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하나의 세계
- 다큐멘터리 <내언니전지현과 나>를 보고
한 이가 모닥불을 피우자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든다. 불 주변에 둘러앉아 저마다 사는 얘기를 하기도 하고, 정보를 공유하기도 한다. 그러던 중 한 사람이 일어서서 악기를 연주하기 시작한다. 모닥불은 활활 타오르고, 점점 불 주변에 모여 앉는 사람들이 늘어난다. 꽤 낭만적인 순간이지만 이곳은 현실이 아니다. 중학교 무렵 한창 빠져 있던 ‘마비노기’라는 게임 속에서 내가 좋아했던 순간이다. 그 게임은 높은 자유도가 매력적인 게임이었는데, 사람들이 그 게임을 즐겼던 건 단순한 재미 때문이 아닌 이런 경험 때문이었다. 단순히 몬스터를 잡아 레벨을 높이는 것이 아닌, 또 다른 세상에 있는 것 같은 그 순간들과 만남이 내가 그 게임을 좋아하는 이유였다.
최근에 이런 추억을 다시금 생각해보게끔 하는 다큐멘터리를 보게 됐다. <내언니전지현과 나>라는 제목을 보고 배우 전지현에 관련된 다큐멘터리인가 생각하시겠지만, ‘내언니전지현’은 이 다큐멘터리를 만든 박윤진 감독의 일랜시아라는 게임 속 아이디이다. 게임 속 캐릭터와 나. 수많은 분야에서 또 다른 자아상인 소위 ‘부캐’를 언급하는 지금 세상에서 꽤 의미심장 제목이다. 아마 또 다른 나라는 개념은 RPG게임의 전성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2000년대에 게임을 했던 유저들이라면 이미 친숙한 개념일 것이다.
‘일랜시아’는 1999년 넥슨에서 서비스를 시작한 클래식 RPG 게임의 이름이다. 일랜시아는 만들어진 지 20여 년이 흐르고 이젠 관리를 하지 않은 채 방치된 게임이다. 이 게임을 리뷰한 유튜버들의 말 그대로 망해버린 게임, ‘망겜’이다. 박윤진 감독은 본인이 10년간 이 망한 게임, 일랜시아를 플레이한 소위 ‘고인물’ 유저이다. 그는 자신을 비롯해 이 망해버린 세계를 붙들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붙잡고 질문을 던진다.
“일랜시아 왜 하세요?”
일랜시아라는 게임은 20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만큼 이미 고전 게임에 속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게다가 간신히 서버만 유지하고 있는 상황이기에 게임에 대한 관리나 업데이트는 기대할 수 없다. 일랜시아 속 유저들은 도대체 왜 이 망해버린 세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걸까? 이 다큐멘터리는 어쩌면 근본적인 이 질문과 카메라를 통해 우리에게 망한 세계 속에서 살아가는 많은 ‘부캐’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유저들은 저마다 어떤 추억과 애정 때문에 이 게임을 하고 있었다. 게임 속 공동체에 대한 애정이 묻어나는 인터뷰를 듣다 보면 나 또한 그런 점에 끌려 이런 RPG 게임을 하곤 했었기에 공감이 가곤 했다. 현실 속 불합리와 다르게 노력한 만큼 성과가 눈에 보이는 점을 즐긴다는 이야기에는 묘한 슬픔을 느끼기도 했다. 처음엔 그저 이 망한 게임을 왜 하는가에 대한 질문에서 출발한 다큐멘터리는 끝내 이 게임을 즐기고 있는 밀레니얼 세대에 대한 초상을 그려나간다.
그런데 <내언니전지현과 나>는 단순히 ‘일랜시아’라는 게임에 대한 유저들의 추억과 애정을 그려내는 데서 멈추지 않고, 한 발자국 더 나아간다. ‘일랜시아’의 세계는 그저 단순히 추억과 애정이 담긴 유토피아 같은 곳은 아니었다. 일랜시아의 가장 특징적인 면모는 캐릭터 레벨이 없는 높은 자유도를 보장하는 게임이라는 점이었다. 우리는 다큐멘터리 속 여러 인터뷰를 통해 일랜시아의 이런 특징적 시스템이 유저들에 의해 다소 변화된 상황을 만나게 된다. 캐릭터 레벨은 없지만, 게임 속 불법 프로그램이라고 할 수 있는 ‘매크로’가 이미 당연해진 게임 속 세상. 높은 자유도를 보장하지만, 유저들 사이에 캐릭터 성장에 정해진 ‘루트’가 공유되며 그 루트를 따르지 않으면 망한 캐릭터가 되는 세상. ‘일랜시아’는 자유도 높은 게임을 만들고자 한 생각이 담긴 게임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어느새 사람들은 모두 ‘자동’으로, ‘정해진 길’로만 캐릭터를 키우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관리자가 없는 게임의 상황과 더불어 ‘팅 버그’라는 위기에 봉착하게 된다. 만난 유저들의 게임 접속을 끊어버리는 악질적인 유저가 생긴 것이다. 관리자는 없고 이미 매크로가 지배하는 현 상황에 적응한 유저들은 다시 관리자가 나오는 것도 괜한 짓을 하는 것이 아닌가 불안에 떨기도 한다. 이런 상황 속에서 박윤진 감독은 유저들의 요구를 전달하기 위해 게임 제작사인 넥슨 본사를 직접 찾아가게 된다. 결과적으로 우리가 볼 수 있는 극장 상영본에는 이 다큐멘터리가 영화제에 소개된 이후 넥슨 측이 유저들과 간담회를 하게 되는 장면이 포함되어 있다. 어쩌면 작지만 몇 년 만에 얻은 성과였다. 떠나간 유저가 돌아와 감사인사를 하는 장면에서 분명 게임화면인데도 묘한 감동을 준다.
<내언니전지현과 나>는 분명 어떤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작품이었다. 하지만 내게 더욱 인상 깊었던 건 어쩌면 문제가 있는 이 게임이라는 또 다른 세계에서 그 문제를 해결해나가려는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어쩌면 병들어버린 세계를 긍정하고 그 속에서 살아가겠다는 그 마음이야말로 ‘고인물’이 되어 버린 유저들이 이 게임에 대해 가진 사랑이자 어떤 태도라는 생각이 든다.
마지막으로 이 다큐멘터리에 등장하는 커뮤니티에 대해 언급하며 이 글을 마치고 싶다. 박윤진 감독이 속해있는 길드의 오프라인 모임 장면과 온라인 모임 장면은 이 다큐멘터리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이다. 현실 세계와 가상 세계의 만남이 섞이는 그 순간에서 가상 세계가 마냥 현실에서 도피하는 장소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RPG 게임의 범람 속에서 우리가 즐겼던 건 또 다른 세계 속에서 만났던 또 다른 ‘나’들 과의 만남이 아니었을까. 어떤 순간을 함께 공유했다면 분명 그곳은 하나의 ‘세계’일 것이다.
글쓴이: 순환선
소개: 스쳐가는 것들에 대해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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