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계속된 호우로 날이 많이 습했다. 나는 이런 날에 걷는 것을 좋아한다. 비가 넘치게 오는 날 말고, 적당히 와 바닥이 젖은 날. 아끼는 우산을 쓰고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비에 젖은 냄새를 맡는 게 좋다. 햇볕에 바싹 마른 날도 좋지만, 이런 날에만 느낄 수 있는 감성이 있다. 그런 게 낭만일까?
2.
간만에 라면을 끓였고, 밥까지 말아먹고 나니 무척 배가 불렀다. 더부룩한 배를 꺼뜨리기 위해서라도 산책을 해야만 했다. 아무래도 더부룩한 기분은 좋지 않으니까. 어릴 때는 배가 부른 기분이 좋았다. 그래서 허기지는 기분을 싫어했는데, 지금은 오히려 배고픈 기분이 좋다. 건강하고 살아있다는 느낌은 오히려 배가 고플 때다. 위장도 나와 함께 나이를 먹었기 때문이겠지. 이제 불필요한 음식은 더 이상 받아들이고 싶지 않을 지도.
3.
한 손에 우산을 들고, 천천히 공원을 걸었다. 도서관 옆 공원에는 다양한 나무들이 서로의 잎을 뽐내며 그늘을 건네어준다. 비에 젖은 잎에서 나는 향이 콧 속 깊이 스며든다. 젖은 초록의 향기. 누군가 이 향과 가장 비슷한 향수를 만들어준다면 나는 기꺼이 많은 돈을 지불하고 구매하리라. 산책을 하는 도중에도 산만한 마음은 가라앉질 않는다. 마음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계속해서 지껄인다. 다만 달라지는 점이 하나 있다면 처음에는 짜증 섞인 불평만 늘어놓다가 산책을 하면 할수록 긍정적인 소리로 바뀐다는 점이다.
4.
여름의 냄새는 나를 아홉 살의 여름으로 데려다주었다. 나는 턱을 괴고 창밖을 자주 보는 아이였다. 딱히 공부에는 관심이 없었던 아이. 국어와 미술, 음악만을 좋아했던 아이. 그 아이는 모래로 가득한 운동장과 운동장을 둘러 싼 나무가 여름 바람에 휘날리는 모습을 한참 바라보았다. 매미가 힘차게 울었고, 선생님은 칠판에 분필 가루를 날리며 무언가를 적고 계셨다. 이상하게 그 날은 서른 넷이 된 지금에도 잊히지가 않는다. 내가 본 풍경 안에는 잔잔한 행복이 녹아 있었다. 잊을 수 없는 아홉 살의 여름 풍경. 모든 게 이상하리만치 평온하고 아늑했던 순간.
5.
그리고 다시, 서른 넷이 되어 걷고 있는 나로 돌아왔다. 나는 그 후로도 꽤 많은 시간을 살아왔구나. 지금도 여전히 살아 숨쉬고 있구나. 내 운명이 열한 살까지였다면, 열다섯 살까지였다면, 스무 살이었다면, 서른 살까지였다면. 그런 상상을 했다. 삶은 이토록 내게 기회를 많이 주었구나. 나는 그토록 소중한 하루 하루를 선물로 받고도 감사하기는 커녕 짓밟은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새삼 내가 살아있다는 게 기적으로 다가왔다. 충분히 아파하고, 사랑하고, 기뻐하며 한 인간으로써의 여정을 즐기라는 삶의 계시를 나는 왜 그토록 무시했을까.
6.
책상 앞에 앉아 키보드를 두드리는 지금 이 순간 자체가 누군가에게는 큰 기적이자 간절함이다. 그러나 나는 그 사실을 외면했다. 더 가지고 싶고, 더 큰 걸 누리고 싶어서. 내 삶은 보잘 것 없으며 실패했다고 생각했다. 삶을 다시 리셋하고만 싶다는 생각을 반복적으로 해왔다. 다시 태어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어리석은 생각의 반복은 절대로 내게 감사와 사랑 같은 지고한 마음을 느낄 수 없게 만들었다.
7.
지금 이 순간부터라도 감사하며 잘 살자고 다짐하지만, 안타깝게도 인간은 그 사실을 자꾸만 잊는다. 나는 매일 감사하며 사는 것 자체에 기쁨을 느끼는 사람을 보면 존경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나도 잊지 않도록 이렇게라도 기록하고 남겨두어야 한다. 매번 걱정과 부정적인 생각들에 갇혀 잊어버리지 않도록.
'삶은 내게 무수한 기회를 주었다.'
'삶은 내게 무수한 기회를 주었다.'
'삶은 내게 무수한 기회를 주었고, 지금도 그 사실은 변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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