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피레터 2.0 - 여름의 끝자락에 마지막으로 해보고 싶은 것

여름의 끝자락에 마지막으로 해보고 싶은 것

6년 전의 내가 가을을 앞두고 블로그에 쓴 글을 우연히 보았다. 9월을 코앞에 둔 시기에 쓴 그 블로그 글에는 ‘태풍이 오고 있어서 날씨가 굉장히 선선하다’라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올해의 나는 유난히 길고 더운 여름을 겪고 있는 터라 선선한 가을 날씨를 즐기고 있는 6년 전의 내가 그저 부럽기만 했다.

여름은 봄이나 가을과는 달리 짧아진 적은 없고 오히려 매년 길게 늘어지기만 하는 지지부진한 계절이긴 하다. 그렇지만 2024년인 올해의 여름은 그동안 내가 보냈던 어떤 여름보다 길고 험악했다. 9월이 되면 여름도 어쩔 수 없이 자취를 감출 거라고 생각했는데, 설마 5일이나 이어지는 추석 연휴 동안에도 덥고 습한 여름의 기운이 건재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어제는 전철을 타러 나갔는데, 10여분 동안 역내에서 그저 가만히 서 있기만 했는데도 목덜미가 땀으로 흠뻑 젖어서 당황스러웠다. 나중에 핸드폰 앱으로 오늘의 날씨를 확인해 보았더니 ‘폭염주의보’라는 붉은 글씨가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추석 연휴가 있는 9월 중순에 폭염주의보? 매사에 비관적이고 냉소적인 어른이 되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그동안의 상식과는 거리가 먼 일기 예보를 보자마자 어쩔 수 없이 ‘지구가 진짜 망해가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막연한 걱정도 잠시 이어지긴 했다. 10년 뒤, 20년 뒤의 여름과 겨울은 지금보다 얼마나 더 혹독할까? 지금은 자연스럽게 즐길 수 있는 모든 활동, 음식, 옷차림, 일상 중에서 미래의 우리가 영영 그리워하게 될 것은 무엇이 있을까?

어쩌면 기후 위기가 일단 시작된 이상, 기후 변화에 대한 경각심을 갖기는 하되 지금 당연하게 누리고 있는 모든 주변 환경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고 하루하루 소중히 여기고 즐기는 마음가짐이 필요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떠올랐다. 지금 우리 앞에 놓인 자연의 소중함을 제대로 알고 있어야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자연을 후대를 위해 지켜야만 한다는 다짐으로도 이어지지 않을까?

나는 여름을 좋아하지도, 즐기지도 못하는 사람이지만 다행히도 몇 년 전 ‘이탈리아의 어느 선생님이 내준 여름방학 숙제’라는 제목의 사진을 본 것이 문득 떠올랐다. 그 숙제에는 여름에 시도해 볼 수 있는 활동 15가지가 소개되어 있었다.

아침에 혼자 해변을 산책하라, 햇빛이 물에 반사되는 것을 보고 사랑하는 것들을 생각하라, 최대한 책을 많이 읽어라, 부끄러움 없이 춤을 추어라, 최소한 한 번은 해가 뜨는 것을 보아라, 스포츠 활동을 많이 해라, 햇빛 속이나 뜨거운 여름밤에 네 삶이 어떻게 되어야 할지 꿈꿔보아라, 가슴 아픈 대사가 나오는 영화를 보아라 등등. 여름 방학 숙제치고는 지나치게 감성적인 것 같다만 잘 생각해 보면 유난히 긴 햇빛, 더위 때문에 쉽게 잠들지 못하는 밤이 이어지는 여름날은 자신에게 긍정적이고 낭만적인 활동을 할 기회를 내주기에 적절한 시기인 것 같기도 하다.

유독 힘들고 버거운 여름이 추석 연휴에도 이어지고 있는 건 안타까운 일이다. 하지만 이왕 이렇게 여름의 끝자락에 오랫동안 머무르게 되었으니, 마지막으로 여름의 낭만을 내게 선물처럼 주기 위해 어느 이탈리아 선생님이 내어주신 여름 방학 숙제를 해보아도 괜찮지 않을까 싶다. 게다가 여름 방학 숙제는 방학이 끝나기 직전에 하는 편이 더 자연스럽기도 하니까. 여름의 햇빛에 강물이 반짝이는 걸 지켜볼 짬을 내고, 몸을 활달하게 움직여볼 기회도 만들어보고, 잠 못 드는 여름밤에는 영화 한 편을 보면서 지금 즐길 수 있는 여름을 마지막까지 즐겨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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