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숙소를 잡고 부산 여행을 갔던 밤, 칵테일 바 건너편에 있는 편의점에 들러 커터칼을 사고 그걸 오른쪽 주머니에 구겨 넣고서 누군가 말을 걸면 그를 돕거나 죽여버리거나 둘 중 하나라고 바닥을 노려보며 걸은 기억이 있다. 마음은 병약의 단골이다. 희게 뜨는 팔꿈치는 바람마다 가렵고 겨울에는 내가 살지 않는 궁전이 볕을 모두 막고 서서 어제 심어놓은 낟알들의 성장을 방해한다.
나는 갇힌 기분이 싫고 폐쇄된 공간이 싫고, 방에서 나왔는데 여전히 실내이며 아파트를 나와서도 지구 속에 있다는 걸 깨달으면 답답하다. 내 몸에 내가 갇혀있다. 생각을 하는 것과 생각이 되는 것은 다른데 어떤 사실은 내가 인지를 당해버리므로 길을 걷다가도 밥을 먹다가도 뜬금없이 그런 하릴없는 생각들에 공격받는 것이다.
알고 싶지 않았는데 알아버린 것과 알고 싶어서 여러 번 찾는 것의 중간에 서서 내가 무엇을 모르고, 혹은 무엇을 모르려 하고에 대해 골몰하다 보면
이번 연도 엄마가 해준 말이 떠오른다.
다시, 혼자 숙소를 잡고 부산 여행을 갔던 밤, 아쉽게 장학금을 놓치고 한 사람과 여러 번 만났다 헤어졌다를 반복하며, 어째서 나는 혼자 단단히 서 있을 수 없는지 알아보기 위해 무작정 기차표를 끊었던
늘 무언가를 헷갈리고 잃어버리던 내가 그날 역시 결제 날짜를 잘못 선택해 당시의 내게는 제법 컸던 숙소 값을 버렸었다. 평소 같았다면 웃고 넘어갔을 테지만
학습된 생활력의 육체에 갇혀 나로서만 생각하고 나로서만 행동할 수밖에 없는 내가 너무나 답답하고 싫었기 때문에, 그만 소리 내여 울어버렸던 기억이 있는데,
엄마가 그날을 잘 간직하고 있다 몇 달이 지난 나에게 말했다.
반 년 전의 주연이가 울었던 이유 기억나?
기억나지 않기 때문에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했고,
그래 그런 거야.
라고 대답하며 엄마는 내게 내가 잃어버렸던 숙소 값의 20배 가격을 계좌로 보내주었다.
메일링을 시작할 때의 나는 아주 연약해져 있었고 그러나 한 달이 지나고 흑심 발송 테스트 메일을 네 번째 받을 때에는 모든 것이 바뀔 거라고 이미 예상했다. 나아지든 나아지지 않든 어쨌거나 지금과는 다르다고. 작년 크리스마스와 올해 크리스마스를 비교하자면 달라진 것 하나 없어 보이지만 삶의 정체는 일 년이나 십 년처럼 큰 시간 단위가 아니라 작은 시간 단위로 결정된다. 록과 술을 마시면서 모든 건 일주일이라 말한 적도 있다. 일주일 전의 나와 일주의 후의 나는 너무나 다른 타인이며 그럼에도 같은 사람으로 묶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변화’라는 기록되는 과정이 있다 착각하는 거라고. 록은 술자리가 끝나고 지하철을 기다리는 내게 일주일 뒤엔 다 괜찮겠지?라고 말했고 실제로 모든 것이 그랬다.
시간은 약이 아니고 시간은 시간 그 자체이므로
시간이 흐른 내가 시간이 흐르기 전의 나를 만나 한 마디를 전할 수 있다면
역시 싫은데. 아무 말도 말아야지.
육각의 층계참을 천천히 오르고 내리는 동안 내가 할 일은
아무래도 천천히 오르고 내리는 것 하나뿐이다
유광 텐트 해변에 설치하고 숲이 자라나는 기분으로 이틀간 잠들어보면
머리맡에 모르는 흰 개 나를 보며 침 흘리듯 웃고 있다
개에게는 뿔도 있다
시간이 흐른다는 건 그런 거다 시곗바늘의 움직임이나 늘어나는 주름처럼 눈에 보이는 해석이 아니라
쌓여있는 공구실 철봉의 개수나 어제는 없었으나 오늘은 날 따라온 양탄자
두 가지 색의 뜨개 실로 따뜻해 보이는
산타 같은 것들을 발견하게 된 내 마음
있었네? 이런 게
또 있다 보니 내 곁에 있었네?
이렇게 좋은 게
그래 그런 거지, 나는 가성비 좋은 사람이고 지금까지 그랬으나 앞으로는 그러지 않을 어떤 것들과 지금까지 그랬으니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 믿고 싶은 것들을
내 마음대로 낙관적인 부분으로만
나에게 내가 생색을 내면서 살아갈 테고
스무 살의 나는 누가 내게 말을 걸면 분명 무섭겠지만 외로운 게 가장 무서우니 말 좀 걸으라고 그래서 바다 밖을 나갔던 것 같다. 지금은 누가 말 걸지 않아도 된다. 길게 돌아와 모든 게 뭉개졌지만 이 서늘한 실종의 풍습
어째서 외롭지가 않지? 혼자서도 행진할 수 있지?
신기하네...
신기해서 무섭고
무서워서 좋다
모두가 무섭고 좋기를, 이번 수능 동생에게 보낸 문자 중 일부의 문장을 인용하며 한 달간의 메일링을 마친다.
기억해 너는 우주에서 가장 아름다운 기체로만 이루어진 행성에서 잠깐 쉬기 위해 이 섬으로 왔어, 그러니까 즐기자, 다시 돌아가기 전에
네가 좋아하는 것들을 다 하고 가
그것만이 중요하다
방수포로 덧씌워진 건널목의 살점들
내 몸의 손님은 나고
벽돌로 가리어진 우물 내가 만지고 해석한 그것들을 네게 구경시켜줄 수 있었던 거
내가 기우뚱거리며 전시되었던 거
즐거웠고 여전히 그렇다고 생각해
<주연이 크리스마스 트리에 장식하고 싶은 말>
12/19 : 난 정이 언니나 주연이 언니가 길 가다 철푸덕 주저앉아도 웃으면서 옆에 앉아줄 수 있을 것 같은데
12/20 : 너를 힘들게 하는 것들은 모조리 멸망했음 좋겠어
12/21 : 문창과가 어떻게 우는 줄 아냐? 글썽글썽
12/22 : 이게 네가 나오는 가장 긴 꿈일까 봐 잠에서 깨면 너부터 찾아
12/23 : 내 첫사랑이다 넌
12/24 : 난 오늘따라 딸기 마카롱이 먹고 싶으네...
12/25 : 네가 내 세상의 폭을 넓혀줬다면 난 너에게 새로운 세상의 면을 보여주고 싶어
주연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으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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