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연] 사람은 떠나더라도 사랑은 간직해야 한다.

은희경,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

2023.02.17 | 조회 1.32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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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심

내가 사랑한 모든 존재들에게

 

무슨 생각해? 네가 병들었으면 하는 생각.

약해 보일 때만 네가 내 것 같아.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는, 내가 연민과 사랑을 구분하고 싶어 불쌍한 것과 사랑스런 것을 모두 노트 페이지에 적어보던 날에 만난 은희경의 장편소설이다. 나에게 사랑은 그제까지 소문으로만 존재했으며 제로가 아니지만 제로와 가깝던 것이었다. 첫사랑을 처음 사귄 동물 친구처럼 아껴 달래면서도 과연 이것이 사랑인지, 사랑이 맞는다면 내가 제대로 잘하고 있는지에 관한 질문들이 스무 살 일기장에 만발한 탄피처럼 그득했다. “하지만 언제나 잘못될 경우를 대비하여 자신을 완전히 던지지 않는 것을 강한 태도라고 볼 수 있을까.” 나는 언제나 실수하기 싫어 미리 실수했고 그건 연애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첫 연애는 특히나 나쁜 사이가 되고 싶지 않아 먼저 헤어지자는 말을 곧잘 꺼내는 방식으로 애인을 힘들게 했으며 그래서 헤어져 버렸다. 이별이 무서워 미리 이별하는 습관. 그런 일이 실제로도 있었더랬다. 말 그대로 잘못될 경우를 대비해 스스로를 던지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관계에서는 늘 희생적인 모션을 취해서 앞과 뒤가 부끄럽도록 달랐다. 이것은 강한 태도가 아니다.

 

나를 소개하고자 단점이라는 말로 가장한 특성을 말하려는 게 아니라, 스스로도 정말이지 명확한 단점이라고 생각하는 나의 빌어먹을 점 중 하나는, 누군가 나를 사랑한다고 말했을 때 조소하거나 자리를 피하는 점에 있다.

변명하자면, 그건 나를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나를 사랑한다 말하는 이를 위해서이기도 하다.

그가 나를 사랑한다고 말했을 때, 내가 사랑받을만한 사람인 것과는 별개로, 분명 그것은 착각이거나, 삶의 진실상 그도 누구 못지않게 외롭고 두려울 텐데, 내가 마침 곁에 있기에 나를 선택한 것일 뿐, 머리를 스쳐 지나가는 충만함이라는 기분에 속아…… 와, 나 너를 사랑하는 것 같아, 대단한 발견이라도 한 것처럼 말할 때.

나는 조소를 참지 못해 친구의 앞에서 웃어버린 적도 있다. 그가 비웃겼던 게 아니라, 그릇도 없는 부엌에서 내게 토마토 수프를 끓여주겠다고 마트로 나서는 아이를 보는 것 같았기 때문에…… 빈정거리는 거다. 없는걸 준다고 말하니까.

사랑이라는 게 없는데 어떻게 ‘사랑’을 ‘하지’.

사랑한다는 말은 죽은 이가 나를 보러 오겠다는 말처럼 웃긴 거지.

너는 몸이 없는데 어떻게 나를 보러 여기까지 오겠다는 거니.

하지만 나도 죽은 네가 보고 싶으니 오겠다는 말을 덜컥 믿어버린다.

“왜 웃어?” “믿고 싶어서.”

 

스무 살의 내가 혼자 굳건한 자세로 성숙했던 게 아니라, 넘어지지 않기 위해 힘 풀지 않고 있었다는 것을 이제 나는 안다. 사람인人 자가 사람 둘이 서로 기대고 있는 한자라는 것을, 한 사람이 한 사람을 버티는 게 아니라 둘 모두 있는 힘껏 힘을 풀었기 때문에 누구도 넘어지지 않고 유연할 수 있다는 것 역시 이제 나는 안다.

 

그 당시 내가 가장 되뇌던 문장은 “그러나 아무리 애인이 여럿이라도 시간이란 채워지지 않는 것이다. 외로움의 해소는 애인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것이다.”였다. 나는 시간을 흘려보내는 게 아니라 무언가 해야 하는 것, 빈 주머니처럼 채워 넣어야 하는 것으로 여겼다. 그래서 연애를 할 때 관계에 있어서 내게 가장 중요한 기준은 즐거움이었다. 시간 가는 줄 모르는 것. 많이 웃고 재미있어서 질리지 않는 것.

 

어째서 나는 당장 하고 싶은 걸 해야 할까? 아무것도 하지 않고서는 버틸 수 없고 시간을 헛되이 쓰면 마음이 마구 답답할까? 물었을 때 친구 수현은 이렇게 답해주었다. 주연은 삶이 유한하다는 것, 삶에 끝이 있다는 걸 명확히 알고 있기 때문에 시간과 현재를 중요시하는 것 같다고. 사랑은 나에게 시간과 엇비슷하게 작동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종종 나의 성격에 체념이라는 단어를 덧입히지만 사실 말하고자 하는 건 ‘체념’과 조금 다르다. 사람은 떠나고, 약속한 영원은 “한때 영원을 시도했음”으로 바뀐다. 나는 김금희의 소설처럼, 오늘은 사랑하지만 내일은 모르겠는 사람이다. 오늘 아침 사랑‘했던’ 것을 저녁에 권태로워하고, 내일 당장 길거리의 가장 큰 돌에 한때 사랑‘했던’ 것을 두고 올 수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이 배경에서 내가 주장하고자 하는 건 “길거리”가 아니라 “가장 큰 돌”이어서, 소중히 여기지 않았다면 굳이 큰 돌을 찾아, 앉기 편하도록 사랑의 엉덩이를 말끔히 닦아주지 않았을 거라고 나는…… 변명하고 싶다. 왜 나를 버리는 거야? 그런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아니…… 네가 나를 버리는 거라고 말했지만, 잘 생각해 보면, 그가 나를 버린 동시에 나 역시 그를 버렸다. 그러나 어디에 버리고 올지를 한참 고심했다고…… 더 예쁘고 깨끗한 곳에 얹고 싶어서. 소중했기 때문에, 가장 큰 돌 위에 너를 두고 왔다고. 믿어주면 좋겠어.

 

사람이 영원하지 않은데 사랑이라고 영원할까, 나는 누군가가 한 이 영원에 대한 논의를 좋아하지만 지금은 해당 문장을 인용할 때 뒤에 꼭 덧붙이는 말이 있다. 유한한 것은 사람일 뿐 사랑이라는 감정은 영원하여 사람과 사람 사이를 난간처럼 뛰어다닌다. 네가 나를 사랑했다가 다른 누구를 다시 사랑할 때, 그건 사랑이 아닌 사람인 네가 변한 것이며

그러니 애초에 슬플 것도 없다.

 

“순간에 깃들이는 짧은 공유의 느낌이 사랑의 한 조각이리라고 중얼거렸던 것도 같다.” 그래서 나는 가끔, 더 이상 사랑이 영원하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 역시 든다. 그런 생각은 아주 가끔만 들기 때문에 이왕이면 사랑이라는 것이 아주 확연하고 영원해서 그런 건 없다고 장담하는 나의 우매함을 완전히 짓밟고 골려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매일 같이 들지만 아주 가끔은 사랑이 영원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아주 가끔만 그런 생각이 든다.)

 

전시를 많이 보는 사람이 전시를 보지 않는 사람과 다른 점은, 보는 쪽이 보지 않는 쪽을 업신여긴다는 것이다. 요리를 잘하는 사람과 요리를 못하는 사람에게 다른 유일한 점이 있다면 그 역시 요리를 잘하는 쪽이 과하게 우쭐댄다는 것밖엔 없다. 사랑을 하는 사람이 사랑을 하지 않는 사람과 다른 점은, 사랑을 하는 쪽들만, 주로 과하게, 영원에 대해 떠올리고 생각한 뒤 화를 낸다는 거다. 사랑과 영원은 머리 뒤로 스쳐 지나가는 것이다. 영원할 것이라 예상한 적 있다면 그 예상 자체로도 이미 영원이다. 그때는 영원할 줄 알았지,라는 문장은 틀린 문장이다. 그때는 영원했지. 이게 맞는 문장이다.

“그때”는 “영원했다”는 문장.

비약처럼 들리지만 나는 잠깐 영원을 겪었다고 믿는다. 영원이 행성이 멸망하고 생명체가 멸종해도 끝까지, 끝이 무언지는 모르겠지만 끝이 나더라도 끝나지 않을 어떤 것이어야 한다고 모두들 (나 역시) 착각하지만, 어떤 순간에 내가 무지하게 기뻤고, 그래서 기쁘다는 말로는 도저히 표현이 안되고, 나를 사랑하는 네 얼굴이 강물처럼 느껴질 때 그 순간은 일종의 영원인 거다. 죽을 때까지 잊지 않을 얼굴. 이는 나만 아는 내 몫의 영원이다. 영원은 모두에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사적이고 개인적인 단편으로 존재한다.

 

다시 이야기로 돌아와서, 체념이라는 단어는 희망을 버리고 아주 단념하다는 뜻인데, 나는 사랑을 애초에, 희망 가질 것도 없는 평범한 것으로 정의지었다. 그렇게 생겨 먹은 것을 그렇다고 말하는 게 어째서 체념인가? 인정이지. 사랑에 관하여는 품은 것을 포기할 필요도 없다. 처음부터 사랑이란 가진 속이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너와 나 사이에 있는 것을 사랑으로 분류한다면, 이 사랑은 아마 유효기간이 있을 텐데, 이것 역시 전혀 슬프지 않다. (거짓말이다.) 하지만 기간이 아니라 크기와 느낌으로 구분한다면?

어제는 너랑 있어서 이만큼 즐거웠어, 그게 육체가 느낄 수 있는 최대치의 기쁨인 줄 알았는데 오늘 너랑 노니까 어제보다 더 좋다.

이 기분은 나에게 가늠할 수 없는 무한이다. 더 이상 너와 함께 있는 것이 즐겁지 않게 되는 날, 그런 게 정말 오더라도 네 덕에 내가 무한을 알았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영원의 가장 재미있는 점은 바로 이것이다. 영원은 감정이라 느낄 수만 있지 볼 수도 맡을 수도 없는데, 말을 하다 마는 나와 다르게 마침표를 꼭꼭 찍으면서. 문장을 끝내면서. 영원을 보여주겠다는 사람이 있다. 그래서 나는 조용히 입이나 벌리고 날아오는 토마토와 양파 따위를 모조리 잡아먹고 그릇을 사온다. 만들 줄은 모르지만 나도 해줄게, 토마토 수프. 너랑 있으면 그냥 재미있기 때문에. ‘사랑’을 ‘한다’는 말도 믿어준다.

 

네가 오후 네 시에 온다면 나는 세 시부터 기쁠 거야.

네가 네 시에 온다 약속해서 다섯 시까지 기다렸어.

네가 네 시에 올 텐데 나는 이미 너를 본 것처럼 시간을 모두 동시에 사는 것 같다. 너를 기다리지 않는 시간에도 너를 기다리고 있다. 숫자라는 것을 상상하면 실제가 꿈처럼 느껴진다. 즐거웠어. 앞으로도 나랑 놀아줄래? 이것 모두 영원이다.

나랑 자주 놀아줄래?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진실한 말.

 

네가 내일도 내일내일도 나랑 놀아주면 좋겠다. 은희경의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는 진희가 눈 내리는 연말의 썰렁한 카페에서 전남편을 기다리며 혼자 술을 마시다 끝이 난다. 작가의 말을 빌리자면, “진희의 곁에는 아무도 없다. 감상적인 첫사랑의 얘기를 무심히 떠들어대는 뒷자리의 남자들이 있을 뿐이다.”

진희는 고독했을까. 외로웠을까. 물론이지.

그러나 사는 게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사랑이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닌 어떤 것이듯 사는 것 역시 좋을 것도 나쁠 것도 없는 것이다. 그냥 존재하는 것.

그러나 내가 사랑하는 친구들이 사랑을 좋아하여 나는 기분이 좋다. 네가 나랑 놀아주고 나를 사랑한다 말해주어 그 역시 기분이 좋다. 내일도 내일내일도 나랑 놀아주면, 열심히 수련하고 단련해서 토마토가 없는 토마토 수프 같은 것도 만들어줄게. 나는 영원을 몰라도 약속할 줄은 안다.

 

 

<흑심; 내가 사랑한 모든 존재들에게>는 선인장도 안아 주는 '미지'와 고양이처럼 나뒹구는 비닐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주연'이 함께합니다.

· 미지: poem.aboutyou@gmail.com / 마음을 기다리고 있어요.

· 주연: micoks2@naver.com / 답장에 답장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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