지지의 앞면 뒷면을 채웠던 어린 시절의 열정은 더 이상 없는데. 그리고 신간이 나오기를 손꼽아 기다리면서 이미 모든 반전을 다 알고 있는 오락 소설을 되풀이해서 읽을 정도로 작가에 대한 애정도 남아있지 않은데. 왜 이미 다 사라진 열정의 흔적을 시원하게 버리거나 다른 것으로 대체하지를 못할까?

종종 스스로에게 위와 같은 질문을 던지곤 한다. 가끔은 정말로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은 것들은 다 버려버릴 작정으로 겉표지의 색이 다 바래버린 책들을 책장에서 한권씩 꺼내보기도 한다. 하지만 결국에는 모든 책을 도로 제자리에 보관한다. 오래전에 품었던 열정은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긴 하지만, 그래도 열정이 사라진 자리에는 추억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물론 추억이 밥을 먹여주지는 않는다. 과거를 돌아보며 살기에는 현재에 집중해서 해야 할 일이 너무 많다. 하지만 추억은 과거의 나를 떠올려볼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기도 하다. 추억을 되짚어볼 때면 나는 늘 고정되고 정체되어 있는 사람이 아니라, 과거에서부터 지금까지 끊임없이 변화해 왔으며 앞으로도 언제든지 달라질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된다.

그래서 오늘도 내 방에는 오래되고, 꼬질꼬질하고, 빛이 바랜 것들이 가장 눈에 잘 띄고 손이 잘 닿는 자리에 놓여있다. 한때는 새것이었던 것들을 낡고 꼬질꼬질하게 만들어버릴 만한 열렬한 열정은 이미 사라졌지만, 그래도 그 열정은 추억이 되고 과거의 나에게도 무언가를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했던 순간이 있다는 걸 늘 상기시킨다. 이는 미래의 나에게도 무엇보다 아끼고 사랑할 만한 대상이 찾아올 거라는 기대감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열정이 사라진 자리에는 추억이 남고, 추억은 다시 과거의 열정을 현재로 불러온다면, 열정이 지속되든 사라지든 별로 잃을 게 없다. 그러니 무언가를 열렬히 사랑하는 걸 비효율적이라는 이유로 멀리하거나 부끄러워할 이유는 없지 않을까?

미래의 나에게 새로운 열정을 불러일으킬 만한 것들과 언젠가 만나게 된다면, 언젠가는 이 열정도 사그라들지 않을까 미리 겁을 먹고 뒤로 물러나지 말고 사랑할 수 있을 때 아낌없이 애정을 쏟아보고 싶다. 열정이 추억으로 바뀔 정도로 정말 오랫동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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