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ter from 409] 나는 원래 그래

나는 나에 대해 잘 알고 있다. 뭐가 싫고, 언제 기분이 좋고, 어떤 순간들에 버거워지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나에 대한 가이드라인이 명확하달까. 그래서 행동하기 편안하다. 무력해지고 우울감이 찾아올 때면 나는 나를 내 손으로 달래줄 줄 알고, 원인을 파악할 수 있다. 이는 여행에도 적용이 된다. 나는 여행을 할 때도 하루에 한 번은 카페에 가야 하고, 박물관은 2시간 내로 마쳐야 최대한으로 집중하여 즐길 수 있으며 미술관에서는 작품 자체를 감상하기보다는 설명을 읽거나 오디오 도슨트가 있는 쪽을 선호한다.

지난 4월의 마지막 주, 나는 열흘 남짓한 기간 동안 벨기에와 네덜란드를 여행했다. 이 여행에서도 나의 불문율은 적용되리라 예상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생각은 완전히 깨졌다. 이번 여행은 나와 같은 학과, 네덜란드어과에 속한 친구들 3명과 함께 했다. 여행 성향이 둘로 나뉘었던 우리는 두 명은 도시인 암스테르담으로, 나와 친구는 근교인 에담과 볼렌담으로 향했다. 에담과 볼렌담은 조용하고 고즈넉한 마을이었기에 나와 친구의 여행에서의 큰 비중을 차지하는 행위는 사진 찍기, 관광 명소 방문하기가 아닌 대화를 나누는 것이었다. 나는 이런 사람인 것 같아, 나는 이런 직업을 갖고 싶어, 내가 이걸 하는 게 맞을까 같은 시시콜콜한 대화가 오갔다. 친구는 자신이 다녀온 파리의 오랑주리, 오르세 미술관에 관해 이야기해 주며 꼭 나에게도 방문할 것을 추천했다. 그런 친구에게 나는, 어떻게 미술 작품을 감상해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그림의 의미나 상징을 알지 못하면 큰 감흥을 느끼지 못한다는 말로 답했다. 그러다 문득, 최근 옥스퍼드에 방문했을 당시 재밌게 봤던 그림 하나가 떠올라 친구에게 내가 찍은 사진을 보여주었다.

가까이서 보면 그저 몇 개의 선들일 뿐인데, 멀리서 보면 영락없는 빗자루인 것이 재밌었다고 이야기했다. 친구는 이게 너만의 감상 포인트인 것 같다고, 너도 너 나름의 미술 감상법이 있는 것이라고 이야기해 줬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이 말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그런가? 하며 멋쩍게 웃을 뿐이었다.

시간이 흘러, 우리는 여행이 마무리되는 시점에 네덜란드 국립 박물관을 방문했다. 오디오 도슨트가 없는 것에 아쉬워하며 도대체 그림에서 어떤 것을 감상해야 할지 하고 고민에 빠지기 시작하던 중, 친구의 말이 불현듯 스쳤다. 그림을 자세히, 조각조각 내어 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완전히 새로운 세계가 펼쳐졌다.

친구의 말처럼, 큰 그림 속에서 작은 요소들을 발견하는 게 나의 재미이자 감상 포인트가 됐다. 분명 그림이 시선을 유도하는 곳은 커다란 배일 텐데도 배경인 산에도 사람들을 그려 넣고, 조그마한 선들이 모여 사람의 형태를 이루는 그림의 세계가 생경하게 다가왔다.

이렇게 작은 포인트들에 집중하다 보니, 그림에서 빛을 사용하는 방법 역시도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여성의 종아리에 비친 빛을 보았다. 이 빛을 쭉 따라가니, 숲속에 난 해의 길이 보이기 시작했다. 정말 눈앞에서 해가 지고 있는 숲속을 보는 듯했다. 이래서 그림에서 빛이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는구나 실감하며 이후로부터는 더 넓어진 시각으로 그림들을 즐길 수 있었다.

이러한 시간을 보내고 난 뒤, 내가 먼저 느낀 감정은 후회였다. 그림을 좋아한다고 이야기하려면 적어도 좋아하는 작가가 있어야만 할 것 같고, 인상주의가 어떻고 떠들 수 있어야 할 것 같은 착각들로 인해 ‘그림을 좋아하지 않아’, ‘볼 줄 몰라’라는 말들로 나를 감췄던 걸까. 이제까지 나 스스로를 ‘그림을 잘 모르는 사람’으로 정의하며 얼마나 많은 좋은 기회들을 허투루 날려버렸을지 세어보기 시작했다. MET에 갔던 그때 내가 이걸 알았더라면, 루브르에 갔을 때 이걸 알았더라면 하고 나를 타박했다.

‘나는 원래 그래’라는 말을 애인, 친구들에게 절대 하지 않으려고 노력해 왔다. 이 말은 상대에게 나는 문제점을 개선할 생각이 없으니 원래 그런 나에게 맞추라는 듯이, 폭력적으로 들릴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나는 나 스스로에게 그런 말을 끝도 없이 되뇄던 것 같다. 나는 원래 그런 사람이니 새로운 것은 받아들이지 않고 새롭게 생각해 보려는 시도와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 그 틀을 깨부수고 한 발짝 나아가면 생각지도 못한 새로운 세계가 펼쳐질 수 있는데. 나를 좁은 틀에 규정짓고 모르는 세계에 대해 단정 짓기보다는 직접 경험하고, 생각하고 느끼는 것이 평생의 숙제가 아닐지 하는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